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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칼럼] 퇴직의 정도

2016년 연말, 부산 서면의 어느 한정식 집! 필자와 옛 직장 동료 4명이 모여 정담을 나눈다. 거의 20년 만에 보는 얼굴도 있다. 시간의 나이테가 게으름을 피운 듯 그때나 지금이나 겉모습은 여전하다.

 

그러나 옛 추억을 안주삼아 떠들썩한 분위기로 확 달아올라야 할 모임장소가 차분하다 못해 처연하기까지 하다. 필자의 퇴직을 계기로 모인 만남의 장이라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필자보다 2~3살 어린 옛 동료의 대부분이 먼저 퇴직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에 그 많던 동료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필자를 제외하곤 다들 내일 모레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자의든 타의든 자리를 떠나고 없단다. 다른 곳에서 열심히 살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샐러리맨의 숙명, 퇴직
떠난 자의 얼굴엔 여유가 엿보이고, 남아 있는 자의 얼굴엔 보름달만한 걱정이 걸려 있다.

 

‘먼저 맞는 매가 낫다’는 격언을 떠올리게 한다. 떠난 자의 여유는 퇴직의 충격을 극복하고 살아있음을, 남아 있는 자의 걱정은 언젠가 닥쳐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대변하는 듯하다.

 

이런 분위기가 싫어 옛추억 한 토막을 슬며시 올려놓아도 어느덧 이야기의 물줄기는 제자리에 가 있다. 당시 시중의 일등 화제감인 김영란법이 맥을 추지 못한다. 퇴직이라는 인생의 큰 사건을 당할까봐 걱정 하는 소리와 현재의 찌든 삶에 대한 회한에 밀려 멀찍이 물러 나버린다.

 

인생의 정점을 찍고 있는 연령대의 사람들이라고 하기엔 너무 맥없어 보인다. 온 몸으로 짊어진 가장의 책임감 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이런 와중에 한 친구의 이야기가 귀에 쏙 들어온다.

 

그는 회사에서 명예퇴직을 한다는 말을 듣고 내심 명퇴를 결심했다고 한다. 주변의 몇몇 지인에게 자신의 결심을 내비치니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

 

그가 명퇴를 결심한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알 터. 누구나 경제적인 문제만 해결된다면 한 번쯤 꿈꾸는 자발적 퇴직이 아닌가! 그는 가족들이 걱정을 하지 않도록 그의 결심을 응원해줄 수 있도록 여러 차례 계산기를 두드려봤다고 한다.

 

회사에서 제시하는 명퇴금을 받는다면 돈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확신을 가진 뒤 그는 여러 차례 가족들에게 자세히 설명을 했다고 한다.


당시 고3인 아들이 충격을 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그것은 그의 기우였다. 아이들은 아빠의 고충과 선택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이들을 대상으로 세 차례나 설명하고, 아내와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눈 그의 성의가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인트라넷을 통해 사직서를 작성하고 엔터키를 누르니 다시 한 번 이 사직서를 보내겠느냐는 메시지가 떠올랐다고 한다. 이 때 그는 바로 확인을 누르지 않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이제 한 번 만 더 누르면 나는 퇴직이야. 어떻게 할까?”, “속 시원하게 눌러 버려라” 이 말을 듣고 그는 아무런 미련 없이 속 시원하게 확인키를 눌렀다고 한다. 그야말로 부창부수다.

 

퇴직의 길에 정도라는 게 있을까?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죽음의 길을 걷는다는 말처럼, 샐러리맨은 취업하자마자 퇴직의 길을 향해 걷는다. 샐러리맨에게 퇴직은 숙명이다. 문제는 이 숙명이 현실화되는 방식이다.

 

정년퇴직이나 퇴직 이후 먹고 살 거리가 준비된 상태에서 순리처럼 받아들인 사람 앞에 놓인 퇴직의 길은 평탄한 아스파트 길일 것이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어느 날 갑자기 떠밀려 퇴직의 길에 오르게 된 사람 앞에 놓인 퇴직의 길은 먼지가 풀풀 날리는 비포장도로일 가능성이 높다. 비포장도로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구덩이와 돌덩이가 운전자의 엉덩이를 괴롭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떠밀려 퇴직의 길에 오르는 게 요즘의 퇴직 풍속도가 아닌가! 그래도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퇴직의 정도를 떠올려 본다.

 

개인적으로는 사전적이든 사후적이든 가족들과 충분히 소통하며 함께 걸어가는 길이야말로 퇴직의 정도가 아닐까! 간혹 퇴직을 숨기고 몇 달 째 평소처럼 차려 입고 출근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들은 재취업이 되면 그때 회사를 옮겼다고 말하겠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다.

 

이런 말을 들으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퇴직이 죄도 아닌데, 숨길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필자도 갑작스런 퇴직을 당하고 경황이 없는 속에서 제일 먼저 떠오른 얼굴은 가족들이었다.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내가 과연 이 사태를 잘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온갖 상념들 이 가슴을 가득 매우고 있는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퇴직의 길에 오르는 첫 관문인 가족들의 동의를 구하는 일이었다. 비록 하루가 지나고, 막걸리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아내와 아이들을 불러놓고 퇴직 이야기를 털어놓은 일은 지금 생각해도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앞의 친구처럼 가족의 미래에 대한 걱정까지 털어낼 수는 없었는데, 그것은 순전히 나의 역량미달 탓이다. 때론 이런 걱정이야말로 울퉁불퉁한 퇴직의 길을 헤쳐 나가게 하는 에너지라는 만용을 부려보기도 한다.

 

사회적 퇴직프로그램의 필요
사회적으로는 퇴직프로그램의 정착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퇴직, 특히 중년 가장에게 퇴직은 엄청나게 충격적인 사건이다. 가족의 생계가 달렸고, 자신의 과거가 송두리째 무시 당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퇴직의 충격을 흡수하고, 그것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성급한 마음에 실패확률이 높은 일에 뛰어들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를 예방하려면 퇴직자들의 아픈 마음과 조급 한 심정을 어루만져 주는 가족의 배려와 함께 퇴직프로그램을 통해 본인 스스로 퇴직의 길이 어떤 길인지 미리 공부하고 예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무작정 떠밀려 떠나는 길이 아니라 기업 또는 사회단체의 퇴직프로그램을 통해 퇴직의 길이 어떤 길인지, 그 길에는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 길을 안전하게 헤쳐 나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지 등을 예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퇴직프로그램은 퇴직의 정도를 닦는데 있어 기업과 사회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다.

 

손성동
 현) 한국연금연구소 대표
 연금과은퇴 포럼 대표-‘꿈꾸는 은퇴와 연금’ 블로그 운영
 삼성금융 연구소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미래에셋 은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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