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칼럼] 삶과 경제를 어렵게 하는 것들, 세력경쟁과 국론분열

2022.09.15 08:41:43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성리학은 ‘하늘이 곧 이(理)’라는 송나라 정호(程顥)에 의하여 창건되었다(1000년). 주희(朱熹)는 ‘사서집주’를 완성하여 성리학을 집대성하였다. 성리학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등장하면서 문묘를 국가 제도로 정착시켰다. 그 기반인 도통론은 자연과 인간의 원리이자 질서인 도가 성인에 의해 현실 사회에서 구현된다고 본다.

 

이러한 성인을 모시는 문묘(文廟)는 성균관과 향교 내 사당으로 신라 성덕왕(聖德王)이 국학(國學)에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제도는 조선 중기에 예송논쟁을 촉발시키면서 사회 혼란과 국력 약화의 원인이 되었다.

 

성리학에 의한 집단지성, 분열의 시작

 

문묘의 구조는 대성전(大成殿)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무(東廡)·서무(西廡)를 배치한다. 대성전은 공자, 안자·증자·자사자·맹자의 4성(四聖)과 공자의 뛰어난 제자 10인, 송(宋)나라의 주자학자 6인을 좌우에 배향했다. 동무와 서무에 중국 명현(名賢) 47인과 우리나라의 명현 9인을 배향했다. 석전대제는 문묘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중기에 서인이 인조반정 이후에 호서지방과 경기지방을 기반으로 중앙을 장악하자 다른 지역은 정치권력에서 밀려났다.

 


상호 세력경쟁이 심해지는 과정에서 성리학은 3년 탈상에서 누가 적장자로 3년 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예송논쟁을 벌였다. 1659년 효종의 죽음과 1674년 효종 왕비의 죽음으로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씨의 복상 기간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은 두 차례에 걸쳐 대립하였다. 이 때 송시열은 유교 교리를 해석하는 방법이 다르다고 윤선도와 박세당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았다. 윤선도와 송시열은 남인과 서인에 속하면서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기도 했다.

 

보길도에 세상을 잊은 윤선도

 

윤선도(尹善道, 1587~1671년)는 18세에 진사초시(進士初試)에 합격하고, 성균관 유생으로 이이첨(李爾瞻)을 규탄했다가 모함으로 함경도 경원(慶源)에 유배되었다(1616년). 그는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나자 해남(海南)으로 내려갔다(1623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급제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스승이 되었다(1628년). 그러나, 강석기(姜碩期)가 모함하여 파직되었다(1634년).

 

남인이었던 그는 중앙에 복귀했다가 서인의 모함으로 관직을 사직하고 양주 고산(孤山)에 은거했다. 또 다시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서인인 송시열(宋時烈)과 맞서다 관직에서 쫓겨났고(1657년), 예론문제(禮論問題)로 서인과 대립하다가 삼수에 유배되었다(1659년). 그리고, 그는 완도 보길도(甫吉島)에 낙서재(樂書齋), 십이정각(十二亭閣), 세연정(洗然亭), 회수당(回水堂), 동천석실(石室) 등을 건립했었다. 말년에 보길도에서 살다가 낙서재에서 85세에 일생을 마감했다(1667년).

 

 

 

 

 

 

송자로 추앙받은 송시열

 

송시열(宋時烈, 1607~1689년)은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 이상 거론되었던 노론의 영수였다. 그는 오랫동안 주자가례에 의한 예송논쟁으로 남인과 다투면서 윤선도와 적대 관계였다. 그는 조선의 중화사상을 정립하여 정조 때 국가 차원의 스승인 송자로 격상되기도 했다. 송시열은 기자로 인하여 조선의 예의 나라가 되었다고 존중했다. 유교사회에서 단군은 동방에 처음 천명을 받은 임금이고, 기자는 처음 교화를 일으킨 임금으로 숭상한다.

 

그는 공적을 인정받아서 영조(英祖)때 문묘에 배향되었고, 정조(正祖)에 의하여 송자(宋子)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당쟁이 격화되면서 여러 논란의 중심에 있었고, 그의 묘가 파헤쳐지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화양서원은 그가 은거했던 곳에 세워진 서원으로 창건되던 해에 편액을 달았다(1716년).

 

조선은 임진왜란 때 군사를 파견한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두는 대보단(大報壇)을 창덕궁에 설치했고,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서 화양서원에 만동묘를 설치했다. 그도 당쟁의 희생자로 제주도로 유배를 가면서 정적이었던 윤선도가 머물렀던 보길도에 암각문 시를 남기기도 했다.

 

八十三歲翁 蒼波萬里中

一言胡大罪 三黜亦云窮

北極空瞻日 南溟但信風

貂裘舊恩在 感激泣孤衷

 

 

도가에 빠진 박세당

 

박세당(1629~1703년)은 당쟁에서 송시열에게 패한 후 40세에 수락산으로 들어왔다(1680년). 그는 41세부터 노자의 도덕경(道德經)과 장자(莊子)를 공부하면서 성리학에서 벗어나려 했다. 집 주변의 샘을 석천이라 하고 바위에 석천동(石泉洞)을 새겼다. 그는 ‘서계집(西溪集)’에서 김시습을 천고의 맑은 분이라고 예찬하면서 청절사(淸節祠)를 지어 추모했다(1680년). 청절사는 부여 무량사의 김시습 영정을 모사하여 봉안했고(1686년), 처음에 동봉사우(東峯祠宇)였다가 양주 사림들의 청원으로 편액이 내려졌다(1701년).

 

그는 조선 성리학의 중국 중심의 태도와 본질적인 공맹(孔孟)사상의 훼손을 비판했다. 그가 이경석(李景奭) 신도비명에 송시열(宋時烈)을 낮추었다고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노론의 공격을 받았다(1702년). 그래서, 그는 1703년 4월 유배되었다가 병환으로 8월에 생을 마감했다. 후세에 고금을 통하는 착한 선비는 “글을 소리 내어 읽되 그 뜻과 이치를 함께 익혀서 배우고 물으며, 분별함과 행동함에 독실 하라”는 교훈을 남겼다.

 

조선의 성리학은 충과 효를 바탕으로 조선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핵심적인 요소로 작동했다. 그러나, 국가보다 성리학 자체가 중시되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지배계층의 권력싸움이 피지배계층에게 전가되면서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기주의적인 현상이 사회에 정착하면서 국가적인 가치보다 특정집단의 이념이 사회를 흔들고 있다. 백성의 삶과 경제에 관련이 없는 권력다툼의 문제는 과거나 현재나 동일하게 재현되고 있다.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전)동부증권 자산관리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전)(주)선우 결혼문화연구소장
•덕수상고, 경희대 경영학사 및 석사, 고려대 통계학석사,

리버풀대 MBA, 경희대 의과학박사수료, 서강대 경영과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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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기동 신구대 교수 eservi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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