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김지연 객원기자) ‘왜 지나간 것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아름답게 느껴질까’
어린 시절의 한 장면, 오래된 사진 한 장,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의 목소리가 그렇습니다. 그때는 미처 소중하게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시간이 흐른 뒤에는 이상하리만큼 마음을 흔듭니다.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들으면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죽은 왕녀를 위한 춤곡’이라는 제목은 조금 낯설고도 슬프게 들립니다. 하지만 이 곡은 장례를 위한 음악이 아닙니다. 라벨은 실제 왕녀를 떠올린 것이 아니라, 오래전 스페인 궁정에서 천천히 파반느를 추었을 법한 왕녀의 모습을 상상하며 이 곡을 썼습니다. 라벨 자신도 이 제목에 지나치게 극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춤곡, 파반느
1899년 피아노곡으로 작곡된 이 작품은 1902년 파리에서 초연되었으며, 훗날 라벨 자신에 의해 관현악곡으로 편곡되었습니다.
파반느는 르네상스 시대 유럽 궁정에서 추던 느린 춤입니다. 화려한 움직임보다는 절제되고 우아한 분위기가 특징입니다. 라벨은 이 오래된 춤의 형식을 빌려, 이미 지나가 버린 시대의 아름다움을 음악으로 불러냈습니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특별한 사건보다 ‘기억’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릅니다.
길게 이어지는 선율과 부드러운 화음은 마치 오래된 그림 한 장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특히 관현악으로 들으면 목관과 호른, 현악기의 음색이 서서히 겹쳐지며 아련한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그 안에는 슬픔이 있지만 절망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미 지나간 것을 조용히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을 기억하는 듯합니다.
우리의 기억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모든 순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떤 음악을 들으면 잊고 있던 감정이 갑자기 되살아납니다. 음악은 사건보다 그때의 감정을 기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음악도 나이가 들수록 다르게 들립니다.
젊었을 때는 그저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선율이 어느 날에는 그리움으로 다가오고, 예전에는 쓸쓸하게 느껴졌던 음악이 어느 순간에는 따뜻한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음악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음악을 듣는 내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젊었을 때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무엇을 이루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조금씩 시선이 달라집니다.
새로운 것만큼이나 지나간 것들이 소중해집니다. 한때는 당연했던 만남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알게 되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도 깨닫게 됩니다.
라벨이 그려낸 ‘죽은 왕녀’도 어쩌면 그런 존재인지 모릅니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왕녀이지만, 라벨의 음악 속에서는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사라진 사람과 시간도 기억과 음악 속에서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억으로 남고, 어떤 시간은 사진으로 남으며, 어떤 순간은 음악으로 남습니다.
가을이 시작되는 이 계절,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천천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무언가를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잊고 있던 것들을 잠시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어쩌면 음악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시간을 되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시간을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에사페카 살로넨이 지휘한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영상
[프로필] 김지연
•(현)수도국제대학원외래교수
•(현)한국음악교육협회 고양시 지사장
•(현)레위음악학원장
•(현)조세금융신문 객원기자
•저서<팬플루트로 만나는 클래식>, <클래식과 차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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