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진민경 기자) 농협중앙회가 중앙회장 조합원 직선제 도입 등 농협 개혁안에 대한 공식 입장 발표를 준비했다가 막판에 보류했다.
정부와 여당이 지배구조 개편에 속도를 내는 가운데 농협도 개혁 수용 쪽으로 방향을 틀려고 했으나, 내부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데다 강호동 농협중앙회장을 둘러싼 사법 리스크까지 부담 요인으로 거론되면서 발표 직전 제동이 걸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20일 농협중앙회와 금융업계에 따르면 농협중앙회는 이날 서울 중구 본관에서 농협법 개정 대응 비상대책위원회를 연 뒤 강 회장 명의의 입장문을 발표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입장문에는 중앙회장 조합원 직선제 도입, 내부 감사 독립성 강화, 범농협 준법감시위원회 설치 등 농협 개혁 관련 내용이 담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비대위 논의 과정에서 발표 시점과 내용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면서 입장문 배포는 보류됐다. 농협중앙회는 입장문 배포 보류와 관련해 추가 의견 수렴과 내부 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다만 농협 내부에서는 이를 단순한 일정 조정으로 보기 어렵다는 시각이 나온다. 그동안 농협중앙회는 개혁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이해관계자 의견 수렴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들어 정부와 여당 주도의 개편 논의에 신중한 태도를 보여왔다. 특히 외부 감사기구 신설과 중앙회장 선거 방식 개편을 두고는 조합 자율성 침해와 선거 비용 부담을 이유로 반발 기류가 컸다.
이번 발표 보류는 이 같은 내부 반발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점을 드러낸 장면으로 해석된다.
◇ 대통령 발언 이후 속도 낸 개혁 논의
농협 개혁 논의는 이재명 대통령의 공개 발언 이후 급격히 속도가 붙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4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농업의 근간을 지탱하고 있는 농협의 정상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조합원 주권이라는 관점에서 지배구조를 조속히 개선하고 민주적 통제 강화 등 정상화 조치 역시 차질 없이 신속히 완수해야 한다”며 조합원 직선제 등 제도 개선에 속도를 내라고 주문했다.
현재 국회에는 농협중앙회장 선거를 조합원 직선제로 바꾸고, 범농협 통합 감사기구인 농협감사위원회를 설치하는 내용 등을 담은 농협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는 지난 12일 농협법 개정안에 대한 입법 공청회도 진행했다.
쟁점은 중앙회장 선출 방식이다. 현행 제도에서는 전국 조합장 1110명이 중앙회장 선거에 참여한다. 개혁안은 이를 전체 조합원 약 187만명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확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앙회장 대표성을 높이고 금권선거 논란을 차단하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농협 내부의 반발은 만만치 않다. 직선제가 도입될 경우 중앙회장 선거가 사실상 대규모 정치 선거처럼 변질될 수 있고, 선거 비용도 크게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농협 안팎에서는 직선제 시행에 약 400억원 안팎의 비용이 필요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실제 농협중앙회가 지난 4~8일 전국 농축협 이·감사와 대의원 약 8만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 2만7000여명 중 68%가 중앙회장 조합원 직선제에 반대했다. 농협감사위원회 신설에 반대한다는 응답은 77.3%, 중앙회의 지주·자회사 감독 권한 폐지에 반대한다는 응답은 76.8%로 집계됐다.
이 때문에 농협중앙회가 정부 기조에 맞춰 개혁 수용 메시지를 내더라도 실제 조직 내부에서 이를 밀어붙이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발표 보류는 농협이 외부 압박과 내부 저항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도 명확히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는 신호로 읽힌다.
◇ 감사기구 개편도 쟁점…자율성 논란 남아
감사기구 개편도 향후 농협 개혁 논의에서 핵심 쟁점으로 남을 전망이다. 정부와 여당은 농협 내부통제 강화를 위해 독립적인 감사기구 신설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농협 내부의 불투명한 의사결정 구조와 일부 임직원 비리 논란을 고려하면 기존 내부 감시 체계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문제의식이 토대가 됐다.
반면 농협중앙회는 내부 감사의 독립성을 높이고 범농협 준법감시위원회를 설치하는 방안을 대안으로 검토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외부 감사기구를 별도로 두기보다 내부 통제 기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개혁 요구에 대응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이 같은 방안은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는 농협감사위원회 신설과는 결이 다르다. 농협이 개혁 수용 의사를 밝히면서도 핵심 쟁점에서는 조직 자율성을 지키려는 기조를 유지할 경우, 향후 입법 과정에서도 이견 조율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문제는 농협이 자율 개혁을 주장하기에는 조직 안팎의 신뢰가 크게 흔들렸다는 점이다. 지난해부터 강 회장을 둘러싼 각종 의혹이 이어지면서 농협 개혁 논의는 제도 개편을 넘어 리더십 문제로까지 번지고 있다.
강 회장은 2023년 중앙회장 선거를 앞두고 농협 계열사 거래업체 대표로부터 금품을 받았다는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또한 경찰은 금품 전달 과정에 농협 전·현직 관계자들이 관여했는지 살펴보는 한편, 임직원 개인 형사사건 변호사비 3억2000만원을 중앙회 공금으로 지급했다는 의혹과 관련해서도 중앙회 준법지원부를 압수수색했다.
◇ 수용도 반발 부담…입법 과정서 조율 불가피
농협중앙회 입장에서 이번 개혁안은 어느 쪽으로 움직여도 부담이 크다. 정부와 여당의 개혁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하면 ‘기득권 지키기’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반대로 직선제와 외부 감사기구 신설을 전면 수용하면 조합장과 내부 조직의 반발이 커질 수 있다.
특히 강 회장의 사법 리스크가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회장 명의의 개혁 입장문을 내는 것 자체가 부담으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농협 개혁의 명분이 내부통제와 지배구조 정상화에 맞춰져 있는 만큼 수사 대상에 오른 회장이 개혁 메시지를 직접 내는 장면이 오히려 논란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날 발표 보류는 농협 개혁 논의의 현주소를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중앙회는 개혁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정부 주도의 제도 개편을 그대로 수용하는 데에는 부담을 안고 있는 모습이다. 정부는 속도를 요구하고, 조합장 조직은 신중론을 앞세우는 가운데 강 회장 관련 수사까지 이어지면서 개혁 메시지의 설득력에도 부담이 더해졌다.
농협 개혁 논의는 앞으로 입법 과정을 거치며 구체화될 전망이다. 조합원 직선제 도입 시기와 선거 관리 방식, 감사기구의 권한 범위, 중앙회와 회원조합 간 역할 조정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강 회장을 둘러싼 수사 역시 개혁 논의의 부담 요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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