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의 사정, 늙은 시인에게 / 박제영
저마다
피는 사정이 다른 줄 왜 모를까
색이 다르고
키가 다르고
크기가 다른 데는
꽃들의 사정이 다 다르기 때문일 테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잠자는 애인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이 땅끝까지 당신은 왜 왔나
당신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아니야 아니야 잠꼬대하는 애인은
땅끝보다 더 먼 끝을 원하는데
애인은 언제나 세상에 없는 문장만을 원하는데
당신은 이제 고백해야 하지 않나
당신의 문장은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라고
당신은 이제 외통수에 몰렸는데
여명은 밝아오고 젊디젊은 애인은
이제 곧 깨어날 텐데
―박제영 시집, 『아흔아홉 개의 달과 아흔아홉 번의 겨울』
[詩 감상] 양현근 시인
바닥을 드러낸 문장 앞에서
꽃들은 저마다 다른 시간에 핀다. 박제영의 시는 그 당연한 사실에서 출발하지만, 그 말은 꽃 이야기가 아니다. 늙어가는 시인의 이야기다. 새벽, 젊은 애인이 잠든 곁에서 시인은 그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묻는다. 나는 왜 여기까지 왔는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애인은 잠꼬대로 세상에 없는 문장을 원한다. 늙은 시인에게 이보다 잔인한 요구가 있을까. 그는 이미 안다. 자신의 문장이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라는 것을.
그런데도 여명은 밝아오고 애인은 곧 깨어날 것이다. 시인은 그 깨어남 앞에서 고백해야 한다. 말이 다 떨어졌다고. 그 고백이 두렵고도 아름다운 것은, 그것마저도 하나의 문장이기 때문이다. 바닥이라 생각한 곳에서 길어 올린 마지막 한 줄, 박제영의 시는 그 자리를 조용히, 그러나 또렷하게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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