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비화 ⑪] 이상한 한국은행 독립 1950~1998년

2017.05.10 15:25:11

1950년 은행법 제정 이후 가장 긴급한 금융재정상의 과제는 은행 귀속주를 민간에 불하하여 금융의 민주화와 은행의 건전화라는 법정신 구현을 위한 토대를 만드는 일이었다.


1954년 7월 16일 국회 본회의에서 자유당 정해영 의원의 질의내용
“시중은행의 불하문제는 벌써 2~3년 전부터 논의되고 있는 문제인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실현되지 못한 이유가 어디 있는지 알고자 합니다. 총리의 시정연설에도 이 문제를 적극추진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정부로서는 언제까지 실시할 것인가.”


정부의 ‘귀속주 불하요강’ 발표


이에 따라 정부는 1954년 10월 14일 ‘귀속주 불하요강’을 발표했는데 관재청, 재무부 및 한국은행으로 구성된 불하추진위원회에서 작성한 것이다.



불하원칙은 연고와 우선권을 일체 배제한 공개경쟁매각, 독점방지를 위하여 불하단위 주식을 일정한 회수로 분할응찰하고, 불하대금의 일시지급, 불하주 낙찰가격은 정부사정가격 이상으로 하며, 2년간 명의개서를 금지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정부사정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고 입찰할 수 있는 횟수와 주식양도방식이 까다로워 입찰희망자가 거의 없었다.


1955년 3월 17일 국회 본회의 김도연(金度演) 의원의 질의.
“반년이 넘는 오늘날까지 아직도 은행 귀속주는 불하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각 은행의 귀속주가 1차, 2차 다 유찰되었습니다. 그러면 각 귀속주 불하가 유찰되는 원인을 자세히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문에 발표한 것에 의지할 것 같으면 정부의 사정가격이 너무 비싸기 때문에 결국 2차례 1차, 2차가 다 유찰되었다는 것이 발표되었습니다. 저축은행주로 말씀할 것 같으면 정부의 사정가격이 1주당 1만3,500환으로 결정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에 있어서는 가격이 3만2,000환으로 되었습니다. 약 61%라는 사정가격이 더 오르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주 조흥은행주로 말씀하더라도 제1차 사정가격보다 제2차 사정가격이 41%로 등귀되었습니다. 조흥은행에 있어서는 제3차 경쟁입찰에 있어서 일부가 낙찰되었지만 역시 낙찰 받은 사람이 그것을 포기하였기 때문에 실제로 매도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정부는 무슨 근거로 어디다 기준을 두어 이와 같이 주식의 사정가격을 높이 하는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저축은행으로 말씀하면 일반시장에서는 매매가 아니라 호가가 7,500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사정가격이 2만2,000환으로 되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이것은 다만 귀속주를 불하한다는 말뿐이고 실제로는 도저히 성립될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이 귀속주가 불하되지 않으면 금융의 민주화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모든 관료금융이라든지 소위 특명금융이라는 것은 여전히 계속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1954년 10월 29일 이래 여섯 차례의 공매입찰이 모두 유찰되었다. 은행주 불하의 시급성에 비추어 불하원칙의 완화여론이 높아졌다.


당시의 서울신문 사설이다.


“은행이 1개 재벌에 지배되는 독점자본에 의거하거나 민간대중에 분산된 소액집합자본에 의거하거나 그 경영이 충실한 자기자본력을 토대로 움직일 때는 문제가 없다.


은행경영을 독점하고자 하는 재벌의 의도가 불순할 때 불건전한 신용업무임을 인정하면서도 대중의 수신이 집결되리라 보는가.


은행법에는 금융업무에 엄격한 법정주의가 채택되고 있다. 은행주 독점으로 경영을 지배하겠다면 확충될 신주마저 독점해야 한다. 신주를 끝까지 독점할 수 있을 만한 자본력을 갖춘 재벌들이 얼마나 될 것인지 의문이다. 그러한 실력가가 있다면 실력에 기준해서 은행경영은 건실해질 것임을 오히려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은행원을 중심으로 한 협동조합의 경영방식까지 검토했을 정도였는데, 은행을 소수 독점자본의 지배와 모리배의 횡포에서 보호하고 금융민주화의 이상을 실현한다는 당초의 취지에서 방향을 선회하게 되었다.
불하가 공전을 거듭하자 결국 정부는 1955년 7월 불하방식을 분할매각방식으로 전환하고 입찰계좌수 제한을 철폐하고 독점재벌의 은행지배 물꼬를 터놓았다.


겉으로 은행주 불하의 명분은 금융기관 민영화로 금융민주화를 구현한다는 것을 내걸었으나 실제 속셈은 자유당 정권이 친여재벌들로 하여금 은행을 주축으로 한 콘체른을 형성케 하여 영구집권을 획책하는 사회경제적 세력기반으로 이용하려 했다.


금융독점과 정권과의 유착을 확고히 할 길이 트이자 유력 재벌이 몰려들었다. 1957년 8월의 은행별 입찰은 만일의 유찰을 대비한 당국의 종용이 아니더라도 은행에 군침을 흘리는 재벌이 많았다.


입찰결과 조흥은행은 민덕기(閔德基)씨 외 몇 사람, 저축은행은 윤석준(尹奭駿)씨, 상업은행은 진영득(陳永得)씨, 그리고 흥업은행은 이병철(李秉哲)씨 등에게 각각 최고가 낙찰을 보였다. 여기서 저축은행은 현 한국스탠다드 차타드은행이며, 상업은행과 흥업은행은 우리은행의 전신이다.


그러나 공매결과와는 무관하게 정권의 은행불하의 속셈대로 권력자들이 의도한 재벌에게 은행을 넘겨주려고 했다.


1957년 1월 22일 국회 23회 임시본회의 8차에서 질의에 나선 정태성(鄭太成)의원.
“귀속주 제7회 불하가 결정된지 벌써 10개월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번에 흥업은행과 조흥은행에 대해서 그 최고낙찰자에게 낙찰계약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우리나라 금융의 민주화를 위해서 경하하여 마지않습니다.


그러나 상업은행과 저축은행에 대해서는 우리 국회의 결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회의 결의를 무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실격조건이 법에도 부당하다고 인정되었기 때문에 질의를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당초 상업은행의 최고낙찰자는 진영득(陳永得)씨였다. 그런데 재무부는 진영득씨에 대해서 실격조건으로써 두 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운영능력이 부족이고, 다른 하나는 자력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이 내용은 이렇다. 상업은행은 합동증권(合同證券) 사장 진영득을 대타로 내세운 기존 개인 대주주 이한원(李漢垣)씨가 경영권을 쥐었던 것이다.


1957년 4월의 입찰에서 이한원씨는 진영득씨를 표면적으로 내세워 최고 낙찰을 얻었다. 이한원씨는 동아상사, 국제손해보험, 전남방직, 대한제분 등을 거느린 재계실력자이다. 그런데 그에게 도전자가 나타났다.


대한산업 사장 설경동(薛卿東)씨였다. 설경동씨야말로 자유당 재정부장을 지낸 거물로 원외 중진이자 굴지의 대재벌인 실력자였다.


그래서 정부는 최고 낙찰자 진영득씨의 재력부족을 들어 낙찰권을 인정치 않고 설경동씨에게 매수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인태식(印泰植) 재무장관이 물러나고 김현철(金顯哲) 전장관이 재취임 하면서 낙찰권이 진영득씨에게로 돌아오고, 공매결과대로 이한원씨가 최대주주가 되었다.


그는 대주주가 되자마자 은행경영진에게 모든 은행 취급 화재보험을 계열사인 국제손보에 계약토록 압력을 가했다 해서 화재보험업계에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한원씨는 상업은행의 독점적 지배권을 장악하지 못했다. 조흥은행 소유 상호주가 33%나 됐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흥업은행 대주주 이병철씨가 경영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저축은행 불하


한편 온갖 의혹과 비호가 춤추었던 귀속은행주 불하에서 가장 말썽이 많았던 것이 저축은행 불하였다. 저축은행의 입찰에는 윤석준 조선제분(朝鮮製粉) 외에 설경동 대한산업(大韓産業), 강일매(姜一邁) 조선방직(朝鮮紡織), 정재호(鄭載護)씨 등이 참여해 윤석준씨가 주당 3만3,232환의 최고가를 써서 낙찰됐다.


그러나 최고낙찰자인 윤석준씨는 1년 넘게 매수계약을 체결하지 못하고 시간을 천연시키고 있었다.


표면적 이유는 30억환에 이르는 자금부담 때문이라 했지만 진짜 원인은 4위 응찰자인 정재호에게 넘기려는 공작 때문이었다.


당국이 윤석준씨에게 저축은행을 포기하라는 압력을 넣은 명분은 이미 조선제분이라는 귀속재산을 갖고 있는 터에 한 개인이 두 개 이상의 귀속재산을 가지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윤석준씨의 저축은행 장악을 막으려는 정치권력의 압력은 집요했다. 저축은행이 갖고 있는 도금고예금을 신설 농업은행에 이관한다는 계획도 동원되었다.


그런데 인태식 재무장관이 김현철 장관으로 바뀌었다. 윤석준씨가 기대는 줄이었든 김 장관은 상업은행을 진영득씨에게 돌려준 것처럼 윤석준씨에게 낙찰권을 부여한다고 통고했다.


권력의 압력은 김현철 장관에게도 가해졌고, “만일 윤석중이 저축은행을 인수하면 그 은행은 정치적 재물로 사라질 운명이 될 것”이라는 소문도 파다했다. 이 모두가 정재호씨에게 은행을 헐값에 넘겨주려는 권력층의 작용이었다.


그런데 정재호씨는 최하위 응찰가로도 인수자금이 모자라 저축은행 매수를 전제로 14회 국채를 10억환 담보로 8억환의 특별융자를 받았고, 이 국채로 피해를 본 증권업자가 부지기수였다. 소위 “14회 국채파동”이다.


저축은행을 장악하려는 정재호씨의 집념은 주식을 반반씩 나눠 공동운영하자는 윤석준씨의 간청마저 냉정하게 뿌리쳤다 해서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이 와중에서 윤석준씨는 조흥은행 낙찰자인 민덕기씨 소유지분 5만2,000주를 매수하면서 사실상 저축은행을 포기했다. 조흥은행 주식이 싸기 때문에 부담이 적었던 것이다.


김 장관이 뒤를 봐주어도 이미 조흥은행의 주식을 매수한 윤석준씨에게 엄청난 돈이 드는 저축은행을 장악할 여력이 있을 리 없었다.


최초 입찰자 중 끝까지 남은 사람도 정권의 의중도 정재호씨였다. 어쨌든 1957년 12월, 주당 2만7,610원의 가장 낮은 가격을 써낸 정재호씨는 저축은행 주식의 85%를 불하 받아 은행을 손아귀에 넣은 것이다.


정재호씨는 어떤 인물인가


그러면 제4위 입찰자로서 저축은행을 불하 받은 정재호(鄭載護)씨는 어떤 인물인가.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까지 재계를 리드하던 거대 재벌 삼호그룹의 창업주다.


삼호그룹은 어떤 기업이었던가. 대기업으로 자유당시절에는 정계에서도 막강한 파워를 과시했던 재벌이었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지금 삼호는 흔적조차 없다. 사라져버린 재벌의 모델케이스이다.


섬유산업을 발판으로, 권력자의 비호를 배경으로 단기간에 정상급재벌이 되었다가, 4 · 19혁명과 5 · 16쿠데타의 정치격변을 거치면서 치명타를 맞고 다른 1950년대 재벌과는 달리 3공 정권 하의 경제개발 드라이브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 많던 계열사를 모두 잃어버린, 풍운의 기업인이다.


경북 예천의 파산한 천석꾼 집안에서 태어나 가난과 서러움을 느끼고 자란 정재호는 소학교를 마치고 나와 대구시내에서 전전하다가 삼호공업사라는 조그마한 양말공장을 세웠다.


고향인 삼천리의 ‘三’자와 이름의 마지막 글자인 ‘護’자를 딴 이 공장이 삼호의 모체였다. 25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방직기술을 익히고 남다른 견문과 안목을 넓힌 결과 삼호공업은 10년 만인 8 · 15해방 당시 벌써 굴지의 메리야스 기업으로 성장했다.


한때 김성곤(金成坤 · 쌍용그룹 창업주)씨와 손잡고 금성방직(金星紡織)을 설립하여 대주주가 되기도 했던 그는 1949년 3월 대구에 삼호방직을 창설하는 용단을 내렸고, 이것이 응비의 날개를 달게 해 준 계기였다.


불과 5천추 규모로 출발한 삼호방직은 6 · 25 전란의 와중에서 전선 이남에 있어 전화를 입지 않는 행운을 잡았고, 전국 시장을 휩쓸면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떼돈을 벌어들이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변신했다.


환도와 함께 서울로 진출한 정재호씨는 재벌의 길로 질주를 거듭하였다. 삼호무역 창설, 경북메리야스 염색가공공장 인수에 이어 1953년 대전방직, 자유당 말기에는 다시 조선방직을 인수했다.


삼호방직 · 대전방직 · 조선방직의 방직트리오는 국내총생산량의 1/4를 점할 정도였다.


또 정상희(鄭商熙)씨와 손을 잡고 키워온 삼호무역을 또하나의 축으로 금융, 광산, 염색가공으로 영토를 급속히 넓혀 갔다.


1950년대 말 정재호의 산하에는 방직트리오, 삼호무역, 저축은행 외에도 제일화재, 삼양흥업(三洋興業), 유창물산(裕昌物産), 원양수산, 동화통신, 제주목장의 거대 계열기업군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자동차 제철공장을 설립하여 중공업으로 변신하는 한편, 상업방송과 TV 등 매스컴센터와 매머드급 호텔에까지 손을 뻗치려는 구상까지 하고 있었다.


이때가 바야흐로 삼호의 전성기였다. 국내 최정상급 재벌이 된 것이다.


이 같은 놀라운 성공에는 정재호 특유의 미래를 내다보는 식견과 안목, 사업가로서의 선각성, 민첩한 판단력과 아울러 맨주먹에서 일어선 불굴의 집념과 의욕 및 진취성이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개인적 맨 파워와 함께 권력실세와의 튼튼한 줄과 그 비호도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었다.


1950년대의 재벌이란 거의 예외 없이 권력과의 줄대기에 성공하여 돈 맥을 캐냈던 것이다.


정재호씨는 당시 ‘서대문 경무대’로 통하던 권력 2인자 이기붕(李起鵬)씨와 밀착돼 있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이기붕의 권력은 오히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능가한다는 평이 있을 정도였고, 이와 밀착된 삼호의 재벌행진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런데 당시 내막을 아는 사람은 이기붕보다 박찬일(朴贊一)씨를 주목했다. 그가 정재호씨와 이기붕씨를 맺어준 연결고리였다는 얘기다.


이 박찬일은 또 누구인가. 일본 중앙대(中央大) 전문부를 졸업하고 1946년부터 경북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미국으로 날아가 아이오와주립대를 졸업하고 1954년 대통령비서관이 된 인물이었다.


친미파 일색의 정권에서도 경무대의 실세비서관이던 박찬일씨야말로 정재호씨와 혈육같은 사이로 그의 배후였으며, 정재호씨와 이기붕씨를 맺어주었던 숨은 인물이었다.


저축은행의 불하과정은 삼호가 정상급재벌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계기였으며 정재호씨가 잡은 줄의 막강함을 확인시켜준 것이기도 했다.


[프로필] 이국영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전) 한은 은행감독원 은행검사역
•전) 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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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은행검사역 stat10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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