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세금융신문=이명구 전 관세청장) 최근 주말 저녁, 식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밥솥에서 “뜸들이기가 시작되었습니다”라는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순간 처가에 갔을 때 들었던 비슷한 소리가 떠올랐다. 그때는 소리가 다소 크게 느껴져 “이거 소리를 줄이거나 끌 수 없을까요?”라고 장모님께 여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자 장모님께서는 잠시 웃으시며 “그것이라도 이야기하게 그냥 두게”라고 말씀하셨다. 그 한마디에는 단순한 기능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조용한 집 안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조차 대화처럼 느껴지는, 어쩌면 사람의 온기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긴 말이었다.
“뜸들이기”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결과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핵심적인 과정이다.
밥이 다 된 뒤 불을 끄고 잠시 기다리는 그 순간, 수분이 골고루 퍼지며 밥알 하나하나가 제 맛을 갖추게 된다. 이 짧은 시간을 생략하면 겉은 익었지만 속은 설익은 상태로 남게 된다.
눈에 띄지 않지만 반드시 필요한 시간, 바로 이 점에서 뜸들이기는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완성을 위한 준비’라고 할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만을 중시하는 시각에서는 이 과정이 비효율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품질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낸다.
옛말에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성급함을 경계하고 신중함을 강조한 표현이다. 조세심판원에 근무하던 시절, 내가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았던 것도 바로 ‘중립과 신중’이었다.
논쟁이 치열해 논의가 쉽게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결론이 장기간 지연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조급함에 휩쓸리기보다 충분한 숙의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깨닫게 되었다.
특히, 한 사람의 억울함을 바로잡는 일은 단순한 개별 사건의 해결을 넘어선다. 때로는 백 사람을 구제하는 것보다 더 큰 의미와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결국 공정한 판단은 속도가 아니라, 중립과 신중함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관세행정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통관의 속도를 국가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로 인식한다. 물류의 흐름을 지체 없이 이어주는 것은 기업의 비용을 줄이고 무역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필수적이다.
특히 글로벌 공급망이 긴밀하게 연결된 오늘날에는 단 몇 시간의 지연도 기업에는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신속 통관’은 관세행정의 중요한 목표로 자리 잡아 왔다.
그러나 속도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충분한 확인과 검증 없이 서두른 판단은 잘못된 통관으로 이어질 수 있고, 이는 곧 불법 물품의 유입이나 시장 질서의 왜곡으로 연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마약, 총기류와 같은 위험 물품이 통관 과정에서 제대로 걸러지지 않는다면 그 피해는 단순한 행정 오류를 넘어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 반대로 정상적인 기업이 오판으로 인해 불필요한 제재를 받는 경우 역시 발생할 수 있다. 이는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고, 행정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이 지점에서 요구되는 것이 바로 관세행정의 ‘뜸들이기’다. 이는 단순한 지연이나 비효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확성과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의도된 과정이다. 예를 들어 관세행정의 위험관리 체계는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우범 화물과 정상 화물을 선별한다.
과거 적발 사례, 신고 정보, 물품의 특성, 거래 흐름 등 다양한 요소가 종합적으로 분석된다. 겉으로는 잠시 멈춘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 순간에도 정교한 판단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마치 밥이 뜸을 들이며 속까지 완전히 익어가는 과정과도 닮아 있다.
특히 최근과 같이 무역 환경이 복잡해지고, 가상자산을 활용한 거래나 우회 수출입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불법이 증가하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의도된 기다림’의 중요성이 더욱 커진다.
거래의 형태가 다변화되면서 단순한 서류 확인만으로는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자금의 흐름과 물품의 이동 경로를 함께 분석하고, 여러 데이터를 교차 검증해야만 실제 위험을 정확히 식별할 수 있다.
이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일정한 시간이 요구된다. 성급한 판단은 오히려 단속의 사각지대를 만들고, 결과적으로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물론 뜸들이기가 과도한 지연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불필요한 절차나 관행적인 지체는 기업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국가 물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기다리느냐’가 아니라 ‘어디에서, 왜 기다리느냐’이다. 위험이 낮은 영역에서는 절차를 과감히 간소화하고 신속한 처리를 보장해야 한다. 반면 위험이 집중된 영역에서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면밀히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선택과 집중은 단순한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 판단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과 데이터 분석 기술을 활용한 위험관리 고도화가 이러한 균형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위험도를 사전에 예측하고, 선별된 대상에 대해서만 정밀한 검증을 수행함으로써 전체적인 통관 속도는 유지하면서도 정확성을 높일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속도 경쟁을 넘어, ‘정확한 속도’를 구현하는 방향으로 관세행정이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관세행정에서의 뜸들이기는 시간을 끄는 기술이 아니라 결과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전략적 판단이다. 빠른 통관이 경제의 활력을 유지하는 동력이라면, 신중한 검증은 그 기반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이 두 요소가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무역은 속도와 신뢰를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 번 더 확인하고,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만큼만 기다리는 것. 이 절제된 판단이 축적될 때 관세행정은 단순한 절차를 넘어 국민의 안전과 시장의 공정성을 지키는 든든한 기반이 된다. 결국 뜸들이기는 멈춤이 아니라, 더 나은 결과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가장 적극적이고 책임 있는 선택이다.
[프로필] ▲1969년생 ▲경남 밀양고 ▲서울대 경영학과 ▲서울대 행정학 석사 ▲영국 버밍엄대 경제학 박사 ▲행시 36회 ▲관세청 서울세관장 ▲부산 세관장 ▲국무조정실 조세심판원 상임심판관 ▲관세청 차장 ▲제34대 관세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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