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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사법농단 주범' 구속 갈림길

2011년 9월 대법원장에 취임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취임 일성으로 '재판의 독립'을 특별히 강조했다. 그는 "재판의 독립 없이는 법원이 결코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없고 민주주의도 존속할 수 없음을 확신한다"며 "법관이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함에 있어 어떠한 형식의 부당한 영향도 받지 않도록 저의 모든 역량을 다 바칠 것을 약속한다"고 말했다.

 

7년 4개월 뒤 양 전 대법원장은 사상 최악의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의 주범으로 구속될 처지에 놓이게 됐다.

 

재판 독립을 운운하던 그는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박근혜 정부와 재판거래를 하고, 민사사건 한쪽 당사자의 대리인을 집무실로 불러 사건을 논의하는 상식 밖의 일을 저지른 피의자가 됐다. 또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판사들을 사찰하고 인사 불이익까지 줬다는 혐의까지 받는다.

 

양 전 대법원장의 이 같은 이율배반적 행보를 두고 법원 내부에서는 '불패신화가 자초한 몰락'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법원행정처 차장과 특허법원장, 대법관을 거쳐 이명박정부 시절인 2011년 대법원장에 임명되는 등 탄탄대로를 걷던 양 전 대법원장의 자만심이 초래한 결과라는 것이다.

 

민사법 분야의 대가로 불리던 양 전 대법원장은 전국 최대규모 법원인 서울중앙지법의 파산수석부장판사와 민사수석부장판사를 연이어 역임했다. 부산지법원장을 거쳐 2003년 최종영 당시 대법원장에 의해 법원행정처 차장에 발탁됐다.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온 만큼 법원 내 소장판사들과는 항상 대척점에 섰다. 2003년 여름 이른바 '대법관 임명제청 파동'이 벌어지면서 첫 위기를 맞는다.

 

'제4차 사법파동'으로도 불리는 이 사건은 노무현정부 출범 직후 진보성향 판사들의 모임인 '우리법연구회'를 중심으로 종전의 기수·서열에 따른 대법관 후보자 임명제청 관행에 반기를 든 사건이다.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이던 양 전 대법원장은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의를 밝혔지만, 최 대법원장이 반려했다. 대신 임명 7개월 만에 차장 임기를 마치고 특허법원장에 새로 임명됐다.

 

양 전 대법원장은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데 탁월했다. 2005년 대법관에 임명된 양 전 대법원장은 정권이 교체된 뒤 2011년 평생 숙원이던 대법원장에 임명됐다.

 

대법원장에 임명된 후에는 '말 그대로' 거칠 것이 없었다. 역대 대법원장 중 가장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는 평가 속에서 양 전 대법원장은 자신이 구상했던 사법부 시스템을 하나하나 실현해 나갔다. 그중 하나가 상고심제도 개선 방안인 상고법원 설치였다.

 

상고사건 적체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대법관 수를 늘리거나 상고허가제를 도입하는 대신 이른바 '고등부장'으로 불리는 고위법관직을 늘리는 상고법원 도입안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이 선택은 양 전 대법원장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된 선택'이 돼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무리한 제도 추진과정에서 일부 판사들의 저항에 직면했고, 이를 돌파해 강행하는 과정에서 '판사사찰 및 재판개입' 등 사법행정권 남용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사법부 최고 명예를 누리던 자리에서 재판개입과 법관 독립 침해라는 최악의 오명을 뒤집어쓸 처지에 놓인 양 전 대법원장의 운명은 다음 주 영장심사에서 후배 판사들의 판단에 따라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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