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알고 있다_신석정
산은 어찌 보면 운무와 더불어 항상 저 아득한
하늘을 연모하는 것 같지만 오래 오래 겪어온
피 묻은 역사의 그 생생한 기록을 잘 알고 있다.
산은 알고 있다. 하늘과 땅이 처음 열리고
그 기나긴 세월에 묻어간 모든 서럽고 빛나는
이야기를 너그러운 가슴에서 철철이 피고 지는
꽃들의 가냘픈 이야기보다도 더 역력히 알고 있다.
산은 가슴 언저리에 그 어깨 언저리에 스며들던
더운 피와 그 피가 남기고 간 이야기와 그 이야기가
마련하는 역사와 그 역사가 이룩할 줄기찬
합창소리도 알고 있다. 산은 역력히 알고 있는 것이다.
이슬 젖은 하얀 촉루가 뒹구는 저 능선과 골짜구니에는
그리도 숱한 풀과 나무와 산새와 산새들의 노랫소리와
그리고 그칠 줄 모르고 흘러가는 시냇물과 시냇물이
모여서 부르는 노랫소리와 철쭉꽃 나리꽃과 나리꽃에
내려앉은 나비의 날개에 사운대는 바람과, 바람 곁에
묻혀가는 꿈과 생시를 산은 알고 있다.
그러기에 산은 우리들의 내일을 믿고 살아가듯
언제나 머언 하늘을 바라보고 가슴을 벌린 채
피 묻은 역사의 기록을 외우면서 손을 들어
우리들을 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산이여!
나도 알고 있다.
네가 역력히 알고 있는 것을
나도 역력히 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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