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현근 시인의 詩 감상] 가자, 가자 나의 숲으로

2026.04.08 10:47:17

 

가자, 가자 나의 숲으로 / 김왕노

 

 

물푸레나무 숲도 있고 자작나무숲도 있고 장미 숲도 있으나

지금은 밤이 깊어 유성우가 쏟아지기 전 밤이슬에 흠뻑 젖더라도

내 녹슨 이념의 날 세우려고 네가 가꾼 숲으로 가야 한다.


지구의 공전과 자전이 순조로웠으나 우리가 굴려서 가던 세상은

비포장도로 같아 끝없이 롤링과 피칭으로 멀미하며

끝없는 꿈과 힘마저 방전되었기에 너의 숲으로 가야 한다.

 

아직은 갈피를 잡지 못한 길 하늘에선 늑대별이 울고

어느 별에서 벌써 새벽이 오려는지 닭 홰치는 소리 들리는데

너의 숲에 가물거리는 민가의 불빛이라면 이정표가 될 것인데

너의 숲에는 너의 문장이 태산목의 잎맥으로 도드라지고

네 이야기의 어둑한 줄거리를 밝히듯이 태산목꽃이 뚝뚝 지고

내가 가서 잠들고 싶은 곳에 천년 이부자리같이 푸르른 이끼

모든 숲이 어둠으로 문 걸어 잠그고 숲에 들어간들 길을 잃으나

네 그리움이 기일의 촛불처럼 타오르는 곳이 네 숲이라서

나 각설이처럼 죽지도 않고 찾아갈 곳이 바로 네 숲이 아니냐.

계절은 순조롭고 아무런 처방도 받지 않고 상처가 아무는 풀꽃

상처가 아물어 더 아름답게 우는 새며 흐르는 구름이며 북두인데

우리는 어떤 잘못이 있기에 상처는 덧나기만 하는 계절이냐.

너의 숲에 이르러야만 그간 밀린 잠을 자고 상처 난 곳에도

봄이 온 듯 새살이 돋고 꿈으로 거듭 씻은 얼룩진 내 청춘

새 학기가 시작된 듯 옷과 마음의 매무새를 가다듬을 것인데

어둠이 너무 깊다. 한발 가면 한발 앞서 바리게이트 같이

앞을 막아서는 사나운 어둠이나 끝없이 작용해 오는 너의 중력

나 아니 갈 수밖에 없고 내 그리움도 집어등같이 켜고 간다.

 

하얀 박꽃이 숲의 어귀에 오랜 기다림에 뼛속까지 타들어 가고

네가 기르던 개도 내 발소리가 들리면 꼬리를 치려고

이 밤에도 잠들지 않고 빈 개밥그릇만 핥고 있다는 네 소식인데

 

아침마다 백년 우물물을 길어 정화수 놓고 촛불을 밝히고

나의 무사를 네 부뚜막에 어지간히 촛불 그슬음으로 그을렸으나

네 숲의 천년 산지기를 자청하며 아 잦아드는 어둠인데

 

아, 어둠의 무두질과 담금질로 더 단단해진 네게 줄 사랑이라

나 콧등이 새카만 어린 짐승처럼 끝없이 너를 앓으면서

때로는 낑낑거리며 내 생의 요람인 너의 숲으로 간다.

 

비로소 나의 노래와 생과 청춘마저 내려놓을 숲으로 간다.

 

 

[詩 감상] 양현근 시인 

 

상처의 치유와 회귀의 성소(聖所)

 

우리는 참으로 치열한 생(生)을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은 늘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 같아, 때로는 꿈과 기운이 일순간에 방전되어 버리곤 합니다. 타인의 삶은 평온해 보이는데 유독 나의 상처만 덧나고, 멀어지는 이상(理想) 앞에 무력해지는 그런 날들 말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소음과 부조리 속에서 허물어진 영혼에게, 김왕노 시인의 '숲'은 유일한 처방이자 필연적인 귀결점이 되어줍니다.

 

세상의 거친 길 위에서 멀미하던 영혼이 마침내 운명처럼 이끌려가는 곳은, 지도가 가리키는 목적지가 아니라 '그리움의 중력'이 작용하는 당신이라는 숲입니다. 그곳은 태산목 꽃잎이 함초롬히 지며 어둑한 문장을 밝히고, 천년의 세월을 견딘 이끼가 포근한 이부자리처럼 깔린 안식의 성소입니다.

 

녹슨 이념의 날을 세우려던 서슬 퍼런 다짐조차 그 숲 앞에서는 콧등 새카만 어린 짐승의 낑낑거림으로 화(化)하고 맙니다. 어둠이 바리케이드처럼 앞을 가로막을지라도, 뼛속까지 타들어 가는 박꽃의 기다림과 빈 밥그릇을 핥는 개의 발소리가 이정표가 되어주기에 우리는 기어이 그 숲에 닿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사랑이란, 나의 생과 노래와 청춘마저 온전히 내려놓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고요한 항복'임을 시인은 노래합니다. 여기서 '숲'이란 거창한 자연의 형상일 수도 있으나, 내가 온전히 나일 수 있게 하는 사람, 혹은 따뜻한 온기로 나를 기다려주는 마음의 공간일 것입니다. 지친 하루의 끝에 '나의 숲'이 되어줄 누군가를 떠올리며 마음이 뭉클해지는 밤입니다.

 

아울러, 주옥같은 작품을 끊임없이 상정(上呈)하는 한편, 시와 이미지가 결합된 새로운 문학적 영토를 개척하며 디카시의 저변 확대에 불철주야 헌신하고 있는 김왕노 시인의 열정은 우리 문단에 커다란 울림과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지치지 않는 창작의 혼과 헌신 덕분에 시의 숲이 날로 더욱 울창해지고 있는 아름다운 봄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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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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