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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스무디 20달러, 청담 2만8000원…신세계 트웰브 덮친 ‘에러원 그림자’ [유통노믹스]

LA 최고급 마트 ‘에러원’, 헐리우드 스타 성지로
단위 면적당 매출 업계 4~5배…"건강이 새로운 부의 척도"
신세계 청담 ‘트웰브’, 2만8000원 스무디·로고 등 ‘판박이’ 지적
사측 “독자 디자인” 해명에도…소비자 “보는 내가 다 민망”

 

(조세금융신문=신경철 기자)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비벌리힐스. 레깅스 차림의 젊은 여성들이 한 손에 핑크빛 스무디를 든 채 스마트폰 셔터를 연신 누른다. 스무디 한 잔 가격은 20달러(약 2만8000원). 유기농 달걀 한 판(12개)은 12달러대, 산소가 함유됐다는 생수 한 병은 26달러에 팔린다. 할리우드 스타와 유명 인플루언서들의 ‘성지(聖地)’로 뜬 초고가 유기농 마트 ‘에러원(Erewhon)’의 풍경이다.

 

에러원은 단순한 식료품점을 넘어섰다. 뉴욕타임스(NYT)가 “LA에서 가장 뜨거운 사교장”으로 지목했을 만큼, 캘리포니아 상류층이 지위와 재력을 과시하는 ‘식료품계 에르메스’로 자리 잡았다.

 

최근 이 ‘에러원 현상’이 태평양을 건너 한국 유통업계에도 파장을 낳고 있다. 신세계백화점이 서울 청담동에 야심 차게 선보인 최고급 식품관 ‘트웰브(Twelve)’가 에러원의 브랜드 문법을 고스란히 옮겨왔다는 이른바 ‘카피캣(Copycat·모방)’ 논란에 휩싸이면서다.

 

 

◆ 반지하 마트, 럭셔리 제국이 되다

 

간판명 ‘에러원(Erewhon)’은 영국 작가 새뮤얼 버틀러의 동명 소설에서 따왔다. 영어 단어 ‘어디에도 없는 곳(Nowhere)’의 철자를 뒤집은 표현이다. 1966년 미치오 쿠시 부부가 보스턴의 소박한 반지하 공간에서 창업할 당시만 해도 에러원은 자연식 철학을 공유하는 대안 공동체에 가까웠다.

 

반전은 2011년 식품 유통업자 토니 안토시 부부가 경영권을 쥐면서 시작됐다. 이들은 반세기 가까이 축적된 유기농 철학 위에 ‘초고급화’라는 럭셔리 브랜딩을 덧입혔다. 가격이 비쌀수록 오히려 수요가 몰리는 ‘베블런 효과(Veblen Effect)’를 영리하게 접목했다는 평가다.

 

전략은 적중했다. 비벌리힐스, 샌타모니카 등 LA 핵심 부촌을 중심으로 10여 개 매장만 운영함에도 파급력은 압도적이다. 미 경제 매체 포브스에 따르면 에러원의 1제곱피트(약 0.028평)당 매출은 2500달러 선. 미국 내 일반 식료품점 평균의 4배가 넘는다.

 

초고가 정책이 일종의 진입 장벽 역할을 하면서 에러원은 소수만 누릴 수 있는 특권층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이 철옹성을 유지하는 핵심 무기는 ‘유료 멤버십’이다. 카페 멤버십(연 100달러)과 멤버십 플러스(연 200달러)를 통해 포인트 적립은 물론, 피트니스·스파 등 파트너사와 연동된 혜택을 묶어 팔며 그들만의 굳건한 생태계를 구축했다.

 

 

◆ 명품이 된 스무디…"식료품점계의 데이팅 앱“

 

돌풍의 중심에는 단연 ‘스무디’가 있다. 에러원은 패션 업계의 ‘한정 발매(Drop)’ 문화를 식음료에 영리하게 접목했다. 2022년 모델 헤일리 비버와 협업한 20달러대 스무디가 대표적이다. 딸기와 아몬드 우유에 콜라겐 등 미용 성분을 넣은 이 음료는, 비버가 "내 피부 비결의 90%"라고 극찬하며 소셜미디어를 뜨겁게 달궜다. 단일 메뉴 하나로 연간 1060만 달러(약 150억 원)의 매출을 올렸을 정도다.

 

스무디를 들고 인증샷을 남기려는 인파가 몰리면서 매장의 풍경도 바뀌었다. 좁은 통로와 화려한 고가 진열대 앞은 젊은 부유층이 매력을 뽐내는 무대가 됐다. 미 패션지 ‘더 컷(The Cut)’이 에러원을 “식료품계의 틴더(데이팅 앱)”라 묘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일상의 장보기가 하이엔드 패션이자 상류층의 ‘계급장’으로 격상된 것이다. 2023년 말 명품 브랜드 '발렌시아가(Balenciaga)'가 LA 런웨이 무대에 에러원 주스를 협업 소품으로 올린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플레이션으로 중산층이 초저가 마트를 찾을 때, 상위 1%는 기꺼이 20달러짜리 스무디에 지갑을 열며 그들만의 생태계를 과시하고 있다.

 

 

◆ 신세계 ‘트웰브’, 에러원 판박이 논란

 

에러원이 증명한 최고급 식료품점 모델은 최근 국내 대기업의 신규 매장에서도 엿보인다. 신세계가 청담동에 문을 연 ‘하우스오브신세계 청담’의 최고급 식품관 ‘트웰브’다. 신세계 측은 “패션 매거진 같은 식품관”이라며 대대적 홍보에 나섰지만, 업계 안팎에선 “LA 에러원의 판박이”라는 뒷말이 무성하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치부하기엔 매장 곳곳에서 에러원을 직관적으로 연상시키는 요소가 짙게 묻어난다는 지적이다.

 

 

가장 먼저 도마 위에 오른 건 트웰브 내 주스 바 ‘원더바’의 스무디다. 한 잔에 최고 2만8000원에 달하는 가격표부터 눈길을 끈다. 특히 1만8000원짜리 ‘베리 왈츠’ 스무디는 딸기와 바나나 베이스에 유기농 밀크와 피쉬콜라겐을 첨가했고, 컵 벽면에 내용물이 흘러내리는 듯한 ‘글레이즈(Swirl)’ 효과를 연출했다. 에러원 특유의 ‘미용 보조 성분 서사’와 화려한 핑크빛 비주얼이 고스란히 겹친다. 웰니스 스무디를 내세운 초고가 정책이 에러원을 벤치마킹한 결과가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된다.

 

 

간판 글꼴과 상품 진열 방식도 기시감을 더한다. 불필요한 장식을 빼고 굵고 반듯한 영문 고딕체를 내세운 간판 폰트는 에러원 특유의 묵직한 로고를 빼닮았다. 과일 등 식재료에 특수 조명을 쏘아 미술관 예술 작품처럼 돋보이게 만든 진열 방식, 입구에 100석 규모의 공용 공간 '아고라'를 배치해 사교장 문화를 조성하려 한 점 역시 에러원의 상업적 공식을 연상케 한다는 평가다.

 

신세계 측은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신세계백화점 관계자는 “논란이 된 간판 글꼴은 당사와 계약한 해외 디자인 업체가 독자적으로 설계한 결과물일 뿐, 에러원을 참고한 적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원더바를 운영하는 계열사 센트럴시티 측 역시 “슈퍼푸드 등 세계적인 식음료 유행을 전반적으로 반영해 메뉴를 개발했을 뿐, 특정 상표를 표적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 한계 드러낸 낡은 관행… ‘패스트 팔로워’ 넘어설 때

 

하지만 시장의 시선은 곱지 않다. 미국 현지에서 에러원을 일상적으로 접하는 미주 한인 커뮤니티에선 “한국 대기업이 자존심도 없느냐”, “에러원이 한국에 지점을 낸 줄 알았다”는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냈다. 국내 소셜미디어(SNS)에서도 두 브랜드의 매장 사진을 나란히 비교하며 “보는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라는 혹평이 적지 않다.

 

업계에선 이번 논란이 한국 유통업계의 오랜 성장 공식이었던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빠른 추격자)’ 전략이 한계에 부딪힌 결과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직접적인 모방 여부를 떠나, 눈에 보이는 화려한 외형만으로는 실시간으로 글로벌 트렌드를 접하는 국내 소비자의 깐깐한 안목을 더 이상 충족시킬 수 없다는 분석이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에러원의 성공 이면에는 반세기 넘게 고집해 온 자연식 라이프스타일과 현대적 럭셔리 마케팅이 절묘하게 결합한 고유의 맥락이 있다”며 “이러한 역사적 서사에 대한 치열한 고민 없이 트렌드만 쫓는 식의 기획으로는 브랜드의 진정성을 인정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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