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현근 시인의 詩 감상] 그 겨울, 남춘천역

2026.01.27 13:45:13

 

그 겨울, 남춘천역_양현근

 

대합실의 나무의자는

먼지를 끌어안고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펄펄 내리는 눈은 길을 지우고


새벽을 껴입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역무원이 느릿느릿 잠을 털며 난로에 불을 지피고

잔기침소리에 타닥, 타닥 불길이 일었다

허연 입김을 내뿜는 아저씨를 배경으로

등 굽은 노인이 급하지 않은 이정표를 뒤적거렸다

 

기차는 오지 않고 눈발은 풍경을 하얗게 지우는데

발목이 젖은 사람들 난로에 둘러앉아 온기를 껴입었다

 

외진 순대국밥집에서 며칠 눈에 파묻혀

막걸리나 몇 사발 걸쳤으면 싶은 날

대설주의보 소식이 분분하게 날리고

어느 설해목 아래 젖은 상처 부둥켜안고

한 사나흘 모진 눈발로 마저 휘날렸으면 싶은데

 

내내 소식은 오지 않았다

소복하게 기다림이 쌓여갈 때쯤

난로 위의 주전자는 들끓는 입김을 허공에 풀어내고​

한 그릇 국밥 같은 소리가 선로 위를 달려오고

부풀어 오르는 발자국들

먼 길 가는 노인의 보따리에

창틈으로 스며든 외풍이 시린 엉덩이를 슬쩍 걸친다

 

초행길도 같이 기대어 가면 화르르 봄꽃도 될 거라고

몰려오는 졸음이 말없이 그 바람을 당겨 덮고 있다

울퉁불퉁한 사연을 견딘 멍 자국 가뭇한 유리창에

막 나온 국밥처럼 뜨거운 입김이 공손하게 얹히고 있다

 

눈발은 가뭇없이 내리고

 

―양현근 시집, 『기다림 근처』 (문학의전당, 2013)

『별을 긷다』 (시선, 2024) 재수록

 

 

[詩作 노트]_양현근 시인

 

젖은 발목들이 나누어 입던 그 겨울의 온기

 

오래전 춘천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의 기억입니다.

눈이 세상의 경계를 지우던 날,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며

사람들은 하나 둘 남춘천역 대합실로 모여들었습니다.

 

낡은 나무 의자는 수없이 얹힌 몸의 무게로 반질거렸고,

먼지를 끌어안은 채 묵묵히 추위를 견디고 있었습니다.

 

역무원이 느릿하게 지피던 난로 불은

새벽을 껴입고 온 사람들의 안색을 덥히는 일이었습니다.

 

누군가는 굽은 등으로 이정표를 뒤적이고,

누군가는 허연 입김을 훈장처럼 내뿜으며 서 있었습니다.

 

그 풍경 속에 섞여 있노라면,

나 또한 한 그루 '설해목(雪害木)'이 된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해 꺾인 가지의 상처를 부둥켜안고,

이 무심한 눈발 속에서 한 사나흘쯤

속수무책으로 휘날리고 싶기도 했습니다.

 

적막을 깨운 것은 결국 사람이었습니다.

 

난로 위 주전자의 수증기,

멀리서 국밥 끓는 소리처럼 다가오던 기차의 진동.

 

그 소리는 기다림에 지친 몸들을 슬쩍 들어 올리는

다정한 손길 같았습니다.

 

저마다 울퉁불퉁한 사연을 안고 살아가지만,

유리창에 서린 뜨거운 입김이 멍 자국을 가리듯,

 

초행길도 서로 기대어 간다면

언젠가는 봄꽃이 될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이 시는 그 겨울 남춘천역에서 마주한,

사람이라는 이름의 난로에 대한 기록입니다.

 

세상 속으로 눈발은 여전히 흩날리지만,

그때 나누어 입던 온기는 오래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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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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