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정기훈 서이한방병원 대표원장) 교통사고로 한방병원에서 진료할 때 쉽게 듣는 단어가 어혈(瘀血)이다. 사고 충격으로 기혈 순환이 막히고 노폐물이 축적돼 통증이 생긴다는 설명과 함께 어혈이 등장한다. 어혈을 다스리는 처방의 중심에 활혈탕(活血湯)과 어혈탕(瘀血湯)이 있다. 두 처방은 혈액 순환의 큰 줄기는 같지만 사고의 시기와 통증 양상에 따라 그 역할에 차이가 난다.
활혈탕의 핵심은 ‘활(活)’, 살려내고 움직이게 하는 데 있다. 교통사고 직후 몸은 전신 근육이 수축하고 기혈 순환이 급격히 저하된다. 이때 활혈탕은 혈액의 흐름을 촉진하고 정체된 기운을 소통시키는 역할을 한다. 사고 초기, 몸이 욱신거리고, 이곳저곳 돌아가며 아픈 증상이 나타날 때 주로 사용된다. 활혈탕은 특정 부위의 고정된 통증보다는 전신적인 순환 장애를 개선한다.
어혈탕의 방점은 ‘어(瘀)’, 맺히고 정체된 것을 부수는 데 찍혀 있다. 사고 당시 미세 혈관이 파열되어 조직 사이에 스며든 피가 흡수되지 못한다. 이 어혈은 특정 부위에 고정되어 콕콕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을 유발하며, 밤이 되면 그 증상이 더욱 심해지는 특징이 있다. 어혈탕은 단단하게 뭉친 ‘내부의 멍’을 직접적으로 타격하여 녹여내고 배출하는 역할을 한다. 활혈탕이 순환의 길을 넓히는 작업이라면, 어혈탕은 길을 막고 있는 바위를 부수는 정밀 작업에 가깝다.
약재 구성에서도 차이가 있다. 활혈탕에는 당귀, 천궁과 같이 혈액을 보충하면서도 잘 흐르게 돕는 약재들이 주로 쓰인다. 이는 손상된 조직의 회복을 돕고 전신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데 유리하다. 반면 어혈탕에는 도인, 홍화처럼 뭉친 혈액을 깨뜨리는 약재들이 전면에 배치된다. 이들은 혈소판 응집을 억제하고 미세순환을 강력하게 개선하여, 정체된 어혈이 다시 순환의 흐름 속으로 녹아 들어갈 수 있게 유도한다. 한방에서는 사고의 경과 시간에 따라 이들을 전략적으로 운용한다.
사고 직후 1~2주간은 강력한 어혈탕을 통해 사고의 찌꺼기를 먼저 제거하고, 이후 통증이 완화되면서 회복기에 접어들면 활혈탕으로 전환하여 조직의 재생을 돕고 순환력을 강화하는 치료가 일반적이다. 사고 초기에 어혈을 충분히 제거하지 않은 채 순환만 시키려 하면, 정체된 어혈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며 새로운 통증을 만들거나 만성적인 후유증으로 남을 위험이 있다.
결국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의 성패는 사고 시기와 증상에 따른 처방에 달려 있다. 단순히 통증을 억제하는 것을 넘어, 활혈탕으로 전신의 흐름을 살리고 어혈탕으로 보이지 않는 멍을 지워내는 과정은 한의학의 정밀한 치료 시스템이다. 몸에 남은 사고의 흔적이 날카로운 찌름인지, 혹은 전신적인 무거움인지에 따라 적절한 처방을 하면 일상으로의 복귀가 빠르게 가능할 수 있다.

[프로필] 정기훈 서이한방병원 대표원장
•現) 대한고금의학회장
•前) 대전한의사회부회장
•前) 대전대 한의예과 학과장
[조세금융신문(tf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