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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해적] 뭍에서 밀려나 바다로 간 약자들…공포와 슬픔을 잠재의식에 구겨넣다

— 선택했다고 믿기 위해 꿈이 필요한 사람들…남성성에 파괴된 여성 해적 이야기
— 공포의 바다, 그 아름다움의 역설…약자가 자아를 지키려는 보호본능, 자기암시   

 

(조세금융신문=이상현 기자) 


해적(海賊, pirate)들이 드나드는 항구마을에 사는 루이스는 17살 풋풋한 사내다. 추정컨데, '루이스'라는 이름은 보물섬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에서 따 온 것이다. 아무튼 루이스의 꿈은 작가이고, 해적이었던 아버지가 마지막 출항 후 돌아와 남긴 보물섬 지도와 항해일지를 갖고 이 뮤지컬의 전체 이야기를 직접 이끌어간다. 말하자면 전지적 작가 시점의 주인공이다.

 

루이스는 자신을 남기고 사망한 아버지가 자신의 친구였다고 주장하는 해적선 선장 잭이 찾아왔을 때 애걸복걸, 기어이 해적선에 오른다. 명사수 앤과 검투사 메리가 보물섬을 향한 항해에 필수요원으로 동행하게 된다.

 

긴 항해 끝에 도착한 보물섬에서 갑판장 하워드가 반란을 일으키고, 보물은 바다에 모두 빠지고, 해적의 천적인 ‘해적 사냥꾼’들에 잡혀 파국을 맞는다. 그런데. 늘 그래왔듯, 기자의 관심은 절묘한 ‘이야기의 힘’ 뒤에 도사린 “왜 이 이야기인가”다. 왜 지금 ‘해적’을 소재로 한 뮤지컬이 공연되고 있는가?

 

해적은 ‘약자’의 또다른 이름

“우리마을에서 가장 잘생긴 사람은 해적. 우리마을에서 가장 돈 많고 지저분한 사람도 해적.” 극중 노랫말의 일부다. 사람들이 왜 해적이 되는 지를 설명한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 빚더미에 앉은 사람, 소심해서 실적이 낮은 영업사원, 파리 날리는 자영업자, 노숙자 등등.

 

전직 해적출신 노인도 다시 해적단 모집에 응한다. 보물섬으로 향하는 해적선의 선장 잭이 자신이 해적시절 뭍에 정박했을 때 몇푼 쥐어주던 꼬맹이였다는 점을 모른채. 나중에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는 전직 해적선 캡틴인 노인. 아무튼 해적은 악당들이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다. 약자는 안전한 뭍으로부터 ‘공포의’ 바다로 내몰린다. 자신들이 택했다고 생각하면서. 선택했다고 생각하기 위해 공포의 바다의 아름다움을 칭송한다. 약자의 자기암시, 자아를 지키려는 보호본능이다.

 

약자 중의 약자인 여자

앤과 메리는 해적계의 금기를 깨고 여자 신분을 숨기고 해적이 된다. 앤은 해적선장 잭이 짝사랑하는 전직 술집주인인 여자. 극중 앤은 최고의 총잡이로, 선장 잭과 사격 내기를 해서 별을 쏘아 맞힌다. 총알에 바스러진 별이 부스러기로 흩날리는 장면은 환타지의 절정이다. 앤은 이혼한 남편에게만 관대한 법원에 치를 떨다가 잭의 해적선에 오른다. 해적이라는 직업은 사회적 약자들 중에서도 약자인 여성 앤의 ‘세상에 대한 복수’라는 복선이기도 하다.

 

메리 역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성으로 ‘포세이돈’이라는 예명을 얻을 정도로 당대 최고의 칼잡이가 된다.

앤과 메리 둘다 여성차별의 세상에 이를 갈면서 최고의 사격술(총)과 검술(칼)을 익혔다. 하지만 남자 해적으로 살아가는 두 여자가 보물을 찾아 떠나는 해적들에게는 꼭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점이 사실은 핵심 메시지다.

 

게다가 두 여자는 서로 사랑한다. 해적 깃발의 해골 밑에 그려진 피스톨(총)과 커틀러스( 칼)은 각각 앤과 메리를 상징한다.

 

 

바다의 수칙…규칙기반의 질서

해적선장 잭은 6가지 해적 규율을 강조한다. 우선 ▲동료를 속이거나, 동료의 물건을 가로챈 자는 물 한 병과 총, 탄환을 주고 무인도에 버리고 간다 ▲선박을 약탈한 장소와 노획한 전리품 분배는 회의를 통해 결정한다 등 2가지 규칙은 각각 해적계의 ‘헌법’적 지위의 규칙이다.

 

그 다음 ▲동료를 속이지 않는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 ▲도박하지 않는다 등 3개는 형법에 해당하는 규칙. 마지막으로 조직의 불문율에 해당되는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는 규칙은 남성 중심의 ‘해적 기본법’에 해당된다. 당연히 “여자는 해적선에 오를 수 없다”는 유권해석과 동전의 앞뒷면을 이룬다.

 

그런데 해적들에게 6가지 규율은 단 한가지도 결코 지킬 수 없는 것들이다. 역설적으로 이 규칙들이 제대로 지켜졌다면 18세기 해적 이야기는 21세기인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이 됐을 지 모른다.

 

 

해적도 인간이다

모든 세상이 그렇듯, 해적 사회도 법과 현실은 너무 멀다. 매사에 공정한 것도 거의 없다. 해적끼리의 진한 ‘우정’이나 ‘의리’라는 개념도 부질없다. 동료가 단 한명이라도 부족하면 태풍에 몰살당하는 처지. 그런 극한의 생존환경 속에서 자연스레 형성된 ‘공산주의적’ 운명공동체의 숙명. 그 부스러기일 뿐이다.

 

보물이 발견되면 그걸 독차지 하려고 서로 죽고 죽이는 어리석음은 인간 일반의 특징이다. 항상 자신들의 무덤(바다) 위를 항해하는 절박함 속에서 살지만 인간의 허풍과 거짓, 태만과 폭력은 해적사회라고 해서 사라질 수 없다.

 

하지만 남성 해적 중심주의에 따라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는 규율 빼고 나머지 5개 조항을 오롯이 지킨 사람들이 있다. 바로 남장 여성 해적 앤과 메리다. 둘 뿐이었다. 두 여자는 ‘해적 헌터’에 잡혔어도 “해적답게 죽겠다”며 전향을 거부한다. 서로 사랑했으니 뭐 새로운 여자를 배로 태울 일도 없는, 유권해석 법리가 복잡해지는 케이스다.

 

삶은 참혹한 고통이자 숨막히는 아름다움

해적들의 공동묘지인 바다는 가장 설레이고 가장 아름다운 동시에 가장 공포스러운 공간이다.

 

해적선장인 잭의 입을 통해 해적들의 꿈(roman)이 드러난다. 장미향 그득한 ‘장미섬’, ‘로즈 아일랜드(Rose Island)’다. “해적이 돼 큰 돈을 벌면 조그만 섬 하나 사서 해적의 낙원으로 만들어야지!”

 

그러나 그 꿈의 낙원으로 가는 다리가 바로 돈인 바에야, 애당초 글러먹은 꿈이다. 돈은 인간이 서로를 속이고, 죽이게 만드는 마법을 지녔다. 그렇게 육지에서 쫓겨난 해적들은 자신들의 공동묘지 바다에 잠긴다. 뭐가 멋진 해적의 삶이란 말인가. 해적은 그저 뭍에서 쫓겨난 불쌍한 약자들일 뿐이다.

 

비참한 해적의 삶에서도 교훈은 있다. 바로 해적선이라는 대안의 삶터에서도 그 삶을, 그 소명을 오롯이 해낸다면 여느 인간세상처럼 똑같이 사랑과 비애가 주는 숭고함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남장 여자해적 앤과 메리가 그걸 보여준다. 앤은 아버지가 감옥에서 빼주고 천애고아 출신인 메리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해적 사회였다면 둘은 해적답게 함께 죽었을 것이다.

 

앤을 사랑한 메리는 사랑하는 앤을 살리고 싶었다. 차갑게 떠나라고 했고, 앤도 그걸 받아들여 죽음을 앞둔 메리를 떠난다. “살아볼께”라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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