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발 밑에 수십만 전 화산이 숨쉬고, 들판에 미륵의 꿈이 깃든 철길로 금강산 갔던 땅"
북한의 평강고원 부근에서 발원해 남쪽의 연천과 임진강으로 이어지는 지형은 신생대 제4기 화산 활동이 빚어낸 독특한 자연사 박물관이자 생태계의 보고이다. 이 지역은 북쪽의 화산 원시 지형부터 남쪽의 침식 분지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연속성을 지닌다. 철원의 이러한 독특한 지형과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후삼국 시대 미륵을 자처했던 궁예는 철원의 넓은 들녘에 왕궁을 세우고 미륵하생의 이상국을 꿈꿨다.
철원의 독특한 지형과 생태환경
신생대 말기에 평강에서 남서쪽으로 3km에 위치한 오리산(454m)을 중심으로 구조선을 따라 용암이 분출되어 철원·평강 용암대지를 형성하였으며, 이 용암은 열곡(裂谷)을 따라 북쪽으로는 남대천을 따라 북한의 강원도 고산군 북부 일대까지, 남쪽으로는 한탄강과 임진강을 따라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일대까지 흘러내렸다.
평강고원과 오리산 등지에서 분출된 유동성이 매우 높은 현무암질 용암은 추가령 구조곡의 기존 하천 골짜기를 따라 남쪽으로 거대하게 흘러내려 평탄한 용암대지를 형성했다. 평강 일대의 고원에서 시작된 대지는 철원과 김화를 거쳐 연천 및 포천 일대까지 이어지며 완만한 경사를 이룬다.
이 대지 위로 오랜 세월 동안 한탄강 등의 하천이 흐르면서 단단한 현무암층을 수직으로 깊게 파고들어, 평야 지표면 아래 수십 미터 깊이에 웅장한 주상절리와 협곡을 만들었다. 이 지역의 대부분 하천이 평야 아래로 흐르기 때문에 저수지가 없는 지역의 경우 하천의 물을 끌어 올리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다.
평강고원의 남단이자 김화·철원·갈말을 아우르는 이 광활한 용암대지(철원평야 일대)의 전체 면적은 약 650제곱킬로미터에 달한다. 이는 중부지방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최대 규모의 용암대지이며, 강원도 내 산악 지형 중에서 단일 규모로 가장 넓은 곡창지대를 형성한다.
다공질 현무암 지대 특유의 스며드는 물길과 얼지 않는 용천수(샘통)는 겨울철에도 마르지 않는 습지를 제공하여, 천연기념물인 두루미와 재두루미를 비롯한 수많은 철새들에게 최적의 월동지를 제공한다. 또한 깊은 주상절리 협곡과 깨끗한 수계는 다양한 야생 동식물의 은신처가 되며, 화산 지형·하천 생태계·비무장지대의 평화 생태가 결합된 세계적인 생태·지질 관광의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다.
궁예와 태봉국의 도읍, 철원
궁예는 국호를 고려(고구려·901), 마진(904), 태봉(911) 등으로 계속 바꾸었다. 궁예는 896년(진성여왕 10)에 처음으로 철원을 도읍지로 삼았고, 2년 뒤인 898년에는 송악(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로부터 7년 후인 905년에 다시 철원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도성은 궁성, 내성, 외성으로 구획돼 있다. 내성 북벽과 외성 북벽이 공유하고 있는 상태지만 궁성을 중심으로 '회(回)'자형의 3중 성곽이다. 일제강점기 지적도에 따르면 도성의 외곽성은 12.5㎞, 내곽성은 7.7㎞로, 발해 상경성(16.3㎞), 한양도성(18.6㎞)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신라의 법상종은 교종이면서도 미륵하생의 이상 사회 건설을 중시하였다. 전주 금산사는 진표가 미륵장륙상을 주불로 중창하여 미륵신앙의 중심이 되었고, 백성들은 억압과 고통이 없는 미륵하생의 용화세계를 염원했다.
진표의 제자인 영심은 속리산에 길상사를 세웠고, 이 사찰이 최대의 미륵사찰인 법주사로 발전하였다. 궁예는 철원도성을 완공하기 1년 전 '청주인호 1천'을 철원으로 이주시켰다. 『삼국사기』 열전 궁예전에는 "청주의 인호 1천 호를 철원성으로 옮겨 서울을 삼고, 상주 등 30여 주현을 공취하니, 공주장군 홍기가 와서 항복하였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전국 여러 지역 중에서 왜 하필 '청주인호 1천'을 징발, 사역시켰을까? 궁예는 미륵신앙의 중심지인 청주를 태봉의 세력 기반으로 만들면서 스스로 '미륵'이라 했다. 그는 국호를 태봉으로 바꾼 집권 후반기에 미륵신앙에 기반을 둔 신정적 전제주의 정치를 추구하였다.
《삼국사기》에 궁예는 미륵불을 자처하였고, 스스로 경전 20여 권을 짓고 강설했다. 미륵신앙이 활발했던 청주 용화사에는 5구의 불상과 2구의 보살상이 최고 5.5m, 최저 1.4m의 거대한 모습으로 남아 있으며, 이 불상들은 얼굴과 옷주름 표현, 손모양 등에서 고려시대 초기로 추정된다.
근현대사의 아픔, 철의 삼각지대와 철도 역사
일제강점기에 철원은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과 금강산으로 향하는 금강산 전기철도가 만나는 요충지이자, 연간 15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몰리던 번화한 '더블 역세권' 도시였다. 서울 용산에서 경원선을 타고 와서 금강산 전철로 갈아타는 출발점이었다.
철원에서 시작되는 금강산 전기철도는 내금강까지 116.6km를 연결한 최초의 관광용 전철이었다. 시속 30km로 약 4시간 반이 걸렸으며, 비싼 요금에도 많은 이들이 찾았다. 이 도로는 관광 목적뿐만 아니라 창도 지역의 지하자원을 반출하는 경제적 통로로도 쓰였다. 6·25 전쟁으로 철원 시가지가 파괴되고 분단되면서 현재는 현무암 교각 등 쓸쓸한 철도 잔해만 남아 있다.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6·25 전쟁의 가장 치열한 전투 현장인 '철의 삼각지대'는 평강 오리산(453m)에서 10여 차례 분출한 용암이 흘러나와 평강(330m)과 철원·김화(220m)에 2억 평이 넘는 드넓은 평원이다.
그 평원을 둘러싸고 있는 오성산(1062m)·고암산(780m)과 백마고지·피의 500능선·낙타고지 등은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혈투가 이루어졌다. '철의 삼각지대'는 남(철원·김화)과 북(평강)이 대략 반가량씩 나누면서 휴전이 이루어졌다.

철원은 신생대 제4기 현무암 용암 분출로 형성되어 지상에는 광활한 철원평야와 지하에는 깊은 협곡이 공존하는 독특한 이중적 지형을 품고 있으며, 비옥한 토양과 군사적 요충지이다. 이러한 천혜의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후삼국 시대 궁예는 철원에 거대한 3중 도성을 세우고 미륵신앙에 기반한 태봉국을 건설했다.
이후 근현대 이르러서는 경원선과 금강산 전기철도가 교차하는 번화한 교통의 요충지이자 관광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으나, 6·25 전쟁을 겪으며 철의 삼각지대라 불리는 치열한 격전지와 함께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게 되었다. 이 지역은 화산 지형의 지질학적 가치와 비무장지대(DMZ)의 원시 생태계로 평화와 생태관광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전)동부증권 자산관리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전)(주)선우 결혼문화연구소장
•덕수상고, 경희대 경영학사 및 석사, 고려대 통계학석사,
리버풀대 MBA, 경희대 의과학박사수료, 서강대 경영과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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