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진민경 기자) 신탁 경쟁은 은행권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증권, 보험, 부동산신탁사도 각자 강점을 가진 자산을 중심으로 신탁 활용 범위를 넓히고 있다. 증권사는 퇴직연금과 투자자산, 보험사는 사망보험금, 부동산신탁사는 실물자산 관리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다.
신탁시장이 커진 만큼 경쟁의 성격도 달라졌다. 과거 신탁이 은행의 금전신탁 상품이나 부동산 관리·개발 수단으로 인식됐다면, 이제는 고객의 자산 종류와 생애주기에 따라 업권별 역할이 갈라지는 모습이다. 신탁이라는 틀은 같지만 은행, 증권, 보험, 부동산신탁사가 겨냥하는 자산과 고객층은 서로 다르다.
먼저 증권사는 상속 집행보다 자산 운용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고객이 보유한 현금과 금융투자상품, 퇴직연금 자산을 어떻게 굴릴지가 핵심이다. 은행이 예금과 대출 거래 고객을 기반으로 상속 관련 상담을 늘리고 있다면, 증권사는 자산 운용과 연금 포트폴리오 관리에서 신탁과의 접점을 찾고 있다.
이 때문에 증권업권의 신탁 수요는 은행권의 유언대용신탁과는 다른 흐름을 보인다. 상속 집행 자체보다 채권, 상장지수펀드(ETF), 특정금전신탁, 법인자금 운용 등 투자자산을 신탁 구조에 담으려는 수요가 상대적으로 두드러진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조세금융신문>과의 통화에서 “증권사의 경우 은행처럼 유언대용신탁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면서도 “법인 고객을 중심으로 특정금전신탁에 채권형 상품을 담거나 운용 목적에 따라 ETF 등을 활용하려는 수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증권사는 직접매매가 가능한 투자 자산 범위가 넓기 때문에 은행처럼 신탁 수탁고가 쌓이는 구조와는 다르다”며 “신탁업무 범주 안에서 채권형 상품이나 법인 자금 운용 수요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탁을 유언대용신탁이나 특정 운용 상품으로만 좁혀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나왔다. 또 다른 증권업계 관계자는 <조세금융신문> 취재진에 “신탁은 상품이라기보다 오래된 비히클(vehicle)”이라며 “그 안에 어떤 자산을 넣느냐에 따라 금융상품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자산을 담는 구조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고령화가 진행될수록 자산을 단순히 보유하거나 이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떤 구조로 관리하고 승계할 것인지에 대한 수요는 커질 수밖에 없다”며 “증권사 신탁도 주식, 채권, 펀드, ETF 등 금융투자자산을 고객의 승계 계획 안에서 어떻게 담고 운용할지 설계하는 방향으로 역할이 커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보험업권은 금융투자자산이 아닌 사망보험금을 신탁 구조에 넣는 방식으로 시장 내 역할을 넓히는 중이다. 보험사의 신탁 수탁고는 지난해 말 기준 31조원으로 전체 신탁 수탁고의 2.0% 수준에 머물렀다. 다만 보험금청구권 신탁이 허용되면서 사망보험금을 신탁으로 관리하는 방식의 시장이 열리고 있다.
앞서 금융위원회는 2024년 11월 자본시장법 시행령과 금융투자업규정 개정을 통해 보험금청구권 신탁을 허용했다. 보험계약자가 보험금청구권을 신탁회사에 맡기면, 계약자 사망 이후 신탁회사가 보험금을 받아 미리 정한 방식대로 수익자에게 지급하는 방식이다.
보험사 입장에서는 기존 사망보험금 지급 기능을 신탁으로 확장하는 구조다. 종신보험의 사망보험금은 그간 유족에게 일시금으로 지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보험금청구권 신탁은 이 돈을 자녀의 학자금, 배우자의 생활비, 상속세 재원 등 목적에 따라 나눠 지급할 수 있도록 설계한다. 보험사가 보장 기능에 머물지 않고, 사후 자금 집행과 유족 재산관리 영역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보험금청구권 신탁은 아직 초기 시장이나, 주요 보험사를 중심으로 계약이 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삼성생명에 따르면 2025년 5월 기준 보험금청구권 신탁 누적 계약이 600건, 누적 금액 2300억원을 넘어섰다. 한화생명도 지난해 9월 보험금청구권 신탁을 출시하며 시장에 합류했다.
부동산신탁사도 신탁 경쟁에서 빼놓기 어려운 축이다. 금융감독원이 지난 4월 발표한 ‘2025년 신탁업 영업실적’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전업 부동산신탁사 14곳의 수탁고는 457조5000억원으로, 은행권 696조원에 이어 업권 내 두 번째로 컸다. 은행·증권·보험이 금전과 금융투자상품, 보험금청구권을 중심으로 신탁을 넓히고 있다면, 부동산신탁사는 토지와 건물, 개발사업, 담보관리 등 실물자산을 다룬다는 점에서 역할이 다르다.
부동산신탁 수요는 한국 가계 자산의 상당 부분이 주택, 토지, 상가 등 실물자산에 묶여 있다는 점과 연결된다. 부동산은 예금처럼 쉽게 쪼개거나 바로 현금화하기 어렵고, 처분 여부와 관리 주체, 담보 설정, 개발 가능성 등을 함께 따져야 한다. 고령층 보유 부동산의 관리와 사후 처분뿐 아니라 실물자산의 효율적 관리 수요가 부동산신탁의 역할을 확장시키는 배경이다.
국가데이터처의 ‘2025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3월 말 기준 가구 평균 자산은 5억6678만원이고, 이 중 금융자산은 1억3690만원, 실물자산은 4억2988만원으로 나타났다. 한국 가계 자산에서 부동산 등 실물자산 비중이 큰 만큼 상속·증여·처분·관리 과정에서 부동산신탁의 역할이 커질 여지가 있다.
결국 비은행권 신탁 경쟁은 각 업권이 보유한 자산 기반을 따라 전개되고 있다. 증권사는 ETF와 퇴직연금, 채권 등 투자자산을, 보험사는 사망보험금과 유족 보호 기능을, 부동산신탁사는 토지와 건물, 개발사업 등 실물자산을 신탁 구조와 연결하고 있다.
금융권의 신탁 경쟁은 이미 은행 영업점 밖으로 확산되고 있다. 고령화에 따른 자산승계 수요가 커질수록 고객은 예금, 펀드, 보험금, 부동산을 따로 떼어 관리하기보다 하나의 계획 안에서 묶어 관리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금융권의 신탁 경쟁은 이제 은행권 경쟁을 넘어, 고객 자산을 누가 더 정교하게 관리하고 집행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옮겨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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