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안종명 기자) 우리나라 수출이 반도체와 대(對)중국 수출의 동반 폭증에 힘입어 역대급 실적을 갈아치우고 있다. 생성형 AI 확산과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로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본격화된 가운데, 중동에서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을 둘러싼 전쟁 위기까지 고조된 상황에서도 한국 수출이 뚜렷한 회복세를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관세청이 23일 발표한 ‘2026년 3월 1일~20일 수출입 현황(잠정치)’에 따르면, 이 기간 수출액은 533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50.4% 증가했다.
같은 기간 수입은 19.7% 늘어난 412억 달러로 집계됐고, 무역수지는 121억 3,000만 달러의 대규모 흑자를 기록했다. 조업일수는 15.0일로 전년 동기(14.0일)보다 1.0일 늘었지만, 이를 감안한 일평균 수출액은 35억 5,000만 달러로 전년(25억 3,000만 달러) 대비 40.4% 급증해 단순 조업일 효과를 넘어선 수출 회복세를 보여줬다.
이번 수출 호조의 일등 공신은 단연 반도체다. 반도체 수출액은 186억 5,700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163.9% 폭증하며 역대 최대 실적을 경신했다.
전체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도 35.0%로 치솟아, 1년 전 20.0%에서 15.1%포인트나 상승했다. 수출액 ‘3달러 중 1달러 이상이 반도체’일 정도로 반도체 의존도가 다시 크게 높아진 셈이다.
반도체 수출이 이처럼 급증한 배경에는 전 세계적인 AI 인프라 투자 붐이 자리하고 있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진단이다.
생성형 AI와 초거대 언어모델 확산으로 글로벌 빅테크와 데이터센터 사업자들이 AI 서버와 GPU 클러스터를 대규모로 구축하면서, 서버용 D램과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고성능 메모리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AI 서버 한 대에 탑재되는 메모리 용량이 기존 일반 서버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같은 설비 투자에도 반도체 칩 수요가 과거보다 훨씬 많이 발생하는 구조다.
2024년 가격 급락과 재고 조정으로 부진을 겪었던 메모리 업황이 2025년부터 본격적인 반등 국면에 들어선 점도 수출 급증을 뒷받침했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이 2026년 두 자릿수 후반의 성장률을 기록할 것이란 전망 속에, 특히 메모리 분야는 단가와 물량이 동시에 늘어나는 ‘슈퍼사이클’ 구간에 진입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여기에 스마트폰·PC 중심이던 수요가 HBM·서버 D램·데이터센터용 SSD 등 고부가 제품으로 이동하면서, 같은 비트(용량)를 팔아도 수출 금액이 더 크게 늘어나는 제품 믹스 개선 효과까지 더해졌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주요 업체들이 침체기에도 차세대 공정과 HBM 라인 증설에 공격적으로 투자해 온 점도 주목된다.
업황이 바닥을 찍은 시기에 선제적으로 생산 능력을 확보해 둔 덕분에, AI 인프라 수요가 본격적으로 터져 나온 2025~2026년에 글로벌 수요를 신속하게 흡수할 수 있는 공급 여력을 갖춘 것이다. 기술 경쟁력이 높은 HBM과 서버용 메모리를 중심으로 한국 업체들이 시장을 주도하면서, 세계 AI 붐의 과실이 한국 수출 실적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품목별로는 반도체 외에도 컴퓨터 주변기기 수출이 22억 2,900만 달러로 269.4% 증가하며 AI·데이터센터 관련 수요 확산의 수혜를 함께 누렸다.
석유제품(31억 5,200만 달러, 49.0% 증가), 철강제품(27억 6,600만 달러, 21.6% 증가), 승용차(36억 6,300만 달러, 11.1% 증가) 등도 고른 증가세를 보였다.
반면 선박 수출은 21억 4,000만 달러로 3.9% 감소해 다소 부진했다.
수출 상대국별로는 중국과 미국이 ‘쌍끌이’ 역할을 했다. 대중국 수출은 107억 7,300만 달러로 전년 동기보다 69.0% 늘며 최대 수출국 지위를 더욱 공고히 했다.
중국 내 데이터센터·클라우드 투자가 확대되고 전기차·산업용 전자 등 첨단 제조업이 회복 조짐을 보이면서, 한국산 메모리를 비롯한 중간재 수요가 크게 늘어난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 수출도 105억 8,300만 달러로 57.8% 증가해, 빅테크의 AI 투자와 자동차·기계류 수요에 힘입어 견조한 흐름을 이어갔다.
베트남(47억 3,400만 달러, 46.4% 증가), 유럽연합(44억 9,500만 달러, 6.6% 증가), 홍콩(35억 달러, 188.0% 증가), 대만(33억 3,000만 달러, 80.0% 증가) 등 주요 거점국 수출도 크게 늘어 아시아를 중심으로 수출 활황세가 뚜렷했다. 싱가포르로의 수출만 11억 달러로 8.5% 감소했다.
한편, 중동에서는 이란과 이스라엘, 미국을 둘러싼 군사적 충돌과 확전 우려로 국제 유가와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커지고 있다.
산유국인 이란이 관여된 분쟁이 장기화할 경우 원유·가스 공급 차질과 해상 물류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어, 한국 수출에도 중장기적인 부담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만 이번 3월 초 수출 통계에는 아직 본격적인 여파가 반영되기 전으로, 글로벌 지정학 리스크 확대 속에서도 반도체·첨단 제조업 중심의 한국 수출이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다.
수입 측면에서는 원유(27.8% 증가), 반도체(34.3% 증가), 반도체 제조장비(10.4% 증가) 등의 수입이 늘었다. 반도체 수출 확대에 대응하기 위한 원재료·장비 도입이 활발해진 것으로 해석된다. 반면 가스 수입은 6.4% 줄어 에너지 수입 구조에 일부 변화가 나타났다.
관세청 관계자는 “본 통계는 20일까지의 단기성 잠정 통계로 조업일수 변화 등에 따라 변동성이 있을 수 있다”면서도 “AI 인프라 확산에 따른 반도체 슈퍼사이클과 대중국·대미국 교역 회복이 맞물리며 수출 실적 개선을 이끌고 있다”고 말했다.
산업통상부 관계자는 “중동 지역을 중심으로 지정학적 긴장이 높아지고 있어 에너지 가격과 물류비 상승 가능성을 면밀히 주시할 필요가 있다”며 “반도체 편중 심화에 대한 리스크 관리와 함께, 외부 충격에 견딜 수 있는 수출 구조 다변화가 중요해지는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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