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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한국경제 비화 ⑱]개발의 시녀 금융(Ⅰ)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혼합적 경제개발계획의 태동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기 전에는 보릿고개를 넘기려고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한 백성이 허다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GNP 세계 13위의 막강한 경제력을 보유한 나라다. 1997년 외환의 유동성 부족으로 IMF의 구제 금융을 얻어 위기를 넘겼고, 지금도 경제적으로 불안한 상태에 있지만. 이렇듯 박정희를 넘어서, 1962년부터 1981년까지 기적을 가져다준 4차에 걸친 경제개발계획은 어떻게 태동했을까.


5·16 쿠데타가 터진 바로 그날 오후, 육군참모총장실 옆 소회의실.
박정희 등 쿠데타를 주도한 대여섯 사람이 장도영 참모총장을 에워싸고 있었다. 군사혁명위원회를 대표하여 장도영 장군이 첫 기자회견을 준비하는 자리였다. 장도영은 쿠데타 세력의 브레인인 류원식 대령을 쳐다보며 이렇게 물었다.


“국체(國體)는 무어라고 대답하면 좋겠소?”
“입헌 민주공화국이라고 하시오.”
“경제체제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할까?”


한참이 지나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박정희(朴正熙)는 좌우를 돌아보다가 류원식에게 눈짓을 했으나 그는 계속 딴청만 피우고 있었다. 참다못한 박정희는 “류 형!”하고 재촉했다. 주위 사람들도 류원식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자유주의 경제체제의 테두리 안에서 계획경제를 하겠다고 하십시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혼합적 경제개발계획은 이렇게 처음 언급됐다. 그러나 군인들의 의욕과 총칼의 위협만으로 경제 개발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당초 군사정부는 전 각료를 현역장성으로 임명하고 경제장관들에게는 경제학 교수들을 고문으로 붙여주었지만, 민간인의 각료임명은 불가피했다. 군사정부는 한국은행 출신이며 주영대사(駐英大使)를 지낸 김유택(金裕澤) 씨를 재무장관에 임명했다.


1962년 6월 22일 취임한 김 장관은 29일 ‘재정·금융정책대강’을 발표했는데, “오늘날과 같은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자원과 기회를 총동원함으로써 앞으로 비약할 수 있는 발전의 바탕을 마련하자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하루 속히 완성시켜야 한다.


정부로서는 이미 완성된 초안을 토대로 국제적으로 신임이 두터운 기관의 전문가를 초빙해서 늦어도 10월 말까지는 실천할 수 있는 경제개발계획을 마련해 새해의 예산부터는 이 계획을 바탕으로 경제가 움직이도록 하는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했다.


재무장관이 된지 한 달 만인 7월 22일, 김유택 씨는 다시 부총리로 승격됐다. 초대 경제기획원장관. 건설부와 재무부 예산국, 내무부 통계국을 합쳐 신설된 경제기획원의 초대원장은 김유택, 부원장과 기획국장도 역시 한국은행 출신인 송정범(宋正範) 씨와 안종목 씨가 임명됐다.


경제기획원은 출범 목적에 걸맞게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세부안을 수립하는 게 당면과제였다.


일주일 만에 완성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이에 앞서 5개년 계획의 초안을 만든 것은 한국은행이었다.
유창순 한은총재 앞으로 최고회의 의장 명의의 공문이 온 것은 6월 초순이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1주일 이내에 만들어서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무슨 수로 1주일 동안에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쿠데타 직후의 서슬이 시퍼런 최고회의의 명령에 감히 토를 달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도리 없이 당시 국민소득 추계를 담당하던 조사부 통계과에서 이 특명을 수행해야 했다.


통계 과장 밑에서 국민소득 추계를 맡고 있던 박성상(朴聖相) 조사역이 실무책임자였다. 박성상 조사역을 필두로 국민소득계의 행원이던 안상국(安商國), 고광직(高光直), 이웅수, 이경식(李經植), 임해빈(任海彬) 씨 등이 이 막중한 일을 떠맡았다.


한은총재를 지낸 박성상 씨의 회고.
“우리가 계획을 짤 때에는 수력발전보다 발전비용은 비싸게 먹히더라도 공사비용이 적게 들고, 공사기간이 짧은 화력발전을 건설하도록 했다.


공사자금도 원조자금만 바라보다가는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이므로 정부보유 달러를 쓰기로 하고, 자유당 시절에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외화를 못 쓰게 해서 원조자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완급을 가려 필요하면 정부보유 달러를 쓰자는 생각이었다.


사정은 비료나 시멘트도 마찬가지였다. 식량이 모자라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형편인데 비료가 모자라 단위당 생산을 높이지 못했다. 시멘트가 없어 건설이 진척되지 않았다. 상공부에 가니까 기간산업의 공장건설계획이 있었다.


돈이 얼마나 들고, 공기(工期)가 얼마나 걸리는 건지 연구가 다 되어 있었다. 연구는 다 되어 있는데 추진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자료를 참고하여 건설비용, 자금조달 방법, 공기까지 명시한 구체적인 공장건설계획을 개발계획에 올려놓았다. 따라서 우리가 만든 경제개발계획은 거시적 총량계획보다는 미시적 투자사업계획에 더 비중을 두게 되었다.”


이렇듯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거시적 계획과 미시적 계획를 혼합하여 설득력 있게 작성되어 가능성이 높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한국은행은 2주일 만에 5개년 계획을 완성, 최고회의에 제출했다.


그리고 군사정부는 한국은행의 초안을 약 한 달간 검토해 7월 22일 최고회의안을 발표했다. 계획 내용은 별로 손대지 않았지만 연평균 경제성장률을 6%에서 6.5%로 높이고, 이에 맞게 숫자를 재조정하였다.


드디어 1962년 1월 중순 5개년 계획의 세부적 계획이 발표되자 그 반응은 구구했다. ‘의욕만 앞섰다’는 평가와 ‘겨우 그정도냐’는 우려, ‘공업에만 치중하지 말고 농촌부터 먼저 발전시켜라’는 불만까지 노골적으로 터져 나왔고, 사회 전체의 분위기는 ‘정말 실현될 것이냐’하는 의구심이 지배적이었다.


사실 계획의 전제조건인 투자를 위한 재원조달이 문제였다.
이는 군사정권 내에서 조차 말들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류원식은 “외자도입에 자신이 있고 내자동원도 가능하다. 내게도 비책이 있다”고 자신만만이었다.


그 비책이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서독자본의 유치이고, 또 다른 하나는 통화개혁, 바로 그것이었다. 어느 날 박정희 의장과 송요찬 내각수반 및 관계 최고위원들이 모인 비밀회의에서 류원식은 이런 주장을 폈다.


“지금 서독은 60억 달러의 정부소유 달러를 투자할 자본시장을 찾고 있다. 극동지역에 거점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은 독일의 오랜 숙원이기 때문에 서독과 유대를 긴밀히 하는 척하면 외자도입은 문제가 없다.


미국이 지불한 51억 달러의 원조와 14만명의 생명의 대가(代價) 중 지금까지 물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고작 폐품, 비료 공장뿐이다. 만약 서독의 차관도입으로 우리의 공업시설이 건설된다면 한국경제는 서독경제에 의존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정치적으로도 한-독 관계는 한-미 관계를 능가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미국으로서도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미국자본이 앞을 다투어 한국에 투자될 것이고 일본은 자연히 뒤쫓아 오게 된다.” 이 류원식의 구상은 일단 맞아 떨어졌다.


우리나라의 경제개발계획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1954년부터 1956년에는 헨리 타스카에 의해서 종합기관계획이 수립되었으며, 1954년부터 1959년 네이산 사절단에 의하여 한국경제재건계획이 실행되어 5%의 경제성장을 기록하였다.


민주당정권 때인 1960년부터 1962년까지 안(案)에 그쳤지만 경제개발3개년 계획 기간 동안에는 5.2%의 성장을 기록 하였다.


부정축재자들, 경제개발계획에 투입돼
경제개발계획에 4·19혁명 이래 부정축재자로 지목된 재계 인사들이 적극 참여했다. 한국은행 출신으로 초대 경제기획원 부원장을 지낸 송정범 씨의 증언.


“경제인 협회를 주축으로 한 경제인들의 고생과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4·19 이후부터 부정축재라는 덫에 걸려 사회, 정치적으로 수습하기 힘든 ‘핫 이슈’의 주인공들 아니었던가. 군사정부도 처음에는 명분론에 치우쳐 그중 일부를 구금까지 했으나 곧 현실론으로 선회하여 그들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경영능력을 국가건설에 활용하도록 했고, 경제인들도 적극 나섰다.


말하자면 세인들이 익히 알고 있듯 부정축재의 환수 대신 울산에 공장을 짓도록 했다는 것이다.


경제인협회의 찬성과 적극론이 5개년 계획 수립과 실천에 미친 영향은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들 기업인들이 처음 내놓은 사업계획이 비료, 정유, 제철, 화학, 섬유, 전기, 시멘트 등 기간산업 공장의 건설이었다. 이것이 경제개발계획의 골격에 반영됐다.


그러나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있어야 했다. 엄청난 외자와 기술도입이 필요했다. 하지만 쿠데타정부라는 약점이 발목을 잡고 있었다.


특히 미국이 그랬다. 민간차관 유치밖에 도리가 없었다. 목표는 류원식의 구상대로 서독을 중심으로 유럽을 끌어들이자는 것이다.


경제인협회는 유럽, 미주, 일본 등 아세아의 세 지역으로 나누어 희망지역을 선택하게 했다. 미주지역은 이병철, 구인회, 남궁련, 이한원, 설경동, 최태섭, 이원천, 정재호, 유럽지역에 이정림, 김성곤, 전택보, 김영귀, 박두병, 송대순, 이양구, 양춘선, 정인욱, 김종희, 조성철, 아세아에는 박흥식, 홍재희, 김지태, 김용성, 박선기, 이봉수, 오진호, 채몽구 등이었다.


한편 협회는 또 최고회의에 외자를 받아들일 국내여건 조성을 요구했다. 그 내용은 부정축재자 처리문제 완화, 차관에 대한 한국은행의 지급보증, 내자에 최대한 융자, 공장건설에 필요한 원자재 도입허가, 외국인 자본가와 기술자 초청허락, 증권시장 육성과 관련법규 조정 등이었다. 군사정부는 이를 전폭 수용했고, 기업인들은 세계 각처로 차관이라는 그림자 잡는 여행을 떠났다.


1961년 11월 2일 제1진으로 이병철을 단장으로 송대순, 남궁련, 설경동, 최태섭, 구인회, 정재호 등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고, 8일에는 이정림을 단장으로 조성철, 이한원, 이양구, 홍재선 등 제2진이 유럽으로 떠났다.


1961년 12월. 서독 라인강 강물 위에 난데없는 한국의 주요 기업인들을 태운 배 한 척이 떴다. 소위 투자상담선.


“짧은 시간에 욕심만큼 서독의 기업인들을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상담선(相談船)을 띄운 것이다.


라인강을 3시간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과거 히틀러의 별장이 있다는데 거기까지 배를 타고 올라가면서 런치파티를 열어 술도 마시고 식사도 하면서 상담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큰 기업의 사장 20여명을 초대했다. 상담은 성공이었다. 당시에 다져진 친선을 바탕으로 서독의 기업인들은 한국경제의 발전에큰 도움을 주었다.”


유럽지역 투자사절단장 이정림의 회고다.
이 같은 기발한 아이디어의 결과 우리 경제인 일행은 서독 재계인사들의 호의적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 기업들의 실력이 금융기법에 있어 워낙 유치한 상태여서 호의에서 그치고 실제 진전은 보지 못했다.


제철과 시멘트 공장건설에 필요한 차관문제 협의는 아무런 결론을 얻지 못했다. 그때나 이때나 외교(外交)에 능숙하고 준비된 전문가를 내세우지 못하는 정권상층부의 무지함은 여전하다 하겠다.



[프로필] 이 국 영
•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 전) 한은 은행감독원 은행검사역

• 전) 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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