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유라시아 초원의 지배자 스키타이와 흉노

2024.09.13 07:51:38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유라시아는 아시아와 유럽이 연결된 거대한 지역으로 중위도 지역에 유럽대평원에서 시베리아평원에 이르는 거대한 초원(Steppe)을 형성하면서 유목문화의 발상지가 되었다. 초원지역은 서부(흑해 초원), 중부(카자흐 초원), 동부(신강, 몽골, 만주, 시베리아)로 구분된다. 초원문화, 유목문화, 수렵문화, 농경문화의 단일 구조 속에 서로 융합된 복합문화를 형성해 왔다.

 

흑해 초원의 지배자, 스키타이

 

흑해 초원(Pontic Steppe)은 몰도바, 우크라이나, 러시아 남부에 이르는 지역으로 고대 문명에서 스키타이(Skythai)의 활동무대였다. 스키타이는 사슴을 의미하는 스콜로토이(Skolotoi)에서 유래하며, 그리스인들은 ‘시메리안’ 또는 ‘스키타이’로 불렀다. 헤로도투스는 “정주하지 않고 수레로 자신의 집을 갖고 다닌다. 수렵생활을 하면서 가축을 치며 활을 쏘는데 능하다”고 기록했다. 소규모의 농경도 했지만 주변의 농경민들을 약탈하거나 공납으로 착취하면서 무사 정신, 전쟁 승리, 그리고 형제 관계를 중시했다.

 

스키타이는 농경 스키타이, 상공 스키타이, 유목 스키타이, 그리고 로열 스키타이의 4개 집단으로 사회를 구성했다. 스키타이인들이 기원전 12~11세기에 흑해 지역의 원주민을 추방하고 7세기에 다뉴브강까지 진출하였으며,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이 스키타이를 공격하였다가 패하였다. 4세기와 3세기에 이민족과 켈트족의 침입으로 서방 영토를 내주면서 2세기에 다른 유목민족인 사르만트에게 정복당했다.

 


스키타이인들은 크림반도의 농경문화, 알타이의 파지릭문화와 만리장성 일대에 오르도스문화를 남겼지만, 신전이나 신상을 세우지 않았고 제단만 설치하여 공물이나 희생물을 받쳤다. 기원전 8세기 스키타이가 몽골고원을 거쳐서 만주와 화북지방, 한반도와 규슈에 영향을 미쳤다. 매사냥은 기원전 3000~2000년 사이에 중앙아시아 및 몽골 평원에서 시작하여 흉노족의 이동을 따라서 인도, 페르시아, 이집트 등에 전파되었다. 그들은 말, 양, 소, 염소, 낙타 등 기동성있는 가축을 사육했다.

 

 

 

황금문화의 전파자, 스키타이

 

스키타이는 황금을 중시하면서 찬란한 황금문화와 황금으로 만든 많은 유물을 남기고 있으며, 유목활동은 계속 이동하기 때문에 보관과 이동이 간편하면서 가치가 있는 황금을 중시했다. 황금은 영원불멸의 상징으로 연성이 강하기 때문에 장신구나 화폐로 활용되었다. 별은 해(금), 달(은), 목성(주석), 화성(철), 금성(구리), 수성(수은)처럼 금속의 명칭을 부여하면서 비단도 황금색이 많았고, 황금색 비단잉어를 정원이나 후원에 키우면서 집안의 권위를 나타냈다.

 

고대부터 향료인 샤프란은 황금색을 띠기 때문에 신성하게 여겼는데 백합목 붓꽃과 크로커스(Crocus) 꽃 1개에서 3개의 암술을 채취하기 때문에 1그램을 얻는데 500개의 암술이 필요하다. 수확은 꽃송이의 암술을 핀셋으로 따는 고된 작업으로 대량생산이 불가능하다. 이것이 물에서 황금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착색과 착향, 소스 재료로 사용되면서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더 비싸고, 대신에 보다 싼 향신료로 황금색을 내는 강황이나 치자로 대체하기도 했다.

 

‘알타이’는 황금을 뜻하는 투르크어인 ‘알틴’에서 기원한다. 남미의 이상향인 엘도라도는 “온몸에 황금을 칠한 샤먼이 호수 가운데로 뗏목을 타고가 황금과 애메랄드를 던진다”는 곳이다. 초원의 강자였던 흉노는 황금으로 만든 머리 장식을 사용했고, 3세기 요녕성의 모용선비들도 황금머리 장식을 했다. 황금문화는 4~6세기 훈족의 대이동을 따라서 동유럽으로 전파되었고, 신라 금관도 초원 유목민족의 황금문화 양식과 매우 유사하다.

 

 

 

흉노족의 동서문명 전파

 

스키타이에 이어서 흉노족이 초원 지대에서 많은 부족을 통합한 연맹체 국가를 형성하여 기원전 3세기부터 3세기까지 약 700여 년간 중국 북부에서 코카서스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했다. 흉노는 유목민족의 포괄 개념이면서 중화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으로 추정된다. 서주의 목왕이 견융을 토벌하면서 하얀색의 4마리 늑대와 4마리 사슴을 얻었는데 이것이 흉노의 상징이 되었고, 귀방, 험윤으로 불리면서 주나라 때부터 중원과 경쟁했다.

 

흉노는 자연의 변화에 따라 가축의 이동을 좇아갔다(사기). 한정된 방목지 때문에 유목민족 간 전쟁이 빈번했고, 혹독한 추위는 약탈이나 전쟁을 통하여 부족한 물자를 충족해야 했다. 흉노는 청동기와 기마술을 바탕으로 국가를 세우고, 진나라가 중원을 통일하던 시기에 선우(單于)를 중심으로 주변을 정복했다. 두만 선우가 진시황에게 밀려서 북쪽으로 쫓겨났지만, 그의 아들인 묵특 선우가 다시 정복전쟁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중국 북부까지 지배했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접점으로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전국시대부터 쌓기 시작하였고, 한나라의 무제도 감숙지역에 둔전관을 설치하여 흉노의 침입을 막았다. 한나라가 비단길의 지배권을 탈취하자 기원전 35년경 서흉노가 자취를 감추었고, 남흉노가 후한의 광무제에게 투항하여 중국에 동화되었다. 1세기 광무제 때 흉노가 남북으로 갈라졌다가 북흉노는 선비에 병합되었다.

 

유럽인들은 흉노를 훈(Hun) 또는 후니(Hunni)로 불렀는데 내몽골과 만주의 선비족들이 흉노를 압박하자 서쪽으로 이동하였고(375), 훈족은 약 5세기 중엽에 우크라이나 초원과 도나우강 하류 일대에 정착했다. 10세기에 7개 부락이 동맹을 결성하여 마자르부의 아르파드를 대공(大公)으로 국가를 세웠다.

 

마자르족인 헝가리인들은 유목민족과 매우 흡사하고, 헝가리어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지 않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형성하고(1867), 언어에 대한 연구 결과를 활용하여 훈족유래설을 부정한다. 기원후 4∼5세기경에 형성된 유럽의 훈족과 중국의 흉노족이 같은 종족이라는 코펜하겐대의 연구가 발표되었다(2018).

 

 

 

초원지대의 유목민족은 스키타이와 흉노족 이후에도 선비족, 몽골족, 퉁구스족이 차례로 거대한 대제국을 건설하여 세계를 지배하였다. 러시아는 초원민족과 유목민족의 토대 위에 흑해 초원에서 시베리아 평원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다스리고 있다. 초원민족의 전통과 문화가 각 지역에 토착화되어 있지만 원형을 가졌던 북방민족의 소멸로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전)동부증권 자산관리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전)(주)선우 결혼문화연구소장
•덕수상고, 경희대 경영학사 및 석사, 고려대 통계학석사,

리버풀대 MBA, 경희대 의과학박사수료, 서강대 경영과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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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기동 신구대 교수 eservi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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