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신경철 기자) 최근 수입 김치 물량이 역대 최고치를 갱신하며 국내 김치산업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수입 김치의 99%가 중국산일 만큼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가 심화되면서, ‘김치 종주국’이라는 한국의 위상이 안방에서부터 위협받고 있다는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
실제로 식당에서 제공되는 김치가 중국산인 경우는 이제 흔한 풍경이 됐다. 최근에는 고물가 여파로 일부 가정에서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수입 김치를 찾는 모습이 나타난다. 국내 김치 생산업체들이 ‘품질’을 앞세워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압도적인 ‘가격 격차’ 앞에서 시장 방어는 갈수록 버거운 실정이다.
◆ 멈추지 않는 수입 공세…무역수지 3년 연속 ‘적자 행진’
관세청 수출입무역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김치 수입량은 통계 작성이 시작된 2007년 이후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수입량 추이를 살펴보면 2019년 처음 연간 30만 톤을 넘어선 뒤 2021년 중국산 ‘알몸 김치’ 파동으로 24만 톤까지 일시 급감했으나, 2022년부터 다시 반등해 2024년 31만 1570톤까지 3년 연속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렸다.
특히 수입 물량의 99% 이상이 중국산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값싼 중국산 김치가 대거 유입되면서 2021년 잠시 흑자를 기록했던 김치 무역수지는 이듬해부터 3년 연속 적자의 늪에 빠졌다. 지난해 김치 수출이 약 4만 7000톤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입 물량이 수출의 약 6.6배에 달해 무역수지 불균형은 오히려 심화됐다.
2025년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올해 1∼9월 김치 수입량은 약 24만 9000톤으로 전년 동기보다 12% 증가했다. 업계에서는 현재 추세가 이어질 경우 연간 수입량이 35만 톤 안팎에 이르러 역대 최대치를 또다시 경신할 것으로 전망한다. 한국이 명실상부한 ‘김치 순수입국’으로 고착화되는 모양새다.
◆ 식탁 점령한 중국산…“유통 김치 10개 중 4개는 수입산”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의 ‘김치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3년 국내 김치 총판매액은 약 2조 47억원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10.3% 수준이다.
반면 내수 시장에서 수입 김치의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시장에서 유통되는 ‘상품 김치’(직접 담그지 않고 구매하는 김치)를 기준으로 할 때 수입산 비중은 38.9%에 달한다. 특히 일반 식당 등 외식업체들이 구입하는 김치 물량의 50.2%가 수입산인 것으로 조사됐다.
쉽게 말해, 시중에서 팔리는 김치 10개 중 4개는 수입산이며, 우리가 식당에서 마주하는 ‘상품 김치’ 2접시 중 1접시는 중국산이라는 의미다.
소비 패턴의 변화도 감지된다. 여전히 가정 내 수입 김치 구입 비중은 5.4% 수준으로 낮지만, 경기 침체와 고물가가 장기화되면서 마트와 온라인몰의 저가 수입 완제품으로 눈을 돌리는 소비자가 늘어나는 추세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주머니 사정이 팍팍해진 소비자들에게 ‘몇천 원 차이’는 품질보다 우선하는 구매 요인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영세 식당들의 사정은 더욱 절박하다. 김치를 ‘무료 반찬’으로 인식하는 한국의 외식 문화 속에 임대료와 인건비 상승을 감당하기 위해 업주들이 가장 먼저 손을 대는 원가 항목이 바로 김치다. 국산 대비 절반 가격인 중국산 김치는 이들에게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가 됐다.
◆ 수입 김치 급증의 배경…가격·원재료·정책의 엇박자
수입 김치가 국내 시장을 잠식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단연 ‘가격 경쟁력’이다. 대한민국김치협회에 따르면 국산 배추김치의 kg당 평균 가격은 약 3,600원이다. 반면 중국산은 약 1,700원 정도로 절반 가격에 불과하다. 2배 이상의 가격 차이는 비용 절감이 절실한 외식·급식 업체들을 수입산으로 내모는 강력한 유인책이 된다.
여기에 기후 변화로 인한 ‘원재료 수급 불안’이 기름을 부었다. 배추, 마늘, 고춧가루 등 주요 농산물 가격이 작황에 따라 널뛰기를 반복하면서, 안정적인 물량 확보가 어려운 국내 김치 공장들이 수입 원료나 수입 김치에 의존하는 악순환이 형성됐다.
정책적 요인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김치 제조업은 2011년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권고 지정된 데 이어, 2019년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자율협약이 체결되면서 대기업의 업소용 김치 시장 확장이 사실상 제한됐다.
대기업들이 가정용 포장김치 시장에만 집중하는 사이, 규제로 생긴 B2B(기업 간 거래) 시장의 공백을 저가 중국산 김치가 파고들었다. 업계 일각에선 “대기업의 자본과 기술이 일찍 투입돼 공장 자동화와 계약재배를 통해 가격 경쟁력을 갖췄더라면, 업소용 시장을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내주지는 않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적지 않다.
◆ 끊이지 않는 원산지 둔갑…신뢰까지 위협
수입 김치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원산지 세탁’ 부작용도 속출하고 있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서천호 의원실에 따르면, 2024년 적발된 김치 원산지 거짓 표시가 574건, 미표시가 176건으로 총 750건에 달했다. 2020년(691건)과 비교하면 8% 이상 늘어난 수치다.
2025년 1∼8월에도 447건이 적발되는 등 상황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중국산 김치를 국산으로 속여 파는 행위는 단순한 통계 위반을 넘어, 국산 김치 전반에 대한 소비자 불신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라는 지적이다.
◆ 국산 김치의 생존법…‘신뢰’와 ‘프리미엄’으로 승부해야
가격 전쟁에서 승산이 없는 국산 김치가 살길은 결국 ‘차별화된 가치’에 있다. 정부와 업계는 ‘품질’과 ‘신뢰’를 재도약의 발판으로 삼고 있다.
정부는 100% 국산 재료를 사용하는 업소에 인증 마크를 부여하는 ‘국산김치 자율표시제’를 확대하고 있다. 소비자가 가격 이면의 가치, 즉 ‘신뢰’를 보고 식당을 선택할 수 있도록 유도하겠다는 취지다. 또한 수입 김치를 쓰던 식당이 국산으로 전환할 경우 차액을 일부 지원(kg당 최대 1,280원)하는 ‘김치 바우처 사업’을 통해 가격 장벽을 낮추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기업들은 ‘프리미엄화’와 ‘글로벌화’로 돌파구를 찾는다. 대상, CJ제일제당 등 주요 기업들은 비건·저염·기능성 김치 등 고부가가치 제품을 개발하고, 위생과 안전성을 앞세워 중국산과의 격차를 벌리고 있다. 현지 공장 준공과 수출 라인 확대를 통해 내수 시장을 넘어 김치를 ‘글로벌 K-푸드’로 격상시키려는 노력도 가속화하고 있다.
결국 핵심은 수입 김치의 저가 공세를 인정하되, 국산 김치만의 ‘대체 불가능한 영역’을 구축하는 데 있다. 원재료비와 인건비라는 구조적 한계 탓에 가격 경쟁력에서 열세인 점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타협 없는 위생 기준과 원산지에 대한 투명한 신뢰, 그리고 한국 고유의 깊은 맛과 지역성은 수입산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국산 김치만의 강력한 무기라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식당 입장에서 당장의 비용 절감을 위해 수입 김치를 쓰는 것은 합리적 선택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김치만큼은 믿고 먹는다’는 소비자 신뢰가 더 큰 자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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