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은행검사역) 1997년 11월 21일 밤 10시 20분 임창렬 부총리가 IMF구제금융 지원을 공식요청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로부터 IMF의 관리체제에 우리나라 경제를 맡기게 되었다. IMF의 요구조건은 크게 거시경제의 긴축운용, 금융·자본시장을 비롯한 대외개방 확대, 금융개혁 및 부실금융기관정리, 대기업집단의 기업지배구조 개선 및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 네 가지로 대별된다.
우리나라도 외환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IMF구제금융 지원을 공식 요청했다. 그리고 1997년 12월 5일 우리 정부와 IMF가 최종합의문을 발표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외환위기 발생원인을 돌아보자.
① 국내기업들은 1990년대 들어 뱅크론 도입이 점증하고 주식시장이 개방되고 나아가 해외채권발행이 허용됨에 따라 외화차입을 크게 늘리었다. ② 대외교역조건의 악화로 인한 경기침체도 경제위기의 주요인으로 작용하였다. ③ 금융시스템의 취약도 외환위기를 불러온 주인으로 지적된다. ④ 금융에 대한 부당한 외부간섭도 금융위기를 발생시킨 주요인의 하나이다. ⑤ 외환능력의 부족을 들 수 있다.
IMF의 금융지원 조건은 ① 거시경제의 긴축운용이다. GDP성장률을 1998년 중 3%, 1999년에는 회복세를 유지하고, 소비자 물가상승률 5% 이내, 경상수지적자는 1998~1999년간 GDP의 1% 이내로 유지하기로 했다.
② 재정은 균형 내지 소폭 흑자운용이다. 즉, 금융구조개혁을 위한 재원조달을 위해 세수증대와 세출감축을 하며, 통화는 원화절하에 따른 물가상승압력을 흡수하기 위해 긴축기조로 운용하고, 시중금리를 현행 14~16%보다 일시적으로 상승하도록 용인하였다.
③ 금융. 자본시장을 위시한 대외개방확대이다. 외국금융기관이 국내 금융 조기 진입토록 했고, 외국인도 내국인과 동일한 조건으로 전 금융기관에 대해 50%의 주식취득을 통해 우호적인 인수·합병이 가능하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외국금융기관의 국내현지법인 설립을 1998년 이후에서 1998년 중반으로 앞당긴다는 내용이다. 1999년 초부터 외국인이 100% 소유한 종금사의 설립을 허용하며, 1998년 내 외국인의 주식취득한도를 50%로 제고하며, 1998년 중 55%로 확대한다. 개인별 한도도 50%로 상향조정하기로 한다. 특히 부실기업 정리시 외국인에 의한 인수합병을 허용한다. 즉, 단기 금융상품에 대한 외국인 투자를 단계적으로 허용한다.
④ 금융개혁 및 부실금융기관의 정리이다. 금융개혁법안을 조기 처리하여,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제고하고 통화관리목표를 물가안정으로 명확히 한다. 독립적인 통합금융감독기구를 설립하고 금융기관에 대한 강력한 권한을 부여한다. 부실금융기관의 구조조정과 자본확충을 도모하고 금융기관 퇴출제도 정립하기로 했다.
발표 당시 9개 종금사에 대한 영업정지조치를 이미 실시하였다. 부실채권정리기금의 확대를 통한 부실채권의 조기정리, 1999년 3월 이전 2개 정도의 부실은행정리문제 확정,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금융기관 건전성 감독기준 등을 마련하기로 했다. 은행은 바젤협약기준을 충족하기 위한 개선계획 수립, 연결재무제표와 외부감사인에 의한 기업재무제표 작성의무화, 금융기관 회계와 공시제도 강화, 대형금융기관의 회계감사는 국제적인 회계법인이 실시하기로 했다.
⑤ 산업구조조정촉진 및 대기업집단의 기업지배구조개선이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제고하되 고용보험제도의 기능강화로 역기능을 보완한다.
회사정리법 파산법 화의법 등의 기업정리관계법을 정리, 채권단의 권리를 강화하여 회사정리의 신속·공평성 제고, 국제기준의 회계제도 도입 및 재무제표의 투명성제고, 계열기업군의 결합재무제표 도입 및 상호보증제도 점증적 철폐, 공시제도와 외부감사제도를 강화, 금융실명제의 기본골격은 유지하면서 부분 보완한다는 내용이다.
12월 5일 오전 10시 재정경제원 대회의실. 워싱턴 IMF와 동시에 합의의향서가 발표됐다. 잠시 혼선이 있었다. 1998년 경제성장률 전망치가 정부발표문에는 3%. IMF 보도자료에는 2.5%. ‘문서상 합의한 것은 약(About) 3%다’ 임 부총리의 단호한 답변으로 곧 봉합됐다. 이날 밤 10시 재정경제원은 각 언론사에 IMF 합의의향서 전문을 예고 없이 전달했다.
‘어려움에 처해 있는 2개 시중은행은 2개월 이내에 자구계획을 제출해야 한다. 만약 감독기관의 장이 4개월 내에 희생이 성공적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이들 은행도 폐쇄된다’, ‘은행에 대해서는 폐쇄합의가 없었다’는 12시간 전 임부총리의 설명과는 분명히 다른 내용이었다.
“합의서는 원래 공개하지 않게 되어 있다. 그런데 오후 6시 워싱턴에서 연락이 왔다. IMF 이사회가 공개했으면 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약속한 터였고, 합의이행의지를 보이자는 차원에서 수용하기로 했다.” 재정원 관계국장의 증언이다. 그러나 합의의향서 공개가 금융공황을 자초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다음날 6일 임 부총리가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해당은행의 공신력 유지와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IMF 측과 공개하지 않기로 합의했었다.” “2개 은행은 증자 등을 통해 폐쇄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임 부총리의 확언에도 불구하고 억측과 오해가 꼬리를 물었다.
예고 없이 IMF를 당한데다 협상도 끌려 다녔다는 인상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굴욕적인 협상에 따른 책임을 피하기 위해 꼬리를 감춘 것이 아니냐고 했다. 예상했던 대로, 우선 금융시장이 걷잡을 수 없는 공황상태로 빠져들었다. 9개 종금사의 급작스런 2일 간의 영업정지로 대부분의 종금사들이 부도위기에 몰리자 은행권에서는 콜자금 공급을 꺼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에 더하여 은행 폐쇄의 가능성까지 거론되자 몸을 사렸다.
“이제 누구의 말도 믿을 수 없다. 종금사들도 생존을 위해 무차별적인 여신회수에 나섰다. 그러자 기업들은 도산하기 시작했고 악순환이 야기됐다. 이날 재계 서열 12위인 한라그룹이 무너졌다.”
“당시 IMF 합의사항을 충실히 이행해 대외신인도를 회복하는 게 급선무였다. 당연히 협상내용을 설명하며 국민들의 이해를 구해야 했다. 아니면 전략적인 접근을 했어야 했다. 금융시장안정도 중요했다. 솔직히 장관들도 협상내용을 몰라 거들지 못했다.”
모 정부고위층의 회고이다. 문책론에 시달리고 있던 관계자들은 피가 마르고 살이 타들어 갔다. 이후 거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대책회의가 열렸다. 12월 7일 밤 10시 서울 리츠칼튼호텔에는 임창렬 부총리, 이경식 한은 총재, 김영섭 청와대 경제수석, 이수휴(李秀烋) 은행감독원장, 제일·서울은행장이 모였다. 회의결과는 이튿날 아침 35개 은행장에 그대로 전달됐다. “9개 종금사 외에 추가로 영업 정지될 금융기관은 현재로선 없습니다. 종금사에 콜자금을 지원해 주십시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불안감은 시장에 그대로 반영됐다. 3년만기 회사채 수익률이 약 16년만의 최고치인 연 22.95%까지 치솟았다. 종금사들의 외환난까지 겹쳤다. 환율은 상승제한폭 1,342원40전까지 오른 뒤 거래가 중단됐다.
1997년 12월 9일 오전 제일·서울은행에 대한 정부출자방침이 발표됐다. 오후 11시 역삼동에 있는 한은 강남지점에는 임창렬 부총리, 김영섭 경제수석, 이경식 한은 총재 등 빅3과 윤증현(尹增鉉) 재경원금융정책실장, 이수휴 은행감독원장, 이근영(李瑾榮) 신용관리기금 이사장, 한은의 김원태(金元泰) 이사, 박철(朴哲) 자금부장 등이 머리를 맞댔다.
“외환 쪽도 어려운데 종금사를 어떻게 하죠.”
“파이(외한)를 크게 할 수 없다면 파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금융기관)의 수를 줄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은 5개 종금사의 추가 영업정지, 다음날 이 내용이 발표됐다. 상황은 정부의 기대와 너무 멀어져 갔다. 환난의 주범의 하나로 종금사를 지목하여 14개 종합금융회사를 업무정지시키고, 다음해 1월에는 10개 종합금융회사를 폐쇄시킨데 대해서 오용석 종금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어처구니없는 말이라고 반론한다.
“종금사 전체의 해외차입규모가 총외채 1,530억 달러의 4%대인 69억 달러대에 불과하며, 10개 폐쇄 종금사의 경우 1개 종금사당 평균 1천8백만 달러 정도로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이에 비해 은행권의 해외차입액은 8백억 달러의 거액에 달하는 실정이다. 특히 1997년 8월 이후 은행 등의 해외채무 만기연장이 기아사태등 누적된 부실로 더 이상 곤란해진 것이다.”
그는 금융정책당국에 화살을 돌렸다.
“외환 금융위기를 초래한 주범은 재정경제원과 한국은행 등 무능한 외환당국 자신이다. 한은 보유 외화자산 중 4백억 달러 상당의 막대한 금액을 국내은행 본점에 수지보전용으로 퍼부었으니 애당초 외환관리정책은 부재상태였다. 급기야는 2백20억 달러에 불과한 가용외환보유액 중 150억 달러를 무모하게 900원대 환율방어를 위해 탕진했던 것이다.”
1997년 12월 12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지 만 1년이 되는 날이다. 동서증권이 법정관리를 시작한 가운데 한은이 은행, 증권, 투신, 종금사에 11조3,000억 원을 긴급 지원했다. 환율은 1,700원선을 넘어섰고, 주가는 350선에서 턱걸이를 했다. 달러는 들어오지 않았고, 상환연장(Roll-over)율도 호전 기미가 없었다. 정부정책에 대한 비난이 안팎에서 쏟아졌다.
“부실은행에 대한 출자 등은 IMF 합의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외신의 평이다. 달러를 빨리 들여오려면 IMF와의 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권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이미 탈당과 동시에 중립을 선언했었다.
한나라당은 여당이 아니라 다수당이었다. 그래서 당정협의조차 열지 못했다. 정치권은 ‘대권’이 급했다. 경제위기에 공약을 묵혀둘 수밖에 없었던 터에 ‘IMF 이면합의 의혹’은 좋은 이슈였다.
한나라당, 국민회의, 국민신당은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IMF 권고가 가혹하다는 여론 몰이를 했고 재협상론으로 진전시켰다. 1997년 12월 11일 미국의 신용평가기관 무디스는 한국의 신용평가등급을 準정크펀드 수준인 Baa2로 떨어뜨렸다. 스탠더드 엔드 푸어스(S&P)사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 추가 자금을 지원해야 할지, 아니면 채무불이행(Default)을 허용한 뒤 사태해결에 주력해야 할지 양자 택일을 해야 한다.”
파인낸셜타임스 12월 12일자의 내용이다. 디폴트는 곧 국가부도인 모라토리움. 재협상론을 제기한 김대중 후보 측은 당황했다.
대선 5일 전인 12월 13일 오전 9시. 청와대 본관 2층 백악실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원탁 중앙에 자리 잡았고 왼쪽에는 김대중(金大中) 후보, 오른쪽에는 이회창(李會昌) 후보, 이인제(李仁濟) 후보가 나란히 앉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세계 여론이 한국을 믿을 수 없다며 국제사회에서 약속을 안 지키는 나라라고 보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회창 후보는 “김 후보가 재협상을 주장하는 바람에 산업은행이 해외기채를 못하는 등의 사태가 일어났다.”고 했다.
김대중 후보는 “추가협상을 하자는 것이지 합의를 전면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이인제 후보가 “임 부총리의 재협상 발언 때문에 국가신인도가 떨어진 것입니다.”라며 불을 껐다.
1시간 10분 만에 IMF 합의사항을 준수하겠다는 공동발표문이 나갔다. 재협상론이 사태의 주범이었을까.
“대선으로 인한 대통령의 리더쉽 부재, 그리고 정부정책에 대한 불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협상 1개월 전 정부는 ‘IMF처방이 동남아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제프리 삭스 미국 하버드대 교수의 분석 등을 이용해 IMF 말은 꺼내지 못하게 하였다. 정치권은 선거를 의식, 지나치게 공론화한 것도 문제였다.” 한 금융인의 말이다. 벼랑 끝까지 갔던 재협상론은 가까스로 제동이 걸렸다.
그러면 IMF 프로그램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지금시점에서 조감해 보자.
우리 정부가 IMF의 구제금융지원과 수반되는 요구조건을 승낙함에 따라 수년간 국내거시경제의 운용과 미시적 시장조직의 개혁프로그램은 IMF와의 긴밀한 협조 하에 수행될 수밖에 없었다. 프로그램 중 상당 부분은 우리 경제가 그동안 절실히 필요로 해왔으나 정치적인 요인과 각종이익단체의 반발을 비롯한 여러 이유로 인해 실천하지 못했던 개선사항을 담고 있다.
그러나 몇몇 조치들은 국내 경제에 상당한 혼란을 야기하였다.
① 금융기관들로 하여금 급박한 시한 내에 국제기준에 따른 충당금 적립과 자기자본비율달성을 요구함에 따라 신용공황을 발생시켰다. 기업의 대거 도산과 실물경제를 악화시켰고 금융기관들의 부실채권급증으로 연결되는 악순환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② 신용공황과 함께 기업의 급격한 구조조정은 불가피하게 대량실업사태를 초래하였다.
IMF관리체제 하에서 계속적인 기업구조조정으로 인하여 실업자를 양산하였다.
물론 IMF관리체제 초두부터 실업문제는 큰 과제로 대두되었었다. 12월 15일 하오 8시. 빅 3과 정덕구(鄭德龜) 재경원2차관보, 김영태(金英泰) 산업은행 총재, 이관우(李寬雨) 한일은행이 모였다.
“외환시장이 비정상적이다”
“IMF도 하루 변동폭철폐를 요구해 왔다”
“환율제한을 트자.”
그날 밤 10시 30분 재경원은 환율제한폭을 없애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다음날 환율은 100원 가량 떨어졌고 주가는 1주일 만에 400선을 회복했다. 그런데 외국투자가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대선이 끝날 때까지 정부의 대응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모든 것은 대선 후로 미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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