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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정부가 11월 23일 강만수(姜萬洙) 재경원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협의단을 구성, 협상전략을 숙의할 무렵 IMF 실무협의단 1진이 서울에 입성했다. IMF의 준비는 완벽했다.


11월 24일 오전 10시 첫 상견례 장소에서 협상의 이상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다. 김우석(金宇錫) 재경원국장은 “IMF의 지원목적이 한국경제를 얼마나 신속하게 정상화시키느냐에 있는 만큼 협상에 큰 이견이 있을 것으로 보지 않는다. 본진이 도착하는 26일 이후 이르면 열흘 이내에 협상이 마무리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금융시장은 달랐다. 협상분 위기와 정반대로 가고 있었다. 협상 결과를 너무 빨리 읽고 있었다.


22일 주가가 15.64포인트 떨어질 때만 해도 IMF 후광이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24일, 10년 4 개월만에 최저치인 441.02로 마감됐다.


‘IMF주가’는 이후 단 하루도 상승하지 못한 채 협상이 타결된 12월 3일 339.31로 내려앉았다. 환율은 달러당 1,200원대를 돌파했고, 가용외환보유 고는 60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IMF가 지원에 나서면 외환시장이 빠르게 안정될 것으로 국민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 밖이었다. 지원을 기 대했던 일본과 미국은 물론 각국 은행들이 무차별적으로 자금을 회수했다. 하루에 21억 달러까지 빠져나가기도 했다. 강경식 부총리의 ‘경제기초론’에 길들여진 국민들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분명 일시적인 위기라고 했는데. 캐나다 벤쿠버 아태경제협력체 (APEC) 정상회의에 김영삼 대통령이 참석했다. 그러나 국민의 여론은 경제는 찬바람이 부는데 외국에 나갔다고 원망스러워 했다.


김 대통령은 24, 25일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일본 총리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잇달아 만났다. “한국 금융시장이 안정되면 아시아 금융시장이 안정되고, 세계 정치 경제의 안정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김 대통령의 말이었다.


“한국도 금융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겠다는 확실한 의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시모토의 응수.


“최대한 한국입장을 지원하겠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담담하게 답한다. 클린턴은 회담 전 “긴급지원을 요청 한 해당국 당국자들이 책임 있는 정 책을 수행하고 있는지 여부를 IMF가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결론 은 ‘IMF를 거쳐라. 개별지원은 어렵다’였다. 한국 경제에 대한 불신이 역력했다. 이를 입증하듯 다음날 미국의 신용평가기관 스탠더드 앤드 푸어 스(S&P)사는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에서 ‘A-’로 2단계 하향 조정했 다. 불과 한달 만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금융상황은 악화하는데 당국은 이를 인정하고 효과적으로 대처하기를 계속 꺼렸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IMF에도 갔는데”


당시 정부의 대응을 보자. 22일 12개 종합금융사 외환업무 개선명령(만기 불일치 연말까지 해소), 25일 금융기 관 원리금 3년간 전액지급보장, 8개 종금사 외화자산부채 은행에 양도권고, 26일 은행 증권 투신 등을 통한 8 조5천억원의 증시 투입, 예금인출 등 으로 위기에 몰린 종금사들은 무차별적으로 여신회수에 나섰다.


한국은행 이 돈을 풀어도 시중에 돌지 않아 금리는 폭등했다. 상장사들이 이틀에 한 개꼴로 넘어졌다. 급기야 재경원은 27 일 대통령긴급명령으로 대출금 상환 유예와 금융실명제 전면유보를 건의 했다.


28일 아침. 청와대 본관 집무실. 캠프 데이비드에서 골프로 추수감사절 휴가를 보내고 있던 클린턴 대통령으로 부터 연락이 왔다. “2시간 후 전화통화를 하고 싶어한다.” 양국 정상간 전화통화는 24시간 전에 통보하는 게 외교관례였다.


“IMF와의 협상을 12월 1일까지 끝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은 국제금융계로부터 심각한 응징을 받을지 모른다. 협상 타결시 미국은 2선에서 자금을 지원하겠다.” 15분 가량의 통화는 일방적이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미 한국의 외환보유 고가 곧 60억 달러로 감소, 12월 첫주에 채무불이행(Default) 상황에 이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김 대통령은 임 부총리를 호출했다. “빨리 끝내라.” 그날 밤 협상테이블이 재경원회의실에서 IMF실무협의단 숙소인 힐튼호텔로 옮겨졌다. 1985년 건국이래 최대규모 국제행사인 IMF·세계은행(IBRD) 연차총회가 열렸던 곳. 당시 경이적인 한국의 경제 성장에 대해 찬사가 쏟아졌던 장소, 바 로 그 곳에서 한국에 대한 법정관리 협 상이 이루어졌다.


이틀 후인 12월 1일 새벽 0시 20분. 협상장소인 힐튼호텔 지하 국화룸 앞, 맞은편 나이트클럽 파라오에선 젊음을 만끽하는 환희의 찬가가 굉음처럼 터져 나오고 있었다.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임 부총리, “양 측 실무선에서 협상안이 만들어졌다. 오전 중 캉드쉬 총재와 전화통화를 해 몇 가지 조율할 것이다. IMF실무단이 우리 정부와 협상하면서 총재의견을 충분히 반영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협상은 그로부터 이틀하고도 20 시간이나 지나서야 마침표가 찍혔다. 28일 임 부총리는 전격 방일했다. 오후 6시45분 미쓰즈카 히로시(三塚博) 대장상 장관을 만났다.


“일본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일본은 한국이 IMF의 합의를 조기에 끝내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합의가 이뤄지면 IMF를 중심으로 국제적 틀 안에서 충분하고 적절한 지원을 하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지극히 원론적인 답변이었다. 미쓰즈카 장관의 뇌리엔 ‘일본의 버르 장머리를 고치겠다’던 한국 대통령의 말이 맴돌지는 않았을까. 일본과 담판 지을 만한 사람이 없을 만큼 외교라인이 끊겨 있었다. 임 부총리는 왜 일본에 갔을까.


정부는 IMF와의 협상도중 내내 미국, 일본 등의 개별지원에 매달렸다. IMF 지원금이 적어야 조건도 줄어든다는 논리에서였다. 12월 1일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6개국’재무장관회의.


강만수 차관은 중국 측으로부 터 의미 있는 냉소를 받았다. “1인당 국민소득이 600달러에 불과한 나라가 1만달러가 넘는 나라를 지원 할 경우 국내 정치적으로 설득하기 어렵다.”


유지빈(劉積斌) 중국 상무부 부 장의 말이었다. 12월 1일 상오 10시 30분 캉드쉬 총재와 통화한 임 부총리는 낙담했다. “캉드쉬 총재가 ‘마지막 마침표가 아직 안 찍혔다’고 말했다”는 외신은 사실이었다. 우후 3시로 예정된 긴급국무회의는 다음날로 연기됐다. 재협상하게 된다.


12개 부실종금사 정리, 은행에도 같은 조치, 자본시장 개방, 기업지배구조 개선 등 엄청난 요구들이 쏟아졌다. 정리 종금사를 9개로 간신히 줄였다. 그날 밤 임 부총리. “2일 오전까지 는 모든 협상이 마무리될 것이다.”


12월 2일 오전 8시 30분 청와대 본관 에서 국무위원과 비상경제대책자문위원 연석회의에서 IMF 차관 합의서를 의결할 예정이었다.


옆방에서 캉드쉬 총재와 통화하던 임 부총리는 거의 수화기를 놓칠 뻔했다. “협상이 아직 끝난 게 아니다. 협상타결 얘기를 언론에 꺼내지 말라.”


이날 국무회의는 또 무산됐다. 재협상이 시작된 11월 30일부터 데이 비드 립튼 재무성차관이 협상장에 있었다. IMF측은 그와 협상결과를 일일이 상의하였다.


12월 2일 태국 방콕 국제노조연맹총 회장에서 미셀 캉드쉬 IMF 총재는 예상외로 단호했다. “금융파국위기가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며 지원을 호소해 오면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한국정부가 상황을 너무 오래 질질 끌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합의서 체결을 위한 ‘공식’ 방한을 하루 앞둔 캉드쉬 총재는 ‘베니스 상인’ 그 자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IMF 수석졸업생이다”고 추켜세우던 그였다. 왜 돌변했을까.


캉드쉬 총재는 2주 전인 11월 16일 정부 요청에 따라 극비리에 한국을 찾았다. 그로부터 정부가 IMF행을 발표했던 21일까지, 급박했던 1주일을 돌아보 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12월 3일 오전 7시 35분 마침내 캉드 쉬 총재가 도착했다. 두 시간 후 협상 안에 서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캉드 쉬 총재는 시간을 끌었다. “3당 대선 후보들의 합의각서가 필요하다.” “곤란하다. 대통령이 있지 않느냐.” 임 부총리와 캉드쉬 총재의 30분간 회 동은 결론 없이 끝났다.


잠시 후 청와대에서는 “대통령의 권한 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하겠으니 빨리 협상을 마무리해 달라.” “너무 서운하게 생각 마십시오.” 캉드쉬 총재는 미동도 안 했다. 결국 대선 후보들의 보증서가 전달됐다.


오후 7시 40분 임 부총리와 이경식 한은 총재는 캉드쉬 총재가 지켜보는 가운데 IMF 합의서에 서명했다. 정부는 극심한 외화 부족 난을 견디지 못하고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 12월 3일 570억 달러를 지원 받기로 합의 했다.


IMF와 맺은 차관협정을 심의하기 위해 소집된 4일 임시 국무회의는 시종 비장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국무위원들은 정부를 향해 쏟아지는 질책과 분노의 여론을 절감하는 듯 착찹해 하는 표정이었다. 평소와 달리 옆자리의 국무위원과 귀엣말을 나누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


경제난국을 초래한 책임을 통감하면서 ‘죄인’의 심 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국무위원들은 임 부총리로부터 1시간 동안 IMF와의 정부간 협상과정 과 내용을 보고 받고 합의문서의 명칭을 둘러싸고 잠시 토론을 벌였다. 영문 ‘AGREEMENT’의 번역을 ‘협약’으로 할 경우 국회동의를 거쳐야 한다는 논란을 빚을 수 있다는 유종하 외무장 관의 지적에 따라 ‘의향서’로 바꾸기로 했다.


이어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고건(高 建) 총리가 말한다. “우리 경제가 IMF의 긴급지원을 받기 에까지 이르게 한데 대해 내각을 이끌고 있는 국무총리로서 국민들에게 참으로 죄송스럽고 송구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고 먼저 국민에 사죄했다.


고 총리는 책임을 진다는 뜻에서 ‘내각 일괄사퇴가 도리’라고 해 장내를 긴장시켰다. 그러나 총리는 “대선을 2주 앞두고 있고 또 현 내각의 임기가 불과 3개월도 남지 않아 국무위원의 일괄사퇴는 국정을 더욱 혼란에 빠뜨 리지 않을까 걱정된다”며, “대선 엄정 관리와 경제한정 회복에 최선을 다하 는 것으로 내각의 소명을 다하자”고 말했다.


고 총리는 이어 “우리 사회 각계에서 펼쳐지고 있는 허리띠 졸라매기 운동에 국무위원도 동참해 급여의 20%를 반납하자”고 제의했다. 몇몇 장관들이 “공직사회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생각해야 한다”며 주저했으나 대부분은 ‘각오하고 있었다’는 듯이 흔쾌히 받아 들였다.


이어 참석자들은 IMF 관리 시대 정부 의 후속대책을 논의했다. 오인환 공보처 장관 등이 ‘경제부처에 대한 신뢰회복이 급선무’라고 하고 정부가 솔선수 범하고 국민에 비전을 제시해주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협상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저자세’를 보인 것이 아니냐는 비경제 부처 장관의 질문도 있었고 이에 대해 임 부총리는 “IMF의 권고는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우리가 해야할 일이었다”고 답했다.


1시간 이상 계속된 토론은 그러나 맥  빠져 있었다. 자책과 반성, 다짐의 목소리는 높았지만 ‘사후약방문’ 처럼 공허하게 들렸다.   구제금융협상은 IMF사상 최단 시일 내에 끝났다. 멕시코가 32일, 우리는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12일이었다.


국무회의가 2차례나 무산된 탓일까. 12월 4일 첫 경제대책회의 임 부총리는 이 점을 강조했다. 이날 주가는 모 처럼 400선을 회복했다.


그러나 문제는 외환수급이었다. 지원금이 200억 달러에서 580억 달러로 늘었지만 당장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 다. 온 국민은 참담해 했다. 한나라당은 IMF의 권고사항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경제 전 분야의 구조조정과 금융시장 안정화를 통해 빠른 시일 내에 경제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쪽 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대통령 후보 이회창은 12월 4일 오후 대구를 방문,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와 IMF의 협상결과에 원칙적으로 동 의하고 대통령에 당선되면 성실히 이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맹형규 대변인은 IMF의 대통령후보 합의각 서요구에 대해 “국민 자존심 차원에서 적절치 못한 것”이라며 유감을 표명 했다.


국민회의 간부회의에서 IMF협상결과에 ‘불만’을 표시하고 협상과정에 대해서 ‘국치’로 받아들이면서도 IMF조건을 원칙적으로 수용했다. 당장 IMF로 부터 1백억 달러 이상을 빌리지 않을 경우 이달 말 안으로 외환보유고가 바닥 나 석유수입이 불가능해지고 신용 장거래가 중단되는 등 국가부도사태 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었다.


국민신당은 IMF의 권고사항 중 경제 성장률 3%과 실업률 6%의 재조정을 촉구했다. 재협상을 통해 경제성장률 은 5%로,실업률은 4% 미만으로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IMF협약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 었다. IMF 자금지원의 대가로 국내에서는 금융 기업 등 거의 모든 분야를 외국인에게 전면 개방해야 했고, 정리해고, 물가상승 등의 IMF 한파가 몰아 닥치기 시작했다. IMF 구제금융 직후에는 흑자부도 기업들도 속출한다.



[이국영 프로필]


•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 라이프 연구소 소장
• 전) 한은 은행감독원 은행검사역
• 전) 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 저서 「금 융기 관 자 점 감사 론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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