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진민경 기자) 원·달러 환율이 다시 1530원대로 올라섰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수출이 역대 최대 흐름을 보이고, 경상수지 흑자 전망도 커졌지만 원화는 오히려 약세 압력을 받고 있다. 과거처럼 국내 펀더멘털만으로 환율 방향을 설명하기 어려운 장세가 이어지는 모습이다.
4일 서울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13.6원 오른 1530.0원에 거래를 시작했다. 환율이 1530원대에서 출발한 것은 금융위기 당시였던 2009년 3월 10일 이후 17년 3개월 만이다. 장중 기준으로 1530원을 넘어선 것은 지난 3월 31일 이후 두 달여 만이다.
전날 야간장에서도 원·달러 환율은 1520원을 웃돌며 야간 거래 제도 도입 이후 최고 수준을 나타냈다. 역외시장에서도 원화 약세 압력이 먼저 반영됐다. 뉴욕 차액결제선물환(NDF)시장에서 원·달러 1개월물은 장중 1536원까지 올랐다가 1533원대에서 거래를 마친 것으로 전해졌다.
환율 상승의 직접적인 방아쇠는 중동 리스크였다. 미국과 이란의 군사 충돌이 다시 불거지면서 위험자산 회피 심리가 강해졌다. 앞서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는 이란 유조선과 게슘섬 통신탑 피격에 대응해 쿠웨이트의 미 공군기지와 바레인의 미 해군 5함대 기지 등을 공격했다고 언급했다.
지정학적 불안은 곧바로 유가를 밀어올렸다. ICE선물거래소에서 8월 인도분 브렌트유 선물은 전 거래일보다 1.9% 오른 배럴당 97.81달러에 마감했다. 뉴욕상업거래소에서 7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은 2.4% 상승한 배럴당 96.02달러를 기록했다.
◇ 수출 호황에도 힘 못 쓴 원화
문제는 이 같은 대외 불안이 국내 수출 호조를 압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한국 경제의 수출 지표는 원화 강세 재료로 읽힐 만한 수준이다. 5월 수출은 877억5000만달러로 월간 기준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반도체 수출이 371억6000만달러로 전체 수출의 42%를 차지하며 흐름을 이끌었다. 한국은행도 올해 경상수지 흑자 규모가 2500억달러에 달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통상 수출 증가와 경상수지 흑자는 달러 공급 확대 요인으로 작용한다. 기업들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달러가 국내로 유입되면 원화 가치를 지지하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외환시장에서는 이 같은 공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수출 호조보다 중동 전쟁과 유가 상승, 달러 강세, 외국인 자금 흐름 등 대외 변수가 환율을 움직이는 핵심 요인으로 부각되고 있어서다.
외국인 투자자의 국내 증시 매도세도 원화 약세를 키우는 요인으로 꼽힌다. 외국인은 유가증권시장에서 지난달 7일부터 이달 2일까지 18거래일 연속 순매도 흐름을 보였다. 이 기간 순매도 규모는 약 60조원에 달한 것으로 파악된다. 국내 증시가 단기간 급등한 뒤 외국인이 차익 실현과 비중 조정에 나서면서 주식 매도 자금이 환율 수급에도 부담을 주고 있다는 분석이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원은 지난 1일 보고서에서 종전 협상 타결 여부가 유가와 달러 흐름의 핵심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협상이 빠르게 진전될 경우 유가가 70달러 중반에서 80달러 초반까지 내려갈 수 있지만, 협상 불발과 호르무즈 봉쇄 장기화가 이어질 경우 원·달러 환율이 1550~1600원까지 오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번 환율 상승은 과거 고환율 국면과 결이 다르다. 과거 고환율은 국내 금융 불안이나 외환 건전성 우려와 함께 해석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번 환율 상승은 국내 경제 지표 부진보다는 글로벌 위험 회피와 에너지 가격 불안에 더 가깝다. 수출과 경상수지는 양호하지만, 원유 수입 부담이 커지고 안전자산 선호가 강해지면서 원화가 상대적으로 밀리는 구조다.
여기에 미국의 관세 리스크도 부담으로 더해졌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한국을 포함한 일부 국가에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방침을 내놓으면서 무역 불확실성이 다시 커졌다. 전쟁 리스크와 관세 변수가 동시에 부각되면 원화는 수출 호조보다 대외 충격에 더 크게 흔들릴 수 있다.
◇ 구두개입보다 센 대외 변수
당국도 외환시장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이날 시장상황점검회의에서 “환시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과도한 쏠림에 필요시 즉시 조치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회의에는 구 부총리 외에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 이억원 금융위원장, 이찬진 금융감독원장 등 주요 경제·금융당국 수장이 참석했다. 이들은 “역대 최대 수준의 경상수지 흑자에도 불구하고, 중동 전쟁과 외국인 주식 매도 지속 등에 따라 변동성이 확대되고 있다”고 최근 외환시장 상황을 평가했다.
당국의 시장 안정 메시지는 환율 상승 속도를 늦추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다만 시장에서는 구두개입만으로 방향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는 시각도 나온다. 환율을 밀어올리는 재료가 국내 수급 하나에 그치지 않고 유가, 전쟁, 달러 강세, 외국인 매도, 관세 변수까지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결국 관건은 환율이 1530원을 넘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이 흐름이 얼마나 이어지느냐다. 수출 호조와 경상수지 흑자에도 원화가 힘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길어지면 부담은 금융시장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유가와 수입물가, 금리 경로를 거쳐 가계가 체감하는 비용으로 옮겨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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