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세금융신문=이명구 관세청장) 최근 가상자산 ‘오지급’ 사고가 발생했다. 단순한 입력 실수, 이른바 팻핑거(fat finger)에서 비롯된 사건이었다. 숫자 하나를 잘못 눌렀을 뿐인데, 그 결과는 62조 원이라는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로 번졌다.
아이러니하게도 해당 거래소는 바로 이런 사고를 막기 위한 내부통제 시스템을 이달 말 도입할 예정이었다. 기술은 준비되고 있었지만, 실수는 그보다 빨랐다.
이런 일은 결코 낯설지 않다. 몇 해 전 한 중견 수출업체가 수출 실적을 달러가 아닌 원화로 신고하는 바람에, 국가 전체의 수출액이 10억 달러나 과다 계상되는 일이 있었다.
첨단 시스템과 자동화가 일상화된 시대지만, 휴먼에러는 여전히 우리의 곁에 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사람의 실수’를 전제로 한 제도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가상자산은 분명 편리하다. 국경을 넘는 송금은 빠르고, 비용은 적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그림자도 존재한다.
비대면·익명성이 강하고 사용자 확인이 어려운 특성 탓에, 돈세탁이나 사기, 불법 외환거래에 악용되는 사례가 끊이지 않는다. 새로운 기술은 언제나 새로운 기회를 주지만, 동시에 새로운 범죄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
특히 가상자산은 기존 외국환거래 규제를 우회하는 새로운 ‘국경 간 자금 이동 통로’로 활용되고 있다. 현행 외국환거래법은 은행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금융거래를 전제로 설계되어 있어 블록체인 기반의 분산형 자금 이동 방식까지는 충분히 포섭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제도적 공백을 파고들며 불법 외환거래는 갈수록 더 교묘하고 은밀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관세청은 지난 2월 5일, 최기상 국회의원과 공동으로 국회 의원회관에서 정책 세미나를 열었다. 개청 이래 처음으로 관세청과 국회의원실이 공동으로 세미나를 열었다.
주제는 「초국가범죄와 가상자산: 국경을 넘어선 불법 자금 흐름 대응」이었다. 가상자산이 국경을 넘나드는 범죄의 수단으로 진화하고 있는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한 자리였다.
세미나는 두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하나는 가상자산을 이용한 불법 외환거래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였다. 다른 하나는 가상자산 지급결제 시장을 어떤 규제 틀 안에서 관리해야 하는가였다. 학계와 법조계, 업계 전문가들이 참여해 각자의 시각에서 문제를 짚었다.
발제자들은 공통적으로, 가상자산이 새로운 국경 간 자금 이동 수단으로 자리 잡은 만큼 이에 걸맞은 모니터링 체계와 제도적 기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스테이블코인의 경우 외국환거래법상 지급수단임을 명확히 하고, 해외 송금과 결제에 대해 신고·보고 의무를 부과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기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제도 안에서 작동하도록 하자는 제안이었다.
통계는 현실을 더 분명히 보여준다. 체이널리시스의 「2026 가상자산 범죄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전 세계 불법 가상자산 거래액은 1,540억 달러를 넘어 전년 대비 162% 증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숫자는 차갑지만, 그 이면에는 범죄 수익과 피해자, 그리고 무너지는 질서가 있다.
관세청은 무역과 외환을 관리하는 기관으로서 이러한 흐름의 최전선에 서 있다. 최근 5년간 관세청이 적발한 가상자산 이용 불법 외환거래 규모만 해도 13조 7,368억 원에 이른다. 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환치기와 재산 국외도피 등 국민의 삶을 위협하는 초국가범죄의 실체다.
실제 사례를 보면 수법은 점점 더 치밀해지고 있다. 러시아 제재로 정상적인 은행 송금이 어려워지자, 일부 수출업체들은 수출 대금을 스테이블코인으로 수령했다. 러시아에서 현금을 받은 환전상이 테더를 구매해 한국으로 전송하고, 이를 다시 현금화해 국내 업체 계좌로 보내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오간 가상자산 규모는 571억 원에 달했다.

또 다른 사례에서는 중국 내 송금 의뢰인들이 현금을 건네고, 이를 사설 중개인을 통해 가상자산으로 바꾼 뒤 한국으로 전송했다. 한국에서는 이를 현금화해 면세품 구매 자금으로 제공했다. 가상자산 거래가 금지된 중국의 제도적 환경을 악용한 수법으로, 그 규모는 2,443억 원에 이르렀다.

한편 D씨 일당은 보이스피싱 등 범죄로 얻은 자금을 해외로 빼돌리기 위해 스테이블코인인 테더 구매를 시도했다. 단속을 피하기 위해 가족과 지인들을 동원해 외화를 여행용 가방과 골프백에 숨겨 홍콩으로 반출했으며, 그 규모는 약 270억 원이었다.

최기상 의원은 가상자산을 외국환에 준해 관리하는 체계를 도입하기 위해 외국환거래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바 있다. 최 의원은 “가상자산이 초국가범죄의 새로운 통로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은 더 이상 부인하기 어려운 현실”이라며, "이번 논의가 건전한 거래 질서를 만드는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외환 제도는 경제라는 건물을 떠받치는 기둥과 같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그 기둥이 흔들리면 건물 전체가 불안해진다. 불법 외환거래는 바로 그 기둥을 갉아먹는 쥐와 같다. 소리 없이 파고들지만, 방치하면 외환 제도의 신뢰와 안전을 무너뜨린다.
관세청은 1997년 수출입 거래에 대한 외환 검사권과 수사권을 확보한 이후, 줄곧 그 쥐를 추적해 왔다. 수출입 신고 자료와 결제 내역, 물품의 이동 경로를 하나로 엮어 분석하는 일은 관세청만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이다. 그 축적된 시선 덕분에 보이지 않던 흐름이 드러나고, 흩어져 있던 단서들이 하나의 그림을 이룬다.
가상자산도 마찬가지다. 혁신과 성장의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규제가 분명하지 않은 틈을 타 기존 외환 제도를 비켜 가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익명성과 높은 유동성은 초국가 범죄에 매력적인 도구가 된다. 그래서 외환 질서를 지키는 일은 단순한 단속을 넘어선다. 보이지 않는 균열을 먼저 발견하고, 아직 무너지지 않은 기둥을 미리 보강하는 일이다.
기술은 앞으로도 진화할 것이다. 그렇다면 제도 역시 그 속도를 늦춰서는 안 된다. 경제라는 건물이 오래 버티기 위해서는, 조용히 기둥을 갉아먹는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 눈이 필요하다.
[프로필] ▲1969년생 ▲경남 밀양고 ▲서울대 경영학과 ▲서울대 행정학 석사 ▲영국 버밍엄대 경제학 박사 ▲행시 36회 ▲관세청 서울세관장 ▲부산 세관장 ▲국무조정실 조세심판원 상임심판관 ▲관세청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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