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진민경 기자) 취임 100일을 맞은 황기연 한국수출입은행장이 정책금융의 역할을 전면에 세웠다. 통상위기와 산업 재편 가속화라는 이중 압박 속에서 민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리스크를 먼저 떠안는 ‘모험자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약 150조원 규모의 통상 대응 패키지를 축으로, 전략산업과 지역경제를 동시에 겨냥하는 중장기 금융 드라이브를 본격화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황 행장은 11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통상위기를 극복하고 대기업부터 지방 중소기업까지 아우르는 건강한 산업 생태계를 만드는 데 모든 정책 역량을 집중하겠다”며 “수출입은행의 설립 목적은 생산적 금융이다. 대규모 전략산업을 지원하되 지역 수출 중소기업까지 온기가 퍼지도록 하는 포용 금융이 수출입은행의 차별점”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간담회는 수출입은행이 6년 만에 마련한 공식 소통 자리이자, 황 행장 취임 이후 첫 기자간담회다. 황 행장은 발표를 직접 맡으며 “보통 업무계획은 실무 담당자가 발표하지만 오늘은 제가 직접 하겠다”고 말했다. 정책금융기관 수장이 취임 100일 시점에서 중장기 전략을 전면 공개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 ‘현장’ 강조한 100일…생산적 금융에 방점
황 행장은 취임 이후 줄곧 ‘현장’을 강조해 왔다. 수도권 대기업부터 지방의 작은 기업까지 직접 발품을 팔며 애로사항을 듣고, 이를 여신정책과 프로그램 설계에 반영하겠다는 의지를 반복해서 드러냈다. 단순한 지원 확대가 아니라 산업 현장의 체감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정책금융을 설계하겠다는 의미다.
실제 그는 취임 후 3개월여 동안 창원, 울산, 영천 등 전국 산업 현장을 돌며 중소기업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들었다. 이를 토대로 수출입은행은 중소기업 AI 전환 지원 프로그램과 수출기업 금융지원 패키지를 마련하고, 중형 조선사 보증 대출 재개를 추진 중이다. 행장의 현장 방문이 선언에 그치지 않고 제도 보완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황 행장은 수출입은행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했다. 그는 “가계대출도, 부동산 대출도 없다. 수도권 대기업부터 지방의 작은 중소기업까지 아우르는 건강한 산업 생태계를 만드는 데 사활을 걸겠다”고 말했다.
이는 수출입은행이 수익 중심 금융이 아닌 산업 중심 금융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 발언이다. 단기 실적이 아니라 산업의 지속가능성을 우선하고, 민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을 정책금융이 떠안으며, 산업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기다리는 금융이 수출입은행의 존재 이유라는 설명으로 읽힌다.
◇ 150조 금융지원 가동…위기대응·균형성장 ‘투트랙’ 본격화
황 행장은 취임 100일을 계기로 2026년부터의 중장기 지원 방향을 공개했다. 핵심은 통상위기 대응과 지역 균형성장을 동시에 추진하는 ‘투트랙’ 전략이다.
수출입은행은 2030년까지 총 150조원 규모의 ‘수출활력 ON(溫) 금융지원 패키지’를 가동한다. 고환율과 관세장벽, 글로벌 수요 둔화 속에서 수출기업이 단순히 버티는 수준을 넘어 구조 전환과 시장 다변화까지 이어갈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취지다. 신시장 개척과 유턴기업 지원, 기간산업의 구조 전환, K-컬처 확산 등 수출 생태계 전반을 포괄하는 지원 체계를 통해 수출 생태계 전반의 체질 개선을 노린다.
지역경제 활성화도 병행한다. 중소·중견기업에 대한 금융지원을 확대하고, 비수도권 기업 여신 비중을 35% 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올해 상반기에는 지역 수출기업 투자를 위한 특화 펀드를 조성해 지역 중심의 자금 선순환을 유도할 방침이다.
황 행장은 특히 체감도를 강조하며 “중소기업들도 정부의 생산적 금융 기조를 체감할 수 있도록 비수도권 중소기업에 2.2% 금리로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략 산업 분야에서도 정책금융의 역할을 더욱 분명히 했다. 민간 금융이 단독으로 부담하기 어려운 고위험·장기 프로젝트를 선제적으로 떠안는 형태다.
황 행장은 “민간 은행이나 민간 기업이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원전·조선·방산 등은 감당이 어렵다”며 “바라카 원전 지원 당시 유일하게 수출입은행만 금융지원을 했던 만큼, 앞으로도 원전 수주를 적극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방산 분야 사례를 언급했다. 황 행장은 “수출입은행은 2022년부터 방산 중소기업들을 대상으로 직접 대출 90억 달러, 보증까지 합치면 150억 달러를 지원했다”며 “나중에는 시중은행들도 방산 분야 금융지원에 참여했는데 생산적 금융을 수출입은행이 견인한 대표적 사례”라고 말했다.
공급망 안정과 경제 안보 강화 역시 2026년 정책 방향의 한 축으로 꼽혔다. 핵심광물·에너지 분야 투자를 펀드로 뒷받침하고, 저신용 등으로 여신 한도가 부족한 공급망 기업에 대해서는 특별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해 밸류체인 전 단계의 병목을 완화하겠다는 계획이다. 동시에 글로벌 사우스 시장 개척을 통해 수출시장과 생산기지 다변화를 추진, 통상 리스크를 분산시키겠다는 전략을 내놨다.
황 행장은 간담회를 마무리하며 50주년을 맞은 수출입은행의 역할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는 “수출입은행이 지금껏 50년 동안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새로운 100년을 만들면서 대한민국 경제에 기여하고 수출 기업을 지원하고 지역 곳곳에 온기를 전할 수 있도록 올해 열심히 뛰고 들으며 나아가겠다”고 전했다.
취임 100일. 황기연 행장은 ‘현장’과 ‘생산적 금융’이라는 두 축을 앞세워 정책금융의 존재 이유를 다시 부각시켰다. 통상위기와 산업 재편의 기로에서 수출입은행이 어느 수준까지 리스크를 떠안고 산업 전환을 견인할 수 있을지 시장의 시선이 모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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