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비화 ㉕]증권파동 사건②

2018.09.01 06:29:55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4월 1일자로 시행에 들어간 개정 증권거래법은 거래방식을 종전의 실물거래와 청산거래 대신 실물거래와 보통거래로 바꾸었다.

 

보통거래는 매매가 성립되면 2개월간은 매수자가 대금을 결제하지 않아도 거래소가 대신 결제를 해주고 이자를 내면 주식을 인도할 수 있는 제도, 증권거래소가 일종의 여신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금리를 부담시켜 실물인수를 통한 실물거래를 유도하여 투기를 막는다는 것인데, 선진국과는 달리 당시는 오히려 투기를 더욱 조장하고 증시과열을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매일 주가가 토끼뜀을 하는 판에 몇 푼 안 되는 금리가 무슨 대수인가, 오히려 매일 차액을 정산하는 부담이 없이 두 달 동안 벌 수 있으므로 투기꾼들에게는 더욱 유리했다.

 

더욱이 보통거래가 폭발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대형결제를 해야 하는 증권거래소가 그 엄청난 자금을 감당해 낼 도리가 없다.

 

파동에 은행권이 휩쓸려 들어가게 된 것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거래소가 증자를 해야 할 필연성도 여기서 나왔다. 거래소는 자본금 6억환에서 1차로 4억환을 늘린데 이어 4월중에 2차로 40억환을 증자하기로 결정했다.

 

공모주가 액면가 50전에 28배의 프리미엄이 붙은 14환, 그런데 공모당시 대증주 시세는 35환이었다. 더욱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상황이었다. 증권사와 은행의 청약창구에는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청약 전날 밤은 청약자들로 부근 여관방이 초만원이었고, 창구가 문을 열자마자 장사진이었다.

 

액면가의 28배라는 고율 프리미엄은 세계 증시사상 신기록이었다. 그나마 35배까지 주장한 측도 있었다.

 

그래도 서울에선 인기폭발이었다.

 

공모주를 산 선량한 투자자들이 증권파동으로 액면가의 반으로 주가가 폭락해 알거지가 되리라고 어찌 상상인들 했으랴! 기존 대주주들에게는 그야말로 엄청난 특혜였다. 1주당 3.5주씩을 액면가로 주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업자들 간에는 4월 중 미증유의 대격전이 벌어졌다. 종전에는 한 달 평균 20억환 정도이던 거래양이 4월에는 무려 1천1백80억환을 돌파했다.

 

이중 1천 20억환이 보통거래였다. 현금도 주식실물도 없이 무턱대고 사고 파는 공매매 전쟁이었다. 당시 상황을 이윤빈(李允斌) 씨의 증권독본이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한국의 1962년은 증권의 해!”

노들 강변 버들가지 푸르고 창경원에 벚꽃이 만발할 무렵, 한국의 월스트리트 인 서울 명동에는 날이 새면 몇 천 몇 억의 부자가 새로 생겨나곤 하는 것이었다. 대증주니 연증주니 하는 이제까지 별로 들어보지 못했던 종이쪽지들이 아침저녁으로 그 값을 올리기만 하였다. 5할이 오르고 10할이 되고, 3배가 되고 9배가 되고 10배는 2백배로 뛰었다.

 

증금주란 어떤 주식인가

 

잠시 (주)한국연합증권금융설립과정을 살펴보자.

 

1954년 12월 대한증권업협회 임시총회는 증권금융회사 설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업계공동출자로 2억환 규모의 자본금을 가진 회사를 만들기로 결의했다.

 

모태가 되는 사단법인 대한증권업협회는 1953년 11월 18일 구성되었는데, 당시 대한증권, 고려증권, 영남증권, 국제증권, 동양증권 등 5개사 업자들의 협의체였다. 증권금융회사는 영세한 증권업계의 취약한 자금력을 보완하고 증권거래소 설립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당시 업계는 수차 정부에 지원요청을 했으나 불발을 거듭하다가, 증권거래소 설립추진 과정에서 증권금융이 먼저 햇빛을 보게 됐다.

 

이듬해 8월에는 거래소에 앞서 증권금융회사를 설립한 후 그 자금을 구증권거래소 건물수리비로 전용하기로 결정하고, 증금자본금 3억환의 1/4를 회사당 2백50만환씩 균등 불입할 것을 결의했다.

 

실제 불입한 회사는 30개 회원사중 28개사. 애당초 사명을 대한증권금융(주)이었으나 9월 17일의 발기인총회에서 전회사원의 공동출자로 설립된다는 취지를 나타내기 위해 한국연합증권금융으로 바꾸었다. 발기인 대표는 송대순(宋大淳) 씨.

 

마침내 불입금 1차 납입 완료 후 9월 28일 창립총회가 열렸다. 초대 취체 역사장에는 설경동(薛卿東) 씨가 선임됐고, 사무실은 임시로 협회 안에 두었다.

 

사업목적을 증권업 및 증권금융업무로 바꾸어 면허를 다시 신청하고, 1956년 초 재무부는 증권업자로 면허를 내주면서 타 증권업자에 대한 증권담보대출과 유가증권 대여업무도 가능하게 했다. 이렇게 출범한 한국연합증권금융은 1962년 증권거래법 제정에 따라 증권금융만 담당하게 되었고 7월 사명을 한국증권금융(주)으로 개명 오늘에 이른다. 사람들은 이 마력을 가진 종이쪽지를 구하려고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함덕용 의원 “사실을 밝혀라”

 

1963년 12월 26일 제39회 국회 본회의장. 함덕용(咸德用) 의원이 질문한다.

 

“벌써 증권파동에 관해서는 이번 사면조치가 되어 있기 때문에 뭐 이거 이제 누가 뭐 징역 가거나… 얼마 사람이 없게 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정부에서는 여하간 국민이 궁금해하는 이러한 사실을… 이왕 한번… 나와 벌 받을 사람도 없어졌으니 한번 적나라하게 터뜨려 내주는 것이 국민이 속 시원하지 않느냐 이것을 갖다가서 한번 권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구체적인 질문내용이 열거된다. “작년에 증권 파동시에 34억원의 대부행위가 어떻게 되었는지 이것 좀 밝혀 주십시오. 또 현재 증권시장대금(證券市場貸金)을 융통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증권파동의 경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상세히 설명하고 또 1.4 후의 희생자를 어떻게 구제하겠는지 이것은 그 당시에 국가로서 보상한다고 재무부장관이 언명했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국가가 의사표시를 한 이상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방안을 강구해 가지고 반드시 언약대로 실행하여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증권거래소가 어떻게 주식회사가 되었다가 불과 1년이 못되어서 공영제로 되었는지 그 근거와 그 이념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증권거래소는 부채뿐이라고 하는데 거래소의 25억원의 재산이 어디로 갔는지 또 자매관계인 증권회사에 5억원의 재산은 어떻게 되었는지 당시 증권거래소에는 2억원의 국고수표가 증권결제에 유용되었다고 하는데 그 출처를 조사해 주십시오.

 

그리고 당시 약 70억의 부당이득의 행방… 뭐 이것도 대중이 궁금해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밝혀 주십시오.”

 

책임소재까지 들춰내고 있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증권시장을 경영했다고 항간에서는 전하고 있어요. 윤응상이를 대표로 내세워가지고 했다고 합니다. 이미 사면이 된 이상 그 책임을 추궁해도 소용은 없습니다. 이것도 적어도 국가의 공공기관이 증권시장을 갖다가서 경영했다는 것은 국민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문제의 하나라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점을 좀 더 상세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1962년 5월 당시 증시 상황

 

대증주가 반 년 만에 5,6배로 폭등하자 처음에는 그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우스꽝스럽게 생각하고 남의 일처럼 보아 넘기던 사람들도 차츰 덤벼들기 시작하였다. 얌전하게 자기사업을 해오던 상인들도 모여들었다. 지방 사람들도 소문을 듣고 올라오는 터에 봉급생활자라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액수가 커지고, 사람이 늘면서 이 주식종이쪽지들은 귀해지고, 따라서 그 값은 무한정으로 올라가기만 하였다.

 

실로 광란의 증시였다. 이 도박판이 한두 사람의 농간으로 벌어졌는데, 멋도 모르고 발을 들여놓은 소시민들은 곧 터질 곡소리를 까맣게 알지 못했다.

 

증권거래소는 어떠했던가.

 

주식회사제로 바뀐 이후 대주주에 의해 놀아나는 사금고나 다름없었다. 연초 윤응상이 작전을 개시할 즈음 대증주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주기식(朱琦植) 증권거래소이사장은 대증주에 대해서는 1백%의 증거금을 납입케 하고 전일종가에서 3% 이상 등락치 못하게 하는 등 강력한 규제책을 폈다. 한국증시에서의 가격등락폭제도의 효시였다.

 

이에 증권업협회 전임원진이 사임소동을 일으키는 등 투기전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제재조치에 강력히 반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래소가 주식회사 체제로 바뀌게 되자 거래소 이사장쯤은 대주주들의 압력에 버텨내기 힘들었다.

 

더욱이 윤응상은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고 있었다. 증시를 내려 덮은 검은 구름의 정체를 간파한 주기식 이사장은 이들의 압력에 사력을 다해 버티면서 과열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것이 3월 14일의 ‘대증권상장폐지 검토’라는 폭탄선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그의 수명을 단축하는 일이었다.

 

증권업협회 관련자들은 벌떼같이 들고일어나 주 이사장의 퇴진을 요구했고 버티다 못한 그는 3월 17일 사임하고 말았다. 눈에 가시 같던 주 이사장을 쫓아낸 윤응상은 이미 대증주 대부분을 장악한 터라 일인 천하였다.

 

이동훈(李東薰) 전무를 서리로 앉혀놓은 채 이사장 자리를 공석으로 남겨두었다. 이사회는 윤응상의 의중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거래소 임원실과 윤응상의 핫라인이 개설된 것도 이때였다.

 

4월 1일 정식 주식회사체제가 출범하고 3월 20일 주총이 열렸다. 윤응상은 서재식 전 한일은행장을 이사장으로 내세웠다. 서재식 씨는 1959년에 증권사를 운영한 바 있어 윤응상과는 안면이 많았다. 시내 동남빌딩 3층에서 만난 그에게 윤응상은 이사장을 맡아 달라고 간청했다.

 

국회의사록에 있는 조병완 전문위원이 낭독한 보고서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전 중앙정보부 행정차장 이영근 관리실장 정지원 등이 증권업에 경험이 있는 윤응상으로 하여금 통일 일흥 동명의 증권회사를 창설케 하기 위하여 농협중앙회가 보유하고 있던 한국전력주를 시가의 5%감 가격으로 방출케 하여 그 이익금 8억6천2백만환을 동회사의 자본금으로 충당하였으며, 또 윤응상으로 하여금 대한증권거래소 총주의 약 7할을 점유케하고…”

 

이렇게 거래소를 맡은 서 이사장, 불과 두 달만에 파동으로 사임하고 법정에까지 끌려 나가는 신세가 됐다. 이 두 달간 밤잠을 제대로 자본적이 없다는 그는 생애 가장 아픈 악몽의 순간들이었다. 부임 열흘 만에 4월말 수도결제자금 부족사태를 당해야 했고, 또 한 달 만에 5월 결제 불가능이라는 판국에, 어떻게 손써볼 도리도 없었다. 이미 그간 주 이사장이 도입한 규제책은 말할 것도 없고, 과열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들도 대주주들이 없앤 뒤여서 대행결제자금 마련에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투기꾼들의 뒤치다꺼리밖에 할 일이 없었다.

 

주가폭등은 온통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관심은 증시로 몰아 서민 시장상인 암달러상들까지 증시에 뛰어 들었다. 4월경에 세워진 1천1백80억환의 거래량과 1천20억환의 보통거래규모는 증권시장이 스스로 소화해 낼 수 없는 규모였다.

 

매수 측에 수도결제에 내놓을 자금이 모자랐다. 은행자금까지 끌어 왔는데도.

4월 17일 현재 시중은행에서 증권금융으로 나간 대출이 17억5천만환이었는데, 이 자금은 당시 시행되었던 대출 실링제와 신탁자금으로 공급된 것이었다. 은행들은 계속 손을 벌리는 증권계에 대해 여신을 해줘야 할 곳들이 수두룩한데 대출한도를 초과하면서 더 이상 돈을 대줄 수 없다고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매매가 성립된 주식을 건옥(建玉)이라고 하며, 청산거래와 보통거래의 경우 결제일에 가서 주식과 현금을 주고 받음으로써 수도결제를 끝내는 것을 건옥을 끈다고 하지요. 그런데 4월 17일 현재 건옥을 끄지 못한 것이 22억6천만환이나 되어 거래소는 재무부를 통하여 증권금융 2억환을 지원해 주도록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내버려둘 경우나 팔아도 수도결제일에 약속이행이 안 되는데 누가 주식투자를 하겠습니까.

 

금융통화위원회에서는 ‘대출한도외 융자’라는데 대해 반대의견도 있었지만 마침 4월 20일에 거래소에서 증자를 결의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증자해서 돈이 들어오면 곧 갚는다’는 조건하에 자금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은행 홍완모 이사의 술회다.

청산거래는 파는 사람이 실물을 가져오면 사는 사람에게 대금을 받기 전이라도 가불 비슷하게 돈을 내주어야 하는 데 이를 가도(假渡)라고 한다. 또 보통거래에서는 판 사람이 실물을 가져오면 거래소가 대신 결제를 해주고 산사람에게는 이자만 받고 두 달간 대금납입을 연기해 주는데 이것이 대행결제자금이다.

 

금융계 증권파동에 '지리멸렬'

 

이 가도자금과 대행결제자금이 모자라 22억6천만환의 건옥을 끄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결제할 돈도 없는 주제에 터무니없이 공매매를 해놓고 ‘능력이 없으니 배 째라’고 나가 자빠졌기 때문이었다.

 

거래소만 애간장을 끓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증권파동이란 곧 결제일에 청산이 안 되는 것을 말한다. 다급해진 증권거래소는 재무부를 통해 금융통화위원회에 증권금융 20억환을 실링제와 관계없이 ‘한도외’로 방출해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금융계가 증권파동에 휩쓸리는 시초였다.

 

4월 18일 20억환의 수도결제자금한도외 취급건이 금통위에 상정됐다. 이 같은 정책금융과 증권시장 매매결제시스템에 대한 격론이 벌어졌다.

“이 안건은 당장 납득이 가지 않으니 소위원회에 회부해서 난상 토의하자” 남상옥 위원이 제동을 걸었다.

 

남상옥, 실업가로선 유일하게 쿠데타군에 자금을 제공, 민간인 출신으로 드물게 주체세력에 낀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거리낌이 없이 발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회의에 나와 있던 재무부 이재과장은 거래소 자금사정이 상당히 급하고 증권시장이 당장 깨지게 생겼다며. ‘20일 증자를 결의할 예정인데 증자로 돈이 들어오면 20억환을 갚을 수 있으니 증자불입금을 쓸 수 있을 때까지만 봐달라’고 사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금통위는 대한증권거래소의 수도결제자금 20억환을 한도외로 취급토록 허용하는 결정을 내렸다. 단 ‘본 융자금은 회전 사용할 수 없다’는 단서가 붙었다. 증자를 해서 돈이 들어오면 바로 갚아야 하며 계속 굴릴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편에 계속>

 

 

[프로필] 이 국 영
•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 전) 한은 은행감독원 은행검사역

• 전) 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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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stat10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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