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진민경 기자) 신탁시장이 자산 운용과 상속 설계, 보험금 관리, 부동산 처분·관리 영역으로 넓어지고 있다. 상품은 다양해졌지만 소비자가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원금손실 가능성, 보수 체계, 유류분 분쟁, 사후 집행 절차처럼 계약 전 확인해야 할 정보가 많은데, 이를 비교하고 이해할 수 있는 공시·설명 체계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탁은 다른 금융상품과 다르다. 고객이 생전에는 노후자금과 돌봄 비용을 관리하고, 사후에는 재산이 정해진 방식대로 이전되도록 설계하는 장기 계약이다. 수익률과 수수료만 비교해 선택하기 어렵고, 가족관계와 상속분쟁, 세금, 부동산 처분, 인지능력 저하 가능성까지 함께 얽힌다. 신탁업 확대가 소비자 보호 체계와 함께 논의돼야 하는 이유다.
고령화는 신탁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키우는 핵심 배경으로 꼽힌다. 국가데이터처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중은 2025년 20.3%에서 2036년 30.9%로 높아지고, 2050년 40%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이미 인구 5명 중 1명 이상이 고령층인 사회에 들어서면서 은퇴 이후 자산관리와 사후 재산 이전을 함께 설계하려는 수요도 커질 수밖에 없다.
고령층 자산관리가 금융권의 과제로 떠오르면서 금융당국도 관련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12월 19일 대통령 업무보고 중 이른바 ‘치매머니’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치매가정의 경제적 부담을 덜 수 있도록 보험상품·신탁 활성화를 추진하겠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다만 신탁 활성화가 곧바로 소비자 편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고령층 자산관리와 상속 설계를 다루는 신탁일수록 계약 구조와 집행 절차가 복잡해진다. 금융회사가 어떤 재산을 맡아 어떻게 관리하고, 고객의 사망이나 인지능력 저하 이후 어떤 기준으로 자산을 지급·이전할지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면 사후 분쟁이나 책임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배정식 법무법인 화우 수석전문위원은 <조세금융신문>과의 통화에서 “금융권은 신탁을 통해 자산관리와 패밀리오피스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고 설명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결국 내 재산을 금융회사에 맡겨도 되는지에 대한 불안이 남을 수밖에 없다”며 “신탁이 제도로 안착하려면 상품을 늘리는 것보다 소비자가 어떤 재산을 누구에게 맡기고, 어떤 기준으로 관리·집행되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장치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치매·노후자금 관리 목적의 신탁에 대해서도 “치매가 이미 진행됐거나 돌봄 비용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신탁의 필요성이 분명하지만, 정작 정신이 맑을 때 미리 준비하도록 유도하는 연결장치는 부족하다”며 “노후자금 일부를 신탁으로 묶어 생활비나 의료비로 쓰도록 하려면 세제 혜택이나 제도적 유인책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유언대용신탁은 상속 분쟁을 모두 막아주는 상품이 아니다. 고객이 생전에 수익자와 지급 방식을 정해둘 수 있지만, 법정 상속인의 권리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민법상 유류분 권리가 보장되는 만큼 유류분 침해나 반환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맡긴 자산의 운용 방식에 따라 원금손실 가능성도 남는다. 소비자가 신탁을 단순히 ‘유언장을 대신하는 상품’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이에 대해 배 전문위원은 “신탁을 했다고 해서 유류분 문제가 자동으로 회피되는 것은 아니다”며 “유언대용신탁 재산이 유류분 산정에서 어떻게 다뤄질지는 여전히 분쟁 소지가 있고, 신탁재산이 기초재산에서 제외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나아가 그는 사후 집행 과정에서 상속세와 공통비용 처리 절차를 미리 설계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봤다. 배 전문위원은 “유언대용신탁은 수탁자가 정해진 수익자에게 재산을 귀속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상속세나 장례비용 등 공통비용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함께 설계돼야 갈등을 줄일 수 있다”며 “소비자 입장에서는 계약 체결 전 사후 집행 절차와 비용 처리 방식까지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치매 관련 신탁의 경우 고객의 판단 능력이 떨어진 뒤 생활비와 의료비, 돌봄 비용을 지급하는 구조라면 계약 당시 정한 지급 기준이 매우 중요하다. 언제부터 지급을 시작할지, 누가 고객의 상태 변화를 확인할지, 남은 재산은 사후에 어떻게 이전할지까지 사전에 정리돼야 한다. 이 기준이 모호하면 금융회사와 가족, 수익자 사이에 해석 차이가 생길 수 있다.
보험금청구권 신탁은 사망보험금을 한 번에 지급하지 않고 수익자의 상황에 맞춰 나눠 지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족 생활자금 관리 수단으로 거론된다. 그러나 이 역시 지급 기간, 지급 조건, 수익자 변경 가능성, 신탁 보수, 중도 해지 여부 등을 소비자가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공시 체계도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다. 전체 신탁 수탁고나 신탁보수 규모는 통계로 확인할 수 있지만, 소비자가 실제로 궁금해하는 것은 자신이 가입하려는 상품의 조건이다. 소비자는 어떤 자산을 맡길 수 있는지, 보수는 일회성인지 정기적으로 부과되는지, 운용 손실은 누가 부담하는지, 사망 이후 집행에는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유류분 분쟁이 발생하면 금융회사가 어디까지 관여하는지 등을 계약 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소비자 보호 논의는 상품 설명이나 공시 체계 정교화에서 그치지 않는다. 신탁이 고령자와 장애인 등 보호가 필요한 사람의 자산을 장기간 관리하는 장치로 쓰일 수 있는 만큼 공공적 활용 범위를 넓히는 논의도 필요하다.
해외에서는 신탁을 취약계층 보호 장치로 활용하는 사례가 있다. 배 전문위원은 “싱가포르의 스페셜 니즈 트러스트(Special Needs Trust), 호주의 스페셜 디스어빌리티 트러스트(Special Disability Trust)는 장애인 등 돌봄 수요가 있는 사람의 생활비와 주거·돌봄 비용을 장기간 관리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런 신탁은 가족이 남긴 재산을 단순히 이전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수익자의 생애 전반에 걸쳐 안정적으로 쓰이도록 관리하는 데 의미가 있다”며 “국내에서도 신탁이 고액자산가의 상속 설계에 머물지 않으려면 취약계층 보호나 노후 돌봄과 연결되는 공공적 활용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신탁은 금융회사에는 새로운 수익원이지만, 소비자에게는 노후 자산관리와 사후 재산 이전을 맡기는 장기 계약이다. 고령화와 가족구조 변화로 신탁의 쓰임은 더 넓어질 수 있지만, 시장 확대가 곧 소비자 신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금융권 신탁 대전의 승부처는 결국 수탁고 경쟁이 아니라, 소비자가 안심하고 재산을 맡길 수 있는 관리 체계를 누가 먼저 갖추느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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