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당나라는 백제의 옛 터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고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을 도독으로 세웠고, 신라에는 계림대도독부(鷄林州大都督府)를 설치하고 문무왕 김법민을 계림대도독으로 임명하였다.
한반도 지배의 야욕을 세웠던 당나라는 두 사람을 불러서 서로 화친하도록 웅진의 취리산 회맹을 주선하였다. 유인궤가 쓴 회맹문은 두 나라가 서로 형제처럼 화친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후 문무왕이 당나라와 3차에 걸쳐 전쟁을 벌이고, 당나라가 물러나고 신라가 백제 지역을 차지하면서 회맹도 해소되었다.
멸망과 웅진도독부의 설치
백제는 나당연합군의 협공으로 사비성이 함락되자 복신과 도침을 중심으로 부흥 전쟁을 전개했다. 거점인 주류성은 농사 짓기에 척박하지만 산은 높고 계곡은 지키기 쉬운 천험의 요새였다.
주류성은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아서 서천 건지산성, 홍성 장곡산성, 연기 당산성, 부안 위금암산성 등으로 비정하고 있다. 웅진도독이었던 유인원의 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에 “부흥군이 임존성을 근거지로 하였다가 주류성으로 옮겼다”고 적었다.
부흥전쟁 중에서 복신과 도침은 왜에 사신을 파견하여 부여풍을 왕으로 세웠다(660). 부흥군은 사비성을 공격하여 유인원을 포위했고(661), 왜의 텐지천황(天智天皇)이 5천여명의 호위병과 함께 풍왕을 귀국시켰다.
‘일본서기’에 의자왕이 부여풍을 왜에 내 질(質)로 삼았다고 기록하였고,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백제부흥군의 요청으로 백제의 왕이 되어 귀국하였다(삼국사기). 풍왕은 ‘삼국사기’에서 왕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일본서기’와 ‘속일본기’는 정식으로 백제의 왕으로 인정하고 있다. 안정복도 ‘동사강목’에서 풍왕을 마지막 왕으로 기록하면서 백제의 멸망을 660년이 아니라 663년으로 보기도 한다.

백제부흥군과 임존성의 흑치상지가 연합하여 풍왕을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당나라는 부여융과 유인궤를 보내서 백제부흥군에 맞섰다(662). 전쟁이 치열해지던 시기에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면서 풍왕과 복신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자 복신을 처형하고 왜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왜는 병선 1천여척과 군사 27천여명을 파견했다(663, 일본서기, 삼국사기). 당나라와 벌인 백촌강 전투에서 왜선 400여척이 침몰되었고 1만여명의 병력이 전사했다(구당서). 백촌강이 어디인지 명확한 기록의 부재로 백강의 기벌포, 안성천의 백석포, 동진강의 굴포 등의 견해가 있다.
후발대인 아베노히 라후는 싸우지 않고 잔병과 백제 유민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갔다(일본서기). 백제와 왜의 지도자들은 (州流降矣 事无奈何 百濟之名 絶于今日 丘墓之所豈能復往) “주류성이 함락되어서 어찌 할 꼬 백제의 이름이 금일로 끊어졌다. 조상의 무덤에 어찌 다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말했다.
후쿠오카의 관세음사는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구원군의 파병을 주도하다가 사망한 고교쿠천황(皇極天皇)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인 덴지천황(天智天皇)에 의하여 세워졌다.
나당연합군은 두량륜성과 주류성, 임존성을 차례로 무너뜨렸다. 임존성은 초기에 흑치상지가 3만의 군사로 나당연합군을 무찌르고 2백여성을 회복시켰던 거점이었다. 그러나, 흑치상지는 당나라의 회유에 넘어가서 부흥군 토벌에 앞장서면서 임존성을 함락시켰고, 주로 토번 정벌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는 조회절 사건에 가담했다는 무고로 옥에 갇혀 처형되었고(689, 신당서), 그의 묘지석이 북망산에서 발견되었다(1929). 한편, 고구려의 지원군도 손인사의 당나라군에게 패하면서 도움을 주지 못했다. 부흥군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명맥만 유지하다가 소멸되었다(664). 풍왕은 고구려로 피신했다가 당나라군에 잡혀서 강남으로 유배되었다(668, 자치통감).
나당전쟁
부여융은 사신으로 당나라에 다녀왔다가 태자에 책봉되었지만 폐위되었다(644).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포위하자 의자왕과 함께 웅진성으로 대피하였다(삼국사기).
백제가 나다연합군에 웅진성을 빼앗긴 후에 당나라로 이송되었다가‘광록대부 태상원외경’ 겸 ‘웅진도독 대방군왕’으로 책봉을 받았고, 웅진도독으로 임명되었다(665). 유인궤와 함께 당나라의 봉선에도 참여했고(666), 웅진도독부를 철수하면서 당나라로 돌아갔다(676).
당나라는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백제 지역에 5개의 통치조직을 두었다(660). 왕문도가 최초 도독이었지만 급사하면서 유인궤로 교체되었다(661년). 당나라는 고구려 원정에 패하자 웅진도독부의 철수를 명령했다(662). 유인궤는 철수를 반대하면서 오히려 증원군을 요청하였고, 손인사가 7천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왔다(663). 그리고, 당나라는 김법민(문무왕)을 계림도독을 책봉했다(663).
당나라는 웅진도독으로 유인원을 파견하면서 부여융과 흑치상지를 함께 보냈다(664). 유인원은 백제와 신라의 화해를 주선하면서 부여융이 신라의 김인문과 김천존과 예비회담을 했다. 그리고 부여융이 웅진도독이 되면서 계림도독 김법민(문무왕) 간에 웅진도독부와 계림대도독부간 국경을 확정하는 취리한 회맹을 했다(665).
회맹의 의식으로 단에서 백마를 죽여 제사한 후에 그 피를 회맹인들의 입에 발랐다. 유인궤가 쓴 맹세문은 “백제가 이웃나라와 화목하지 못하여 멸망을 자초했고(삼국사기), 신라가 이웃 나라와 화목하지 못하고 당나라군을 끌어들였다(일본서기)”고 서로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이 때 백제 유민들이 자치권을 갖는 1도독부 7주 51현을 확정했다.

그렇지만, 신라는 국력을 소진하면서 전쟁을 하였지만 점령지가 없으면서 경제만 고갈되었다. 고구려 정복 후에 나당간 갈등으로 전쟁이 발생하면서 신라가 웅진도독부를 공격하여 백제부흥군이 지배하고 있던 부여의 북쪽까지 점령했다(671).
그 당시 당나라는 토번과 신라를 동시에 상대하는 양면전에 휘말려 있었다. 신라는 임진강과 한탄강의 제1방어선, 양주와 포천의 제2방어선, 그리고 한강의 아차산성과 이성산성으로 제3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유인궤가 파주에서 신라군을 격파한 후 매초성에 주둔했다. 신라군은 매초성 전투에서 3차례 패했고, 당나라군도 천성(泉城)공격에서 패했다(675). 신라군이 매소성(買肖城)전투에서 승리하고, 최후의 기벌포 전투에서 설인귀의 당나라군을 격파했다(676).
이로써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하고 지배 야욕을 꿈꾸던 당나라를 이 땅에서 몰아냈다. 신라는 군사조직인 중앙에 9서당(誓幢)과 지방에 10정(停)을 설치했고, 백제 유민은 9서당의 백금서당(白衿誓幢)에 편입시켰다(672).
삼국은 어느 쪽이 전쟁에 승리해도 국가를 멸망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는 중국식 통일방식으로 전통적인 역학관계를 무너뜨렸다. 백제의 부흥운동은 지도층의 내분과 일부 부하들의 배반으로 좌절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회맹문은 ‘구당서(舊唐書)’, 천지서상지(天地瑞祥志)’, 책부원귀(冊府元龜)’ 등에 수록되어 있다. 백제 부흥운동의 종식 시점에 대하여 사비성의 부흥군이 진압되는 664년 또는 신라가 백제 지역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여 지배하는 671에서 672 년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부흥운동이 빨리 소멸된 이유로 왜에 기반 마련을 마련하였기 때문이라는 추정도 있다. 옹진도독부는 독자적으로 관리 30여명과 백제 유민 100여명을 왜에 사절단으로 파견했다(665). 그리고, 당나라 사신과 백제 유민 250여명을 보내서 양국간 선린관계의 복구를 합의하기도 했다(665).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전)동부증권 자산관리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전)(주)선우 결혼문화연구소장
•덕수상고, 경희대 경영학사 및 석사, 고려대 통계학석사,
리버풀대 MBA, 경희대 의과학박사수료, 서강대 경영과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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