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세금융신문=이명구 관세청장) 나는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범죄도시는 유난히 오래 마음에 남은 작품이다. 화려한 액션이나 통쾌한 결말 때문만은 아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오히려 억울함이 잔뜩 밴 한마디였다.
“아니, 갑자기 찾아와 가지고 또 못살게 구네!” 진지한 상황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이 대사는 묘한 웃음을 남긴다. 웃고 나면, 문득 생각이 따라온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도 이유 없이 찾아온 일들, 설명할 틈도 없이 억울해지는 순간들을 숱하게 마주한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사건이나 사람들은, 시간이 흐른 뒤 나를 단련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나를 낮추고 단단하게 만든 시간들이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오늘의 나를 만든 큰 그림 속 한 조각이었고, 어쩌면 다른 얼굴을 한 귀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한 기자가 물었다. “힘들어하는 직원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 나는 잠시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포기는 김장할 때 배추 개수 셀 때나 쓰는 말입니다.” 억울함 앞에 선 사람에게는 대개 두 갈래 길이 보인다.
복수이거나, 포기이거나. 하지만 어느 쪽도 마음을 편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복수는 또 다른 갈등을 낳고, 포기는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올드보이처럼 복수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이 있지만, 나는 그런 결말에 쉽게 마음이 가지 않는다. 복수는 통쾌할지 몰라도, 결국 또 다른 사회적 상처를 남긴다는 생각 때문이다.
예전에 한 직원이 보낸 문자 한 통이 기억에 남는다. “사람이 싫어질 때마다 청장님 말씀을 떠올리며 더 잘해주려고 애썼더니, 어느 순간 미움이 사라지고 연민이 생기더군요. 스스로도 신기했습니다.”
억울함은 피할 수 없지만, 그것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선택의 문제다. 어떤 이는 그 기억을 상처로 간직하고, 어떤 이는 스스로를 단련하는 연단으로 삼는다. 결국 그 갈림길에 서는 순간, 방향키를 쥐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다.
이 선택의 문제는 개인의 삶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행정 역시 마찬가지다. 제도는 억울함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억울함을 풀어주는 통로가 될 수도 있다. 그 갈림길에서 국가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는, 국민에게 오래 기억으로 남는다.
조세심판원에 처음 부임했을 때가 떠오른다. 합동회의에서 나는 이렇게 다짐했다.
“억울한 납세자의 신속한 권리구제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다짐은 말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며 검증받았다. 처분청의 논리와 납세자의 항변을 함께 들으며 수많은 사건을 마주했다. 국고주의에 치우친 무리한 과세가 낳는 폐해, 실질과세 원칙의 현실적 한계, 감면과 사후추징이 충돌하는 지점, 가산세 감면 기준의 모호함, 그리고 법의 빈틈에서 생겨나는 억울함과 교묘한 회피까지.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현장에서 몸으로 익혔다.
심판 과정에서의 오류는 크게 두 가지다. 인용되어야 할 사건이 기각될 때, 억울한 납세자가 생긴다. 반대로 기각되어야 할 사건이 인용될 때는 조세일실이 발생하고, 잘못된 선례가 조세 정의를 흔들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줄여 나가는 일, 그것이 불복 업무를 맡은 공직자의 숙명 같은 책무라고 믿어왔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오늘날 관세청 납세자보호제도로 이어진다. 관세행정은 본질적으로 강한 권한을 전제로 한다.
통관의 문턱에서, 조사와 과세의 과정에서, 국민은 언제든 ‘설명할 틈도 없이’ 억울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그렇기에 납세자보호제도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사전적으로는 납세자의 권리를 안내하고, 절차적으로는 불복과 구제를 연결하며, 실질적으로는 행정의 속도보다 공정을 우선하도록 만드는 안전장치다.
납세자보호관 제도, 권리구제 요청, 고충민원 처리, 세정조치 사전검토와 같은 장치들은 단순한 제도 목록이 아니다. 그것은 “억울함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국가가 인정하는 방식이며, “그 억울함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얼마 전 서울세관 수출입 현장 직원들과 함께 슈가를 관람했다. 희귀질병 환우와 가족들의 실제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었다.
1형 당뇨를 앓는 어린 아들을 위해, 어머니가 연속혈당 측정기를 국제우편으로 들여오다 제도의 벽에 부딪힌 이야기다. 2017년 당시, 해당 의료기기는 수입승인이 필요한 물품이었다. 승인이나 신고 없이 반입되면서 법 위반으로 고발·송치 되었지만, 영리 목적이 아닌 치료 목적이라는 점이 고려되어 검찰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영화는 법의 판단보다도, 제도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가족의 마음을 조용히 비춘다.
이 지점에서 납세자보호제도의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법은 필요하지만, 법만으로는 부족하다. 제도는 공정해야 하지만, 제도 역시 사람의 삶 위에서 작동해야 한다.
지금 관세청은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에 두면서도,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의료기기에 대해서는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제도를 보완해 가고 있다.
개인 사용 목적이 합리적으로 인정되는 경우 해외직구 통관을 허용하고, 희귀 질병 환우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치료 과정에서 겪는 불편을 줄이기 위해 관계 기관과 협력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규제 완화가 아니라, 억울함을 예방하는 행정이다. 문제가 발생한 뒤 구제하는 것을 넘어, 애초에 억울함이 생기지 않도록 제도를 설계하는 방향이다.
영화 속 이야기는 한 가족의 사연으로 끝나지 않는다. 제도의 문턱 앞에서 망설이는 많은 사람들의 현실을 비춘다. 법과 제도는 공정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지만, 그 하나하나의 적용이 결국 국민의 삶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억울함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개인의 삶에서도, 행정의 현장에서도 이 질문은 늘 반복된다. 관세청 납세자보호제도는 그 질문 앞에서 국가가 내놓은 하나의 대답이다.
그리고 K-관세행정은 앞으로도 공감과 책임이라는 두 축 위에서,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국민의 불편과 억울함을 줄이는 길을 차분히 찾아갈 것이다.
[프로필] ▲1969년생 ▲경남 밀양고 ▲서울대 경영학과 ▲서울대 행정학 석사 ▲영국 버밍엄대 경제학 박사 ▲행시 36회 ▲관세청 서울세관장 ▲부산 세관장 ▲국무조정실 조세심판원 상임심판관 ▲관세청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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