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세금융신문=이명구 전 관세청장) 최근 언론인 연구모임인 'MAGA & 中国梦 연구회'에 초청받아 ‘관세와 경제안보–생존을 위한 새로운 국경전쟁’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강연을 준비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관세가 더 이상 단순히 세금을 걷는 행정수단이 아니라 국가의 산업과 외교, 안보를 움직이는 전략수단으로 변했다는 사실이었다.
과거에는 관세를 얼마나 낮추느냐가 국가 경쟁력의 척도였다면, 오늘날에는 관세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국가의 생존전략이 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자유무역 질서를 중심으로 성장해 왔다. GATT 체제와 WTO 출범은 국가 간 무역장벽을 낮추고 글로벌 공급망을 확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기업들은 가장 생산비가 저렴한 국가를 선택해 공장을 세웠고, 소비자는 값싼 제품을 구매하면서 세계경제는 높은 효율성을 추구했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과 미·중 전략경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러한 공급망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반도체 하나가 부족해 자동차 공장이 멈추고, 특정 국가의 희토류 수출 제한이 세계 제조업 전체를 흔드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경제안보(Economic Security)는 국가정책의 핵심 가치로 자리 잡았다. 경제안보란 단순히 경제성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핵심 산업과 공급망을 외부 충격으로부터 보호하고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을 뜻한다.
미국은 반도체와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통해 첨단산업 공급망을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고 있으며, 일본은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을 제정해 전략물자와 핵심기술을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유럽연합(EU)도 공급망 회복력과 핵심원자재 확보를 국가 전략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제 경제는 더 이상 시장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안보의 영역으로 편입되고 있다.
최근 중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 CXMT의 급성장과 중국 기업들의 반도체 장비 국산화는 미국의 대중 수출통제가 오히려 중국의 기술 자립을 촉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은 첨단 반도체와 장비 수출을 제한함으로써 중국의 기술 발전을 늦추려 했지만, 중국은 막대한 국가 지원을 바탕으로 자체 기술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기술을 차단하려는 정책이 오히려 상대국의 기술 독립을 앞당기는 국제정치의 역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경제안보 정책은 단기적인 효과뿐 아니라 장기적인 기술 경쟁력까지 고려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의 관세정책도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강제노동으로 생산된 물품은 미국 관세법 제307조와 위구르 강제노동방지법(UFLPA)에 따라 수입이 금지된다.
최근에는 강제노동 대응이 미흡한 국가의 정책을 무역법 제301조 조사 대상으로 삼아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정책이 확대되고 있다. 또한 오랫동안 사실상 활용되지 않던 관세법 제338조까지 다시 거론되면서 캐나다를 대상으로 한 고율 관세 논의가 이루어지는 등 관세는 단순한 세금이 아니라 외교와 인권, 환경, 안보를 실현하는 전략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관세는 이제 협상 카드이자 압박 수단이며 국제질서를 재편하는 정책도구가 되었다.
펜타닐 문제는 관세가 국가안보 수단으로 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미국은 펜타닐 원료가 중국을 거쳐 멕시코 카르텔을 통해 미국으로 유입되는 구조를 국가안보 차원의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에 따라 단순한 마약 단속을 넘어 관세와 무역정책, 외교적 압박을 동시에 활용하여 공급망 자체를 차단하려 하고 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통상정책까지 동원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기술패권 경쟁은 이제 지식재산권과 데이터 경쟁으로 확대되고 있다. 과거에는 위조상품과 불법복제가 주요 문제였다면, 오늘날에는 생성형 AI의 학습데이터와 저작권이 새로운 국제통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AI는 방대한 논문과 기사, 음악과 그림, 영상과 프로그램을 학습하여 새로운 결과물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학습데이터의 이용 범위와 저작권 보호 수준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는 앞으로 디지털 통상질서를 좌우할 핵심 쟁점이 될 것이다.
데이터와 알고리즘은 석유에 버금가는 전략자산이 되었으며, 데이터센터는 새로운 산업기지가 아니라 국가안보시설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희토류는 또 다른 경제안보의 축이다. 반도체와 전기차, 드론, 풍력발전기, 인공지능 서버, 첨단 미사일에는 희토류가 필수적으로 사용된다.
중국은 희토류 채굴뿐 아니라 정제능력에서도 압도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으며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미국이 첨단 반도체를 무기로 활용한다면 중국은 희토류 공급망을 전략적 카드로 사용할 수 있다. 첨단기술 시대에는 총과 미사일만이 무기가 아니라 광물과 부품, 소프트웨어와 데이터도 국가전략자산이 된다.
경제안보의 전장은 금융으로도 확대되고 있다. 중국은 디지털 위안화를 통해 국제결제에서 달러 의존도를 낮추려 하고 있으며, 미국은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으로 편입하여 달러 패권을 유지하려 하고 있다.
앞으로는 무엇을 수출하는가뿐 아니라 어떤 결제망을 이용하는지, 어떤 디지털 통화를 사용하는지가 국가경쟁력을 좌우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에서는 현행 외국환거래법 체계상 가상자산은 무역대금의 공식적인 결제수단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스테이블코인을 비롯한 가상자산은 국경을 초월한 신속성과 익명성 때문에 무역대금을 비공식적으로 정산하거나 해외로 자금을 이전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
특히 가격 변동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스테이블코인은 국제무역에서 활용 유인이 더욱 커질 수 있다. 앞으로 관세청과 외환당국은 블록체인 분석기술과 국제공조를 강화하여 가상자산을 이용한 불법 외환거래와 무역기반 자금세탁(TBML)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감시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관세행정의 역할도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세관은 더 이상 관세만 징수하는 기관이 아니다. 전략물자 유출 차단, 우회수출 단속, 원산지 세탁 적발, 지식재산권 보호, 마약과 불법 외환거래 차단, 공급망 보호까지 국가 경제안보를 책임지는 최전선 기관으로 변화하고 있다.
AI를 활용한 위험관리와 빅데이터 분석, 국제 정보공유는 앞으로 관세행정의 핵심 역량이 될 것이다.
몇 해 전 선물받은 MAGA 모자 안쪽에 'Made in China'가 적혀 있었던 기억은 오늘날 세계 공급망의 역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치적 구호는 미국을 외쳤지만 생산은 중국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세계경제가 얼마나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물론 공식 MAGA 모자는 미국에서 생산된다. 이 일화는 글로벌 공급망이 단순한 정치 구호만으로 바뀌지 않는 현실을 생각하게 한다.
결국 오늘날의 국경은 지도 위의 선이 아니다. 반도체 공장도 국경이고 AI 데이터센터도 국경이며 희토류 광산도 국경이다. 디지털 결제망과 블록체인, 클라우드 서버와 해저케이블까지 모두 새로운 경제국경이 되고 있다.
경제안보 시대의 관세는 통관과 세수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과 기술, 금융과 외교를 지키는 국가 생존전략이다. 새로운 경제국경을 어떻게 설계하고 지켜낼 것인가는 대한민국의 미래 경쟁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1969년생 ▲경남 밀양고 ▲서울대 경영학과 ▲서울대 행정학 석사 ▲영국 버밍엄대 경제학 박사 ▲행시 36회 ▲관세청 서울세관장 ▲부산 세관장 ▲국무조정실 조세심판원 상임심판관 ▲관세청 차장 ▲제34대 관세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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