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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한국경제 비화 ⑯] 이상한 한국은행 독립 1950~1998년

파리 목숨 은행장 ③

서울은행 손홍균 행장의 구속
1996년 11월 서울은행 손홍균(孫洪鈞) 행장이 대출 수수료를 받아서 구속되었다. 손 행장은 금융계의 고질적 병폐인 투서로 중도퇴진됐다는 후문이다. 사연인즉, 손 행장과 라이벌 관계였던 이 은행 퇴임 임원이 손 행장의 비리를 몇 달 전 검찰에 투서함으로써 수사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검찰에서는 이 투서에 확실한 물증이 제시됐기 때문에 손 행장을 내사, 구속할 수밖에 없었다고.


손 행장은 1996년 3월 부도난 국제벨브 등 2~3개 업체에 대출한도를 초과하면서까지 200여억원을 대출해 주면서 2억1000여만원 수수료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국제벨브의 경우 이 은행내 손 행장의 반대세력이 1996년 3월 경제정의실천 시민연대에 제보함으로써 비위사실이 불거진 것. 경실련은 당시 국제벨브가 재무제표를 위조, 서울은행에서만 100억원을 대출받은 과정이 석연치 않다고 주장했다.


손 행장은 결국 자진출두형식으로 검찰에 소환됐다. 국제벨브공업 회장 박현수(朴賢洙, 53)로부터 받은 대출사례비는 1995년 4월부터 11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1억원. 손 행장과 박 회장은 처음 10만원권 수표로 4000만원의 사례비를 주고  받았다. 그러나 10만원권 수표는 자금추적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어 세 번째 수수료가 전달될 때부터 안전한 ‘뇌물통장’이 이용됐다.


1995년 9월 추석을 앞두고 서울은행장실을 찾아가 1000만원이 예치된 제일은행 신촌지점 통장을 건넸다. 통장 명의자는 ‘박현수’였으며, 박현수의 도장과 비밀번호도 함께 전달됐다. 손 행장은 이 통장에 앞서 받은 수표 4000만원도 입금했다가 전액 현금으로 인출, 검은돈을 세탁했다. 2개월 뒤인 11월에는 더 큰 뭉칫돈이 입금된 ‘뇌물통장’이 건네졌다. 자금난에 시달리던 박 회장이 제2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담보가치가 없는 부동산을 잡고 124억원을 지급보증해준 것에 대한 사례비 5000만원이었다.


이때는 손 행장의 입출금 편의를 고려하여, 서울은행 망원동지점에 개설된 통장에 입금됐다. 손 행장은 이 돈을 나중에 박 회장에게 돌려주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박 회장이 경영하던 국제벨브공업, 국제철간과박 회장 부인이 대표인 현창산업이 1996년 3월말 부도가나 거래가 정지되고 박 회장이 도주한 상태였다.


회사 부도는 회사 도운 은행장 구속으로 이어져
1997년 1월 24일 한보철강이 부도를 내자 곧 금융사고로 이어졌다. 청와대 고위층에서는 이 보고를 받고 관련자는 고하를 막론하고 사법처리하도록 엄명을 내린다. 국민들이 바라보는 눈은 자연스레 어느 은행장이 구속 수감되느냐에 주목하게 되었다.


나, 내 남편, 내 자식이 아닌 부귀영화를 누린 은행장이 잡혀 들어가는 것을 보면 일종의 쾌감을 느낀다. 그게 사람이다. 이들이 수용되는 구치소 비용을 국민 자신들이 세금으로 내면서도. 1997년 2월 제일은행 신광식(申光湜) 행장이 1996년 7월과 9월 한보그룹 정태수(鄭泰壽) 총회장을 만나 두 차례에 걸쳐 4억원을 받고 3891억원을 대출해주었고, 조흥은행 우찬목(禹贊穆) 행장도 1995년 2월 은행장이 되면서부터 1996년 7월과 9월 2억원씩 두 차례에 4억원을 받은 혐의로 각각 구속되었다. ‘거래업체가 부도나면 은행장이 다친다’는 우스갯소리가 정설로 자리 잡은 것은 이러한 세태를 반영한 것이다.


종용에 의한 사퇴, 은행장들의 반발
문민정부가 금융실명제를 최대의 치적으로 꼽아 이와 관련된 금융사고를 엄격하게 다뤘다. 1994년 1월 동화은행 선우 윤(鮮于潤)행장과 서울신탁은행 김영석(金永錫) 행장에게 장영자 사건과 관련 금융실명제위반 감독 책임을 지워 물러나게 하였다. 이 사건은 1982년 이·장 어음 사기사건으로 구속수감되었던 장영자(張玲子)가 가석방된 뒤에 1993년 10월 사채거래를 해오다가 금융실명제실시로 인해 자금거래가 어려워지자 실명 확인 없이 동화은행 삼성동지점과 서울신탁은행 압구정지점에서 거액CD 발행을 도와준 일이 있었다.


선우 행장은 사임 압력을 받고 승복하지 못하겠다는 불만을 표출했다. 자율화에 역행하는 처사라고 임직원과 주주대표의 ‘정부간여’에 대한 반발이 조직적으로 표출되기에 이르렀다. 동화은행은 정부의 전격적인 행장 경질조치에 사실상의 주주대표인 비상임이사는 물론 부차장급 간부와 직원에 이르기까지 연대서명으로 맞섰다.


그러나 더 이상 밉보여서는 좋지 않다는 현실 인식 속에서 그동안 안팎으로 ‘문제가 많다’는 지적을 받아온 전무를 포함해 동반퇴진으로 모양을 찾았다. 물론 장영자 관련 사건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위규에 대해서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은 일반적인 정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적법한 절차에 의한 문책’을 무시한 채 ‘종용에 의한 사퇴’라는 정치적 해결책을 시도했다가 은행의 조직적인 반발에 부딪힘으로써 감독 당국의 문책에 대한 정당성마저 손상당한 결과를 빚게 됐다. 자율화로 가는 ‘금융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데는 그만큼 희생과 대가가 따른다는 교훈을 남긴 셈이다.


또 하나 정부로서 매끈하지 못한 처리가 바로 외환은행 한국통신주 공개입찰가 전산 조작 사건이다. 이 사건은 외환은행이 1994년 4월 한통주 공개입찰에서 동행자신이 낙찰가 이상으로 응찰했다가 파문이 일자 전산자료를 조작, 응찰가를 실제보다 낮춰 허위 발표했다는 것. 외환은행 허준(許浚) 행장이 한국통신주 입찰가 조작사건으로 이 은행이사회에 사표를 냈다.


국민의 정부 시절 은행장들 ‘물갈이’
국민의 정부에 들어와서는 분위기가 전혀 딴판이다. 호남과 충청 출신 금융인들은 은행장을 꿈꾸고 물밑 접촉을 분주하게 했다. 자연스럽게 은행장을 물갈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은행의 구조조정 덕. 어떤 교수의 말처럼, ‘한국의 은행장들은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소대장이요, 미래의 전쟁을 치러야 할 중대장감’이라고 표현했다.


1차 구조조정을 겪어낸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승리자이지만 곧 또 다른 구조조정을 치러야 한다는 점에서는 전쟁 대기 인력인 셈이다. 은행장은 종전과 같이 사정대상이 된다든지 정권교체 기의 희생양이 아니라 아예 구조조정당하는 은행과 운명을 같이했다.


1997년 IMF 구제 금융신청 시 부실금융기관정리를 합의할 때 국민들은 제일·서울은행이 대상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이들 은행은 공적자금을 쏟아 붓고는 엉뚱하게 BIS자기자본규제비율이 8%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여 1998년 6월 동화·동남·대동·경기·충청은행을 퇴출시켰다.


그 과정에서 이들 은행의 은행장을 비롯한 임직원은 일부 직원만 흡수은행에 고용승계 했을 뿐 대부분 퇴출당하고 말았다. 당시 7개 은행은 조건부로 유보했다. 그래서 1998년 7월 31일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을 합병해 한빛은행으로 출범시켰고, 그 결과 상업은행의 배찬병(裵贊柄) 행장과 한일은행 이관우(李寬雨) 행장이 물러나고 경북 군위출신인 한미은행 김진만(金振晩) 행장이 취임했고 그 대신, 전남 강진 출신의 신동혁(申東爀) 전무가 한미은행장이 됐다.


조흥은행, 강원은행, 현대종금, 충북은행이 합친 새 조흥은행의 행장에 전남 장흥 출신의 위성복(魏聖復) 행장이 은행장에서 물러났다가 5개월 만에 되돌아왔다. 국민 행복추진위원회 심사위원들의 2시간 반에 걸친 면접에서 여신분야에 대한 판단 능력이 뛰어나고 위기 대처 능력에 서도 정상권이라는 점이 인정됐다고 한다.


한편 하나은행과 보람은행을 합친 새 하나은행은 김승유(金勝猷) 하나은행장이 맡게 되었다. 공모한 주택은행장에는 전남 광산출신 김정태(金正泰)가 뽑혔다. 그는 조흥은행에 입행했다가 1976년 증권회사로 갈아타서, 대신 증권과 동원증권에서 사장을 지내다 영입되었다.


국민은행과 장기신용은행을 합병하고 국민은행 송달호(宋達鎬) 행장이 맡는다. 그런데 건강이 좋지 않아 2000년 3월 정기주총에서 물러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김홍일 의원(김대중 대통령의 장남) 생모와 먼 인척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역차별’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주총이 가까워지면서 매일 출근하며 남은 임기를 채울 입장을 금감원에 밝혔다고도 한다. 그런데 이 의사는 무시되고 금감원 김상훈(金商勳) 부원장이 은행장으로 내려와 앉았다. 이 은행 노조는 구조조정을 마무리하려 취임한 것이라고 반발했지만….


은행장, 마냥 파리 목숨만은 아냐
1960년대 중반이후 이른바 정치행장들이 은행을 경영할 때가 있었다. 1962년부터 경제 개발 계획이 추진되면서 대일청구권자금, 현금차관으로 경제 개발이 시동 걸릴 때다.


모든 것이 정치와 직결되지 않을 수 없었다. 현금차관이든 상업차관이든 당시에는 정당의 보이지 않은 손에 의해 사전에 허락을 받아야 했던 때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은행도 정치권의 돈 배분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현금차관이든 자본재차관이든 이를 들여 올 때는 은행이 상환을 책임지겠다는 지급보증서를 발부해 주어야 했다. 차관을 공여하는 측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상업차관이나 정부보유외화로 기계설비를 도입하는 경우 국내 은행이 운전자금을 대출해 주어야 했다. 이 모든 과정이 은행으로 하여금 정치와 밀착하게 된 요인들이다. 더욱이 당시 전개된 사업이 독점사업일 경우 그 정도는 더더욱 심했다.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 가는 수수료 금액만이 아니다. 그러한 사업을 승인받은 자체가 이권이었고 프리미엄이었다. 때로는 사업승인 자체가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은행이 이들을 외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경제개발이 추진되는 초기단계에서 어느 나라에서나 있는 일이다. 더욱이 민족 자본이 없고 식민지 경영이나 산업 혁명을 거치지 않은 나라에서 금융이 정치와 밀착되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다. 은행 저축이라고 해야 이 같은 사업 추진에 충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득이 낮은 국민이 저축 여력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연히 중앙은행의 발권력 동원, 즉 통화증발에 의한 자금공급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당시 은행장들의 정치적 배경은 막강했다. 예를 들어 재무부에 가더라도 장관이나 만나는 것으로 끝나고 차관을 방문하는 것은 도량이 넓은 편에 속했다. 주무 부처의 장관도 은행장들을 마음대로 다루지 못했다. 여당의 재경 위원장도 국회의 실력자 등과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권력의 핵심인물과 허물없이 지내는 처지가 되기도 했다. 또 당시는 심한 인플레 시기였기 때문에 은행대출이 곧 이권 획득이었다.


현금차관의 4~5%의 이율에다 2~3%의 수수료 등 각종 도입 수수료를 가산해도 국내의 은행 예금금리보다 낮았다. 현금차관을 들여와 한국은행에서 원화로 바꾼 다음이 돈을 은행에 정기예금해 두어도 앉아서 돈을 벌 수 있었던 때다. 당시 어느 국회의원은 차관 한 건만 알선하면 선거비용을 갚았고, 다시 한 건을 더 주선 하면 차기 선거도 치를 수 있었다. 이들을 ‘차관국회의원’이라 불렸다.


이 같은 돈의 재원은 뻔하다. 차관을 받는 차주에게서 받아 낸 것이다. 차관지급보증을 해 주기 전에 받든 그 후에 받든 사례금이 수수된 것이다. 이른바 정치행장들이 금융계를 석권했던 당시의 얘기다. ‘금융기관에 관한 임시 조치법’에는 주주총회에서 선임된 임원도 은행감독원장의 사후승인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전 절차는 요식 행위였다. 은행감독원장은 물론 중앙은행인 한국은행 총재도 이들 정치행장 앞에서는 무력한 존재였다. 오직 정치와 관에만 잘 융합하면 카리스마와 같은 권위와 영광을 누렸다. 권력을 업었거나 지면 있는 자에 대해 담보도 챙기지 않고 대출을 해 준 것이다. 회수할 수 없는 것이 뻔한데도 미수이자는 증대함으로써 이를 위장시키기도 했다.

[한국경제秘話 17편]이 11월호에 계속됩니다.


[프로필]이 국 영
•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 전) 한은 은행감독원 은행검사역

• 전) 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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