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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천도와 남진정책으로 본 백제와 일본의 관계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백제의 천도는 초기 한성에서 웅진성, 사비성, 그리고 제2의 왕도인 왕궁평성으로 이어지는 발전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단순한 수도 이전이 아니라, 북방계 세력과의 충돌, 마한 정벌, 가야 및 왜(일본)과의 경쟁과 협력 속에서 형성된 남진정책과 맞물려 있었다.

 

마지막에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면서 백제계 유민이 일본으로 건너가 지배세력으로 성장했고, 잃어버린 왕국에 대한 복원 의지와 대양 중심의 확장 전략을 구사하는 기반이 되었다.

 

고구려의 남진에 따른 웅진천도

 

백제는 불교 공인과 왕권 강화가 진행되던 시기, 아신왕에서 동성왕(392~501)에 이르는 약 100년 동안 여덟 명의 왕이 교체될 만큼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의 남진이 본격화되었다. 광개토대왕은 북한강‧남한강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했고,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427)하면서 백제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개로왕은 북위와의 외교를 통한 고구려 견제에 나섰으나, 오히려 장수왕의 대대적인 공격을 불러일으켰다. 고구려군 3만이 한성을 공격했고, 개로왕이 전사하면서 문주왕은 웅진(공주)으로 천도하였다(475). 그러나 한성 귀족 해구의 난(477)으로 문주왕이 피살되면서 백제 정치체계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이후 부여씨 왕족과 한성계 해씨가 정국을 재편하며 상좌평 제도를 시행했다.

 

동성왕(479~501)은 왜에서 호위병 500명을 데리고 귀국하며 신라와의 동맹을 강화했다. 또한 강진만의 탐모라를 복속하며 서남해 해양세력을 장악했고, 정복지에 왕후제를 실시하여 중앙의 권한을 확대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산 사람 2000명이 고구려로 망명했다는 기록도 등장한다(499, 삼국사기).

 

무령왕(501~523)은 일본 가카라시마 출생설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사마(斯麻)’라는 이름으로 백제와 왜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저수지 정비 등 민생 안정에 힘쓰고, 고구려의 말갈 세력과 수곡성 등을 공격하여 적극적 군사 대응을 펼쳤다. 또한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의 회복된 국력을 천명했고, 양나라에서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으로 책봉받으며 외교적 위상을 강화했다.

 

 

 

 

 

성왕의 사비천도와 무왕의 왕궁평성

 

성왕(523~554)은 중앙을 22부로 정비하고 지방 방군성제를 실시하여 왕권을 대폭 강화했다. 지충 장군이 고구려군을 패퇴시키는 등 군사적 성과도 있었다. 백제는 신라와 연합해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551), 곧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 전역을 잃었다(553). 성왕은 복수전인 관산성 전투를 감행했지만, 신라의 매복에 전사했다.

 

이 사건 이후 왕권은 약화되고 귀족 세력—특히 대성 8족—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위덕왕(554~598)은 중국 북조‧남조‧수나라에 외교를 강화하고, 일본에 승려‧화가‧장인 등을 파견하며 국제적 교류를 이어갔다.

 

 

 

 

 

무왕(600~641)은 귀족들의 선택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즉위 후 오히려 강력한 정복군주로 변모했다. 40년간 신라의 수많은 성을 공격했으며, 사비궁을 중수하고 당‧수나라와 외교전을 전개하였다. 무왕이 추진한 제2의 천도인 왕궁평성(익산)은 『관세음응험기』와 『대동지지』에 기록이 남아 있으며, 동아시아 고대 왕궁의 구조를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유적이다. 남북대로와 주작대로 체계는 백제가 당대 동아시아 도시계획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시사한다. 이후 이곳은 대관궁사‧관궁사 등의 사찰로 전환되었다.

 

 

 

 

 

왜의 수도 아스카와 백제인의 정착

 

아스카 시대의 중심가문이었던 소가씨는 백제 목라근자의 후손으로 전해진다. 소가노 우마코가 주도했으나, 645년 을사의 변으로 몰락하면서 일본의 정치구조는 대전환을 맞는다. 고토쿠 천황과 나카노오에 황자가 주도한 다이카 개신(646)은 중국식 율령제‧중앙집권제를 도입하며, 일본 최초의 국가 시스템을 확립했다. 이 과정에서 백제와 왜의 관계는 긴장과 협력을 반복하였다.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은 백제를 지원하기 위해 백촌강 전투에 참여했고, 이후 국호를 ‘일본(日本)’으로 변경했다. 이는 ‘해가 뜨는 동쪽 나라’라는 상징을 담고 있으며, 백제가 ‘해 뜨는 밝은 땅’이라는 의미를 가졌다는 점과 상통한다.

 

東有神國謂日本亦有聖王謂天皇

“동쪽에 신국이 있으니 일본이라 일컫고 또한 성왕이 있나니 천황이라 일컫는다”

 

이 시기는 덴무‧지토 천황 시기로 중앙집권 국가가 확립된 시기인 ‘하쿠호(白鳳) 문화’ 시기였다.

 

 

 

 

 

백제의 천도는 주변국과의 군사적 긴장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동시에 부국강병과 문화적 성취를 이끄는 동력이 되었다. 백제와 왜는 독립된 국가였지만 정치‧군사‧문화적으로 깊은 상호 영향 관계에 있었다.

 

특히 성왕과 무왕 시대에 일본으로 이전된 불교‧장인‧문화 요소는 아스카 문화의 기틀이 되었고, 일본의 초기 국가 형성과 외교‧군사 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백제의 천도와 대외정책은 동아시아 문화와 국가 형성에 깊은 흔적을 남긴 거대한 흐름이었다.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전)동부증권 자산관리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전)(주)선우 결혼문화연구소장
•덕수상고, 경희대 경영학사 및 석사, 고려대 통계학석사,

리버풀대 MBA, 경희대 의과학박사수료, 서강대 경영과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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