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보여준 문 대통령의 영부인인 김정숙 여사의 일거수일 투족이 연일 국민들의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김정숙 여사는 홍은동 사저에서 청와대 관저로 이사하는 도중에 찾아온 민원인에게 라면을 대접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수해지구를 찾아 쪼그리 작업방석을 엉덩이에 끼운 채 주민들 사이에 앉아서 설거지와 가재도구를 정리하는 등 의례적인 시찰이 아닌 자기 일 마냥 손수 챙기는 모습으로 소소한 화제가 되고 있다.
또한 만나는 모든 이에게 친절, 배려, 미소를 보이는 훈훈한 행보에 역대 영부인들 중에서 가장 친근하고 따뜻한 이미지를 가졌다는 세간의 평이 많다. 그래서 그녀에게 ‘친절한 정숙 씨’, ‘유쾌한 정숙 씨’라는 닉네임이 생겼다.
그녀의 얼굴을 보면 입만 웃는 게 아니라 눈도 같이 웃는다. 입은 형식적인 육체의 움직임으로 가식적인 웃음을 보일 수가 없다. 그러나 눈은 뇌 속의 영혼을 나타내기에 진실만을 나타낸다.
우리는 가식적 웃음을 많이 본다. 정치인, 안내양 등 서비스 계통의 직업인들이 만들어내는 거짓 웃음은 금방 알아챌 수가 있다. 입은 웃지만 눈은 무표정한 얼굴이다. 그러나 그녀의 입과 눈은 소통과 공감에 진실성이 엿보여 더욱 국민들의 환호를 받는 것 같다.
스스럼없이 다가가 살을 맞대는 친화력이야말로 타고난 천성으로 보인다. 현재 여러 가지 국내외 어려움에 처한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어울 리는 영부인상이다. 영부인으로 불리기보다는 여사로 불리는 편이 더 어울린다.
필자(김우일 전 대우그룹구조조정본부장)는 1950년대 우리나라 영부인이었던 사람을 떠올리고는 정말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1945년 해방 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영부인은 오스트 리아인 프란체스카 여사였다. 해외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이승만 박사와 1934년 뉴욕에서 결혼하였다.
신랑은 59세, 신부는 34세였다. 일제하에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명망 높은 이승만 박사와 외국인 여자와의 결혼에 가족과 한국인 독립동지 및 동포들이 적극 반대했다.
나라를 되찾아야 하는 민족 자긍심이 훼손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어도 모르고 한국의 문화와 관습과 시정물가도 몰랐던 그녀는 대한민국 영부인이라기보다는 대통령의 영문비서역할과 연로한 남편을 보호하는 역할에 불과했다.
당시 국민들은 오스트레일리아로 오인하여 호주댁이라 불렀다. 한국어를 배우려는 의지도 없이 영어를 잘하는 당시 이기붕 부통령의 부인인 박마리아하고만 대화를 나누고 자연스레 대통령의 귀와 입을 틀어막았던 상황이 돼버렸다.
이로 인해 박마리아 장남인 이강석은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입적, 이기붕 일가의 권세는 하늘 끝에 닿았다. 외부와 단절된 대통령은 지도력을 잃고 3.15 부정선거에 이어 터진 4.19혁명으로 하와이로 망명하여 1965년 하와이 요양원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고 가족장으로 영결식이 치러졌다.
당시 육사를 졸업하고 소위계급장을 단 장남 이강석은 권총으로 전 가족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처참한 이기붕 일가의 비극이 필자에게 더욱 가깝게 느껴진 것은 이강석이 필자의 출신고교인 서울고의 14년 선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비극은 국민들과 전혀 소통과 공감을 하지 못하고 남편만 폐쇄적으로 보호한 영부인의 잘못도 간과하기 어렵다. 비록 오스트리아인이지만 한국어와 문화를 배우고 진심으로 국민들과 폭넓게 소통하며 넓은 안목으로 대통령을 내조했다면 대통령과 부통령의 폐쇄적인 욕망을 다스릴 수가 있었을 것이다.
70년 만에 근엄하게 군림하던 초대 오스트리아인 영부인의 모습이 국민들과 함께 웃고 우는 19대 김정숙 여사로 모습을 달리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남자는 세상을 지배하고 여자는 그 남자를 지배한다’는 얘기가 남자를 조종하여 남자의 권력을 이용하는 여자가 아니라 여자의 지혜로운 내조로 남자가 권력을 지혜롭게 국민들만을 위한 보도로 쓰이길 바랄뿐이다.
[프로필]김 우 일
• 현) 대우김우일경영연구원 대표/대우 M&A 대표
• 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장
• 대우그룹 기획조정실 경영관리팀 이사
• 인천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박사
• 서울고등학교, 연세대 법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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