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백제계 큐슈 세력의 정한론과 을사늑약

2023.10.01 10:49:23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한반도와 대륙이 전쟁과 사회적 혼란으로 불안할 때 일본열도로 간 인구이동이 지난 2천년간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까지 벼농사, 청동기, 철기, 관개농업 등이 이주민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6세기에서 7세기 후반까지 차례로 가야, 백제,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많은 유민의 이동이 이루어졌다. 백제 부흥운동의 실패로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1920년대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인구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교류하였다.

 

백제계 주민의 큐슈지역 정착

 

왜는 백제의 부흥운동을 지원하면서 백강전투에 참여했다(663년). 백제 부흥전쟁이 실패하자 백제 유민들이 대거 왜로 이주하면서 일본은 나당에 대한 적개심으로 정체성을 새롭게 했다. 후지와라 노후히토는 백제의 유민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의자왕의 아들인 선광(善光)이 일본에서 백제왕의 작위를 받았다(속일본기). 백제가 멸망하자 지배층이 일본 수군과 함께 건너갔고(663년), 백제 왕족들과 일반인들이 오사카, 교토, 큐슈 일대에 정착했다. 왜의 수군이 남도지역에 상륙하여 백제인을 수송해 왔다(663년 10월). 여자신, 귀실집사(기시쓰 슈시), 사택소명, 사비복부, 곡나진수, 목소귀자, 억례복류 등도 왜에 정착했다.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자 일본 침략에 대한 우려로 긴장했다. 왜와 백제의 귀족들은 쓰시마, 이키섬, 큐슈에 수비병을 배치하고 봉화대를 설치하였다(664년 5월). 나당의 침략에 대비하여 쓰시마에서 북큐슈, 아스카에 이르는 요충지에 13개의 성을 쌓았다(일본서기, 속일본기).

 

쓰시마의 가네다노키(金田城), 큐슈의 나가도노성(長門城), 오노조성(大野城), 키이조성(基肄城), 야마토의 다까야스노키(高安城), 사누키(讚岐)의 야시마노키(屋島城) 등을 쌓았다. 해발 200~400m의 산 중턱에 높이 1미터 내외로 산을 둘러서 신롱석을 쌓았다. 그리고, 해안 수비병인 사카모리(崎守)가 축조된 성을 중심으로 여러 곶(崎)에 배치되어 해안을 경비하였다.

 

 

백제 출신의 억례복류와 사비복부가 오노조성(大野城)과 키이조성(基肄城)을 축조했고(664년), 달본춘초(達本春初)가 나가도노성(長門城)(665년), 큐슈는 평지성인 미즈성(水城)과 산성인 오노조성으로 방어했다. 미즈성은 길이 약 1200미터로 바깥쪽 도랑을 평소에 비우고 안쪽에 물을 채웠다.

 

유사시 안쪽 물이 바깥쪽 도랑으로 흘러서 깊은 해자가 되도록 했다. 나중에 오노조성은 둘레 약 6.5킬로미터로 대외교류 창구인 다자이후(大宰府)를 보호하면서 후지와라 나카마로가 이곳에서 신라 침공계획을 세웠다(762년).

 

왜는 백제 난민 4백여 명에게 정착지를 제공했고(665년), 2천여 명에게 집터를 지원했다(666년, 일본서기). 왜는 16등제에서 26등제로 관직을 확대하여 약 70명의 백제인을 등용했다(671년). 그로부터 100년 후에 귀족의 3분의 1이 백제계였다.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용의 후손들이 히라가타(枚方)시에 씨사인 백제왕신사(百濟王神社)와 사찰인 백제사(百濟寺)를 세웠다. 백제의 도래인들은 나라, 오카야마, 효고, 도쿠시마, 오사카, 미에, 후쿠이, 히후, 야마나시 등의 지역에 살았다.

 

야마구치 오추치 가문의 성장

 

오우치씨(大内氏)는 백제 멸망으로 큐슈와 야마구치에 정착한 백제계 가문이다. 고후쿠지(興福寺)사적기는 “오우치는 원래 일본인이 아니다”로 기록했다. 시조인 임성태자(577~657년)는 추고천황(611년)때 스오국(周防国)의 다타라하마(多々良浜)에서 다타라(多多良)씨로 정착했다.

 

그는 성왕의 제3왕자 혹은 위덕왕의 셋째 아들로 알려져 있다. 쇼토쿠 태자가 성씨와 영지(領地)로 오우치현(大内県)을 하사하자 불교를 전파하고 제철 기술을 이전했다. 그가 일본에 파견될 때 왕에게 하사받은 검이 코류지(興隆寺)에 보존되어 있다.  ‘삼국사기’는 그의 행적이 없고, ‘오우치다타라씨보첩(大内多々良氏譜牒)’에 기록되어 있다.

 

 

 

오우치가문(大内氏)은 한반도 무역을 독점하면서 유력세력으로 성장했다. 헤이안 말기에 오우치 노스케가 스오노곤노스케(周防權介)에 임명된 이후 스오의 지방관인 고쿠가(國衙)를 장악했다. 오우치 히로요가 본거지를 야마구치(山口)로 옮기고 무로마치 막부에 복종했다(1363년). 그의 아들인 오우치 요시히로는 큐슈 지역을 제압하고 남조(南朝)와 통합 교섭을 맡으면서 메이토쿠 난에 참여했다.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쓰가 요시히로의 세력을 제압하자 오에이난(1399년)을 일으켰다. 오우치 노리히로와 오우치 마사히로 부자가 막부에 영향을 미치는 다이묘의 지위까지 올랐다. 오우치 요시오키(1477~1529년)는 무로마치 막부에 영향을 행사할 정도의 세력을 구축했다. 그 뒤에 오우치 요시타카가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로 중흥을 이룩했다.

 

오우치 가문은 조선에 사절을 파견하여 왜구를 퇴치한 공로로 정착할 토지를 요구했다(1499년, 조선왕조실록). 조선은 토지 요구를 거절하고 무역의 독점만 허용했다. 오우치요시나가(大内義長)시기에 가문의 내분으로 망하면서 방계 후손들이 소영주로 살았다(1577년). 가문의 일부는 토요타(豊田)로 성씨를 바꾸었고, 방계인 야마구치(山口)는 이바라키현(茨城縣)의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를 메이지 유신까지 유지했다.

 

조슈번의 정한론자 이토 히로부미

 

19세기 막번체제에서 지방의 영주인 조슈번(야마구치현)이 존왕양파를 주도하여 에도막부의 양이를 약속받았다. 조슈번(야마구치현)은 영국의 함대를 공격하여 실패하였고, 사쓰마번(가고시마현)도 영국과 사쓰에이 전쟁에서 패하였다.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영국군의 위력을 실감하면서 존왕양이를 철회하였다.

 

그러나, 양 번은 서로 총 6개항의 밀약을 맺어서 에도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의 실권을 인정하는 삿초동맹(薩長同盟)을 맺었다(1866년). 양 번주도의 반막부세력이 에도막부와 전쟁하여 승리하고 메이지유신을 단행했다.

 

에도막부가 다이묘들 중심의 삿초동맹에 의하여 무너지면서 제국주의시대를 열었다. 삿초동맹의 주동자인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백제계 후손들과 한반도 도래인들이 정착했던 거주지로 임진왜란(1592년)에서 전투를 주도했고, 19세기에 정한론(征韓論)을 주도하였다. 삿초동맹의 주도세력들은 한반도 지배를 제1차 목표로 세웠다. 다루이 도키치는 일본과 한국을 합방하여 ‘동국’을 세우고, 청나라와 삼국을 서로 연결하면 이득이 된다는 논리를 폈다(대동합방론, 1893년).

 

이토 히로부미는 삿초동맹을 주도한 조슈번(長州藩, 야마구치현) 출신의 무사계급으로 런던대학교(UCL)에서 공부했다. 그는 에도막부를 해체하여 메이지유신을 완성하고, 막부가 해체된 후에 실질적인 권력의 실세로 일본 헌법의 토대를 닦았다. 일본에 내각제도가 도입되면서 45세에 초대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는 1909년 사망할 때까지 약 25년간 총리대신과 추밀원 의장 등의 요직을 맡았고 조선 침략을 완성하였다.

 

큐슈는 다자이후(大帝府)를 중심으로 한반도와 대륙의 창구 역할을 하면서 문물과 인구를 받아들였다. 이곳에 정착한 유민들은 대부분 권력투쟁이나 전쟁으로 밀려나면서 이동하였기 때문에 뿌리깊은 원한이 일본의 다른 지역보다 많았다.

 

임진왜란은 한반도와 대륙에 연결된 후손이 많이 살던 지역에서 주도하였고, 관련이 적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막부 시대를 이끌면서 친선정책을 폈다. 그러나, 에도막부가 다시 큐슈지역 기반의 세력에 무너지면서 한반도와 일본열도간 평화가 정착되지 못하고 일제 강점기와 대립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전)동부증권 자산관리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전)(주)선우 결혼문화연구소장
•덕수상고, 경희대 경영학사 및 석사, 고려대 통계학석사,

리버풀대 MBA, 경희대 의과학박사수료, 서강대 경영과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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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기동 신구대 교수 eservi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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