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의자왕은 방탕한 군주로서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700년 역사의 백제를 멸망시킨 무능한 왕으로 평가받아 왔다.
그러나 신라가 관산성으로 가던 성왕을 살해하면서 시작된 오랜 혼란은 무왕에 의하여 수습되었고, 그의 아들인 의자왕은 지속적으로 신라를 공격하여 수많은 성을 빼앗으며 신라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특히 신라의 합천 대야성 전투의 패배는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이 개인적인 일탈로 부하의 신임을 잃으면서 발생하였다. 위기에 몰린 김춘추는 왜와 당에 대한 외교 확대를 모색하여 돌파하고자 하였다.
의자왕, 친위정변과 신라 공격
백제의 30대 무왕은 신라를 공격하여 여러 성을 빼앗고 귀족세력을 재편하여 왕권 중심의 국정운영을 꾀하였다. 그는 익산에 궁궐을 짓고 미륵사를 창건함으로써 사비 지역의 토착 세력을 견제하였다. 이에 사비의 왕족과 대성 8족을 중심으로 반발이 일어나면서 왕권 강화에 한계를 가져왔다. 그의 아들인 의자왕도 기존 세력의 심한 견제로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의자왕은 왕위를 계승하자 친위 정변을 일으켜 정적을 제거하고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640). 귀족 중심의 정국 운영에서 벗어나 신진 세력인 달솔층의 지원을 바탕으로 신라를 공격하여 한 달 만에 40여 성을 점령하였고, 핵심 거점인 합천 대야성을 빼앗으며 신라를 궁지로 몰아넣었다(642). 이후 고구려·말갈과 연합하여 655년까지 신라의 100여 개 성을 차지하며 옛 가야 지역을 회복하였다.
의자왕 시대의 백제는 백제 금동대향로와 예술성이 뛰어난 바둑판을 제작할 정도로 문화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수시로 왜에 사신을 파견하며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고, 왜의 천황에게 선물한 바둑판과 실권자였던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에게 선물한 서랍장이 도다이지(東大寺) 정창원(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다.
이 바둑판은 자단목에 상아를 박아 계선을 표시하였고, 포석의 중심점에는 꽃 문양을, 측면에는 인물·식물·동물을 배치하였다. 의자왕이 선물한 서랍장(적칠관목주자)은 정창원의 유물을 기록한 『국가진보장』(國家珍寶帳, 756년)에 “백제 의자왕이 내대신에게 하사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의자왕이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추방된 좌평 중심 귀족들의 불만은 컸다. 성충과 흥수 역시 과감히 배제되었으며, 사택지적도 40여 명의 귀족이 축출될 때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택지적은 『일본서기』에 “조정에서 백제 사신인 대좌평 지적 등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대좌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는 높이 102cm, 폭 38cm로 4행 56자가 남아 있으며, 비문은 가로와 세로 줄을 긋고 사륙병려체로 글자를 음각하였다(654). 사찰을 세워 부처를 모시겠다는 뜻을 밝힌 이 비문은 백제 후기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의자왕 시기의 백제는 가구 약 76만 호, 인구 300만~4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 시기는 백제 역사상 인구가 가장 많았던 절정기로, 강력한 국력을 보유했다. 전통 음악의 백미로 평가되는 「정읍사(수제천)」와 최고의 예술품인 백제 금동대향로가 이 시기에 제작되었다. 같은 시기 내분으로 불안정했던 고구려의 정세와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나당연합군: 황산벌 신라와 기벌포 당나라의 협공
백제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김춘추는 고구려에 관계 개선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였고, 이후 당나라에 더욱 밀착하였다. 당나라는 고구려 공격의 위협 요인인 백제를 제거하기 위해 신라를 선택하였다.
김춘추는 당나라에 가서 “백제가 신라의 수많은 성을 점령하여 대당 교통로가 차단되었으니, 당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고 호소하였다(648). 그는 선덕여왕 사후 진덕여왕을 세웠다가, 다시 비담과 알천을 제거하고 왕권을 장악하였다.
당나라는 백제에 신라와의 화평을 요구했으나 의자왕은 이를 거절하였다. 김법민은 당 고종에게 백제의 침략으로 빼앗긴 성을 돌려달라는 상소를 올렸다(651). 당나라의 압박이 거세지자 의자왕은 더 이상 당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다(652). 이에 당나라는 고구려 정벌의 장애물로 여겨진 백제를 제거하기 위해 신라와 연합하여 공격에 나섰다.
당나라는 신라의 조공로 확보를 명분으로 파병을 결정하였다. 소정방은 신구도행책총관으로서 군사 13만여 명과 배 2천여 척을 이끌고 백제를 침략하였다. 당군은 내주를 출발해 덕물도(덕적도)에 도착하였고, 김법민과 김유신이 이를 맞이하였다. 김춘추는 우이도행군총관으로서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였다(660).
이 과정에서 백제 내부에서는 좌평층과 달솔층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전쟁 초기에 지휘 체계를 제대로 확립하지 못하였다. 좌평 흥수는 백강(기벌포)에서 당군을 저지하고, 탄현에서 신라군을 막을 것을 제안하였다. 백제군은 황산벌에 세 개의 영채를 세워 항전했으나 수적 열세로 패배하였다. 이 전투에서 신라는 좌평 충상과 달솔 상영 등 20여 명을 사로잡았다.
백제군은 밀물을 타고 들어온 기벌포의 당군을 저지하지 못했고, 당군은 백제군 1만여 명을 격파한 뒤 사비성에서 20여 리 떨어진 곳까지 진격하였다(『구당서』).

의자왕은 화친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웅진성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웅진성 성주 예식진이 반란을 일으켜 의자왕을 포로로 잡아 투항하였다. 김춘추가 사비성에 도착하자 나당연합군은 승전 잔치를 벌였고, 김춘추와 소정방은 의자왕과 부여융을 단 아래에 앉혀 술을 따르게 하였다.
이후 소정방은 사비성과 웅진성을 점령한 뒤 의자왕과 대신 88명, 백성 12,807명을 당으로 압송하였다.
김유신은 이를 두고 “나당연합군의 승리로 삼한이 안정되었다”고 평가하였다(『삼국사기』).
三韓爲一家 百姓無二心 雖未至太平 亦可謂小康
“삼한이 한 집안이 되어 백성에게 두 마음이 없으니,
비록 태평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작은 평안이라 할 만하다.”
조선의 홍춘경(1497~1548)은 이러한 안타까움을 「낙화암」으로 표현하였다. 낙화암 절벽의 꽃처럼 백제의 혼은 이어지지만, 나당연합군의 침략 속에서 왜곡된 역사는 바로잡히지 않았음을 한탄한 것이다. 오히려 방탕한 의자왕과 삼천궁녀라는 이야기가 백제 멸망의 상징으로 소비되며 그 비극은 더욱 왜곡되었다.
國破山河異昔時 獨留江月幾盈虧
落花巖畔花猶在 風雨當年不盡吹
“나라가 망하자 산하도 변하였으되, 홀로 강과 달만은 차고 기울기를 되풀이하는구나.
낙화암 가에 꽃은 여전히 피어 있으나, 그해의 바람과 비는 아직도 그치지 않았구나.”

백제의 멸망은 의자왕의 문란과 무능이 아니라, 왕권 강화 과정에서 밀려난 귀족들의 불만, 백제의 세력 확장에 당황한 신라, 고구려 견제를 우선시한 당나라의 이해관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실학자들은 백제의 멸망을 도덕적인 문제보다 한성에서 웅진으로의 천도로 국력이 약화된 구조적 문제에서 찾았다. 근거 없는 삼천궁녀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 부소산성의 고란사와 백화정, 궁녀사는 승자의 역사 속에서 의자왕을 수치수러운 패자로 각인시키고 있을 뿐이다.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전)동부증권 자산관리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전)(주)선우 결혼문화연구소장
•덕수상고, 경희대 경영학사 및 석사, 고려대 통계학석사,
리버풀대 MBA, 경희대 의과학박사수료, 서강대 경영과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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