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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사찰의 종교적 성격과 무속적 성격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불교의 세계는 인도를 중심으로 구산팔해(九山八海)로 이루어져 있다. 9산 8해는 1개의 3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구성하는 1수미세계(一須彌世界), 대지에 수미산(須彌山)을 포함한 아홉 대산(大山), 그 산들을 둘러싸고 있는 여덟 대해(大海)로 구성된다. 이러한 세계에서 사찰(寺刹)은 승려들이 모여서 불도를 수행하고 교법을 펴는 곳이다.

 

중국에서 승려들이 모여 사는 곳을 사원(寺院)이라고 하였다. 후대에 ‘사’는 절 전체를 가리키고 ‘원’은 ‘사’의 별사(別舍)로 사용하였으며, ‘암(庵)’은 산 속에 있는 작은 집 또는 토굴 등을 가리킨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중심으로 일반인들의 기도처인 사찰(寺刹), 국왕의 보호를 받는 왕찰(王刹), 사망한 국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願刹)로 구분한다.

 

진신사리와 적멸보궁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부처의 진신사리와 정골 100과를 가져와서 황룡사를 비롯한 사찰에 봉안했다. 우리나라에서 진신사리가 있는 적멸보궁은 양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및 치악산 법흥사에 있다.

 

진신사리가 석가모니의 형체이기 때문에 불상을 대신하면서 적멸보궁의 바깥쪽에 사리탑을 세우거나 계단(戒壇)을 만든다. 진신사리가 없는 경우 불상은 석가불‧아미타불(阿彌陀佛)‧약사불(藥師佛)‧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 등 석가여래 존상을 배치하여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다.

 

 

 

 

 

왕찰인 정림사와 미륵사

 

왕찰은 왕실에서 소원과 평안을 기도하면서 관리하던 사찰로 국가에서 토지와 노비를 제공했다. 대표적인 사찰로 백제의 미륵사‧왕흥사‧정림사, 신라의 분황사와 황룡사, 고려의 법왕사‧국청사‧개태사, 조선의 회암사‧원각사 등이었다. 백제 미륵사는 무왕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獅子寺)로 향하고 있을 때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자 왕비의 소원으로 미륵사를 건립했다.

 

정림사는 6세기 중반의 사찰로 왕궁과 도성을 장엄하는 핵심 시설이었다. ‘대평팔년(大平八年) 무진(戊辰) 정림사(定林寺) 대장당초(大藏唐草)’가 쓰여진 기와를 발견했다(1942). 건립은 538~660년 사이이며, 동일한 명칭의 사찰이 중국 남조와 일본에도 있었다.

 

미륵사는 무왕과 왕비가 사자사를 가던 중에 용화산에서 미륵 삼존을 만난 후에 세웠다. 무왕은 미륵사를 창건하여 국가의 부흥과 이상세계를 실현하려고 했다. “미륵이 세상에서 3번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경전에 따라서 3동의 1탑-1금당을 병렬로 배치하였다. 3개 금당터 기둥 아래의 지하공간은 배수로를 만들어서 연지까지 연결했다. 금당 지하는 용의 거처지로 미륵신앙을 상징하였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매년 회암사에 하사품을 내리고 불사에 참여했다. 회암사 안쪽에 집무실인 정청을 마련하기도 했다. 회암사는 조산인 왕방산(王方山)과 진산인 천보산(天寶山)의 정기를 받고, 좌청룡 수락산과 우백호 도봉산, 한강이 해자의 역할을 하는 천하 제일의 명당이었다.

 

원찰인 능사와 감은사

 

원찰은 선왕(先王)의 명복을 비는 제사와 능지기의 역할을 하면서 노비, 곡식 등을 지원받았다. 백제의 능사(陵寺)는 위덕왕이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축한 사찰로 1탑 1금당의 양식으로 세웠다(567년). 능사지에서 발굴된 석조사리감(1995년)은 “위덕왕의 누이가 사리를 공양한다”의 글자를 기록하고 있다.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

(백제 창왕 13년 태세 정해에 누이 형공주가 사리를 공양한다)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고 부처의 힘으로 왜구 침입을 막겠다는 의지로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 사찰이 완공되기 전에 왕이 죽자, 그 아들인 신문왕이 완성하였다(682년). 신문왕이 문무왕을 대왕암에 장사하고(682년), “그 은혜에 감사한다”며 이름을 지었다. 백제의 미륵사처럼 금당의 지하에 용이 머무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조선시대의 원찰은 건원릉(健元陵) 개경사, 정릉(貞陵) 경국사와 봉국사, 영릉(英陵) 신륵사, 장릉(莊陵) 보덕사, 광릉(光陵) 봉선사, 서오릉(西五陵) 수국사(정인사), 선정릉(宣靖陵) 봉은사, 장릉(章陵) 금정사(봉릉사), 융건릉(隆健陵) 용주사, 의릉(懿陵) 연화사 등이다. 사찰내 어실각(御室閣)은 위패(位牌), 전패(殿牌), 초상화 등을 봉안하였다. 조선중기 사림의 정계 진출로 수륙사나 소격서 등 불교‧도교 시설물이 철폐되었지만 왕릉의 원찰은 능침사(陵寢寺), 능사(陵寺), 재궁(齋宮), 재사(齋寺), 재사(齋舍), 조포사(造泡寺), 조포속사(造泡屬寺) 등으로 존속했다.

 

  

 

초기 사찰은 입구의 중문에서 시작하여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 불상과 불구용품을 두는 금당, 그리고 법문을 듣는 강당 순으로 배치하고 그 주변을 회랑으로 둘러 쌓았다. 그러나, 선종이 확산되면서 석가상을 모신 대웅전 중심으로 여러 건물이 배치되는 혼합된 형태로 바뀌었다.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전)동부증권 자산관리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전)(주)선우 결혼문화연구소장
•덕수상고, 경희대 경영학사 및 석사, 고려대 통계학석사,

리버풀대 MBA, 경희대 의과학박사수료, 서강대 경영과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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