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비화 ㉜]1965년 금리현실화, 비현실적 극약처방(Ⅰ)

2019.02.24 06:45:44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경제개발 시급했던 군부, 금리 카드 만지작

 

1965년 9월 30일. 사채(私債)에 비해 매우 낮은 은행의 예금이자와 대출이자를, 사채이자와 비슷하게 접근시킨다는 명목하에 예금이자는 정기예금의 경우 연 15%에서 30%로 올리고, 대출이자는 일반대출의 경우 연 16%에서 26%로 대폭 인상한 것을 주요 골자로 하는 금리현실화조치가 단행됐다.

 

왜 금리현실화를 단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1962년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라는 국가 주도 산업화 과정을 이끌어 나갔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은 연평균 성장률 7.1%로서 이를 추진하는 설비투자증가율은 22.6%로 짜였다.

 

그 재원은 국내 조달 9.2%이고, 해외 차입 13.4%. 이 계획이 안고 있는 문제는 5개년 동안 1850억원에 달하는 외자의 원활한 도입과 인플레이션 없는 내자조달이었다. 그러나 당초 재원 조달계획은 당시의 국민저축능력을 넘어선 데다, 1962년 통화개혁에 따른 경제활동의 위축과 1963년 농산물의 흉작이 뒤를 따른 것도 금리현실화 배경이었다.

 

그리하여 경제개발계획 2차 연도인 1963년 8월에 원안을 대폭 수정한 보완계획이 작성됐다. 주요 보완계획은 우선 성장목표치를 당초 7.1%에서 5.0%로 끌어내리고, 정부투자 부문을 축소하고 민간사업 부문을 확대하되, 적어도 광공업 부문은 민간기업에 맡기며, 투자 재원의 외자 의존도를 높일 뿐만 아니라 외자의 활동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1964년, 제3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정부는 고도성장기반 구축을 위한 경제시책을 구체화해 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해 5월 11일에는 한국은행 부총재를 지냈고 일찍이 한국은행 설립 당시의 주역이었던 장기영(張基榮) 씨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취임했다.

 

장 부총리는 지지부진한 경제개발계획을 강력히 밀고 나갈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김세련(金世鍊) 한국은행 총재에게 ‘개발자금 조달 문제가 김 총재의 과제’라고 다짐하고, 이를 위해 진력해달라고 당부했다.

 

당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할 때 가장 염려한 것은 외자 조달 문제였으나 정작 실행과정에서는 차관과 투자 러시로 외자는 별지장이 없었다. 게다가 외자 동원을 위한 정책은 한일국교 정상화를 통한 일본에서의 상업차관 도입으로 시행됐다.

 

즉, 미국의 무상원조가 유상원조로 전환이 서둘러지고 있던 이 무렵, 공업화 계획의 전개와 더불어 정부는 1965년 2월 20일 한일협정의 타결에 의한 대일청구권자금의 확보와 1966년 3월 24일의 한일무역협정 등으로 일본 자본을 끌어들일 수 있게 했다.

 

이러한 한일협정의 조속한 타결은 일본으로서는 ‘지금까지 규제돼 왔던 한국 시장에 대한 상품의 진출을 제도적으로 합리화’하려는 의도와 선진독점자본국의 잉여자본 수출 요구, 미국으로서는 한국에 대한 경제 지원의 일부를 일본에 대위시키고자 하는 요구, 한국으로서는 격렬한 국민의 반대운동에 직면한 가운데 있었지만, 경제개발을 위한 재원의 요구가 합쳐져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1964년 7월 15일과 1965년 1월 2일 월남의 ‘주월 남한국군지원 요청서’ 수락 형식으로 월남파병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처럼 1965년부터 본격화된 월남파병도 ‘미국으로부터의 원조 및 차관증가와 대월남 상품 및 용역수출’로서 외화의 부족을 극복하기 위한 주요한 경제적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이제 남은 과제는 경제개발계획 달성을 위한 내자 조달을 어떻게 추진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 방법론으로는 두 가지 큰 견해차가 있었다. 하나는 한국은행의 발권력으로 밀고 나가자는 성장 일변도 강경론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리한 추진은 위험천만하니 어렵더라도 민간저축을 끌어들여 자금을 조달하는 정도론(正道論)이었다.

 

그래서 이중 후자, 국내 자본을 동원해서 산업 자본으로 투자하고자 시도한 것이 1965년 9월 30일 금리현실화조치로 나타나게 되었다.

 

김세련 총재의 소신, 대통령 ‘금리현실화조치’로 응답

 

통화개혁으로 혁명 주도 군인들의 무모한 경제정책은 실패를 거듭, 물가 폭등과 외환위기를 초래했다. 이에 경제는 무리하면 되레 그르친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군사 정부는 민간 전문가들과 금융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1963년에는 재정안정계획이 부활하고, 제3공화국도 ‘성장보다 안정’에 중점을 두고 출발했다. 내자 조달을 위해 재정 적자를 무릅쓰고 팽창 예산을 편성하고 은행 대출을 마구 풀자는 성장우선론은 결국 중앙은행에서 돈을 무한정 찍어내 메우자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통화가치의 안정을 생명으로 하는 한국은행으로서는 당연히 민간저축 증대를 통한 금융 재원확충과 경제 안정을 주장했다.

 

저축 증대를 위해서는 지나치게 낮은 금리를 현실화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당시 금융기관의 금리는 최저 연 3.5%에서 18.5%까지 대단히 복잡하고 비현실적이었던 반면, 사금융시장은 최저 월 3부에서 최고 월 7부였으니 평균 5부로 따져도 연리 60%에 달했다. 이런 실정이었으니 은행 융자에 대한 가수요가 폭발, 특혜 대출을 받아 돈놀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실정이었다.

 

김세련 한국은행 총재는 온갖 반대세력에도 불구하고 금리현실화를 결심하고 장기영 부총리에게 이를 제안하는 한편 박 대통령에게 직접 진언할 수 있는 김종필(金鍾泌) 씨를 설득했다.

 

장 부총리는 원래 한국은행 출신인 데다 안정우선론자였으므로 당연히 금리현실화에 찬성했다. 김종필 씨도 수차례 찾아간 끝에 협조를 얻는 데 성공했다. 이 두 채널을 통해 마침내 박 대통령의 연구 검토 내락(內諾)을 받고 작업에 들어갔다.

 

한국은행은 금리현실화에 성공한 대만(臺灣)에 직원을 파견해 연구 조사케 하는 한편, 적정한 국내 금리 수준을 모색하고 금리 체계 단순화를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당시 금리 인상에 대한 여론은 이자제한법에 규정한 연 20% 이내를 고집하는 재계 주장과 법을 개정해 20% 이상으로 올리되 점진적 인상을 꾀하는 재무부 안(案), 여권 일부와 미국 측의 대폭등시 인상론 등 세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아직도 내자 조달을 쉽게 할 수 있다는 성장우선론자들에 포위돼 있어 적극 재정금융정책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김세련 총재는 청와대에 불려 들어갈 때마다 한결같이 이를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박 대통령은 “모두 ‘Yes’하는데 김 총재는 항상 ‘No맨’ 이야”라는 농담을 할 정도였다.

 

7월 6일 대통령은 내자 동원 방안에 관해 자문하는 서한을 사신(私信) 형태로 몇몇 인사에게 띄웠다. 그리고 가능한 한 7월 중으로 회신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세련 총재도 서한을 받았다.

 

한국은행으로서는 그것이 공식문서가 아닌 개인적 서한의 형태였으므로 공적 입장에 구애받음이 없이 평소의 소신을 기탄없이 피력할 기회였다.

 

김 총재의 답신 요지는 이렇다.

 

“한국의 경제가 건전하게 발전하려면 먼저 경제 안정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판단된 현 단계에서는 경제의 계속적인 성장의 필수조건인 통화가치의 안정을 달성, 유지하기 위하여 만난(萬難)을 극복하시고 현행 경제안정 정책을 계속 추구하심이 가장 긴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금리현실화가 실현돼 금융기관 금리가 시중 금리와 비슷해져 은폐·보조적 매력이 소실되면 자금의 가수요, 특히 소비나 불요불급한 자금의 가수요가 감퇴하는 한편, 민간 부동자금의 금융기관 저축화가 촉진되어 그만큼 진정한 산업 자금의 공급 능력이 증대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일부 기업은 현재 은행 금리가 너무 낮기 때문에 갚을 능력이 있더라도 갚지 않고 있으므로 금리가 현실화하면 연체가 나날이 늘어가는 현상이 시정될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 자금을 주식이나 사채 발행에 의하여 조달하기 시작할 것이며,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에서 절실히 요청되고 있는 자본시장을 발달시키는 전기가 될 것입니다.

 

통화와 신용의 관리를 사명으로 하는 중앙은행 금융정책의 효과를 최대로 보장함으로써 한국은행이 그 사명인 통화가치 안정과 이를 바탕으로 한 국민 경제 발전에 기여하게 하기 위하여 정부 자원을 재원으로 하는 금고적 성격을 가진 산업은행을 제외한 제 특수금융기관의 금융 활동을 한국은행의 직접 관장 하에 두도록 관계특수은행법을 개정하여 금융정책의 통일적 운용의 실효를 확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사료됩니다.”

 

즉, 김 총재는 박 대통령에게 보내는 답신에서 통화가치안정의 중요성, 금리현실화와 자본시장육성의 필요성은 물론 금융제도의 정상화까지 건의했다. 그의 답신이 박 대통령의 결심에 어느 정도 작용을 한 것은 분명했다. 이제 금리현실화는 기정사실이 됐다.

 

국회는 1965년 9월 14일 이자제한법을 개정, 최고 금리를 연 20%에서 40%로 완화했다. 금융통화운영위원회는 17일 연 36.5%를 최고 이율로 답신했고, 이 금리는 그달 24일 시행령으로 공포됐다. 금리 조정에 관하여 정부 당국과 한국은행 및 금융기관 사이에 의견이 활발히 교환되고 금융통화운영위원회의 금리결정권이 최대한 존중됐다.

 

9월 26일 장기영 부총리 주재하에 금융관계자 연석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선 예금금리 연 30%, 대출금리 26% 및 연체금리 36.5%의 최고 금리를 정하고 예대금리 동시 인상에 합의했다. 금리현실화 단일안은 28일 확정됐고, 30일 청와대 연석회의에서 박 대통령의 최종 실시지시를 얻어냈다.

 

美 원조 도입, 금리현실화 또 하나의 이유

 

또 하나 금리현실화조치의 직접적인 원인은 1965년 ‘재정안정계획’의 단서 조항이다. 군사정부는 보다 긴밀한 대미경제협력의 필요성과 악화된 제반 경제 사정을 고려하여 1963년 초에 재정안정계획을 부활시켰다.

 

당시 재정안정계획은 주로 통화가치 안정을 위한 통화량조정정책으로서, 5·16 이후 중단되었다가 미국으로부터 원조 자금 도입을 비롯한 도움을 받을 목적으로 1963년부터 재개된다.

 

이 금리현실화조치가 빨리 이행하게 된 이유로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연간 원조 계획의 기초로서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 간에 금융개혁을 3/4분기 말까지 이행할 것을 합의한 1965년의 재정안정계획의 단서 조항 때문이다.

 

박영철 금융연구원장과 D.C.Cole은 공저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따라서 동 개혁조치는 이러한 시간 계획에 맞추어 졌고 원조자금은 순조롭게 도입되었다.”

 

정부는 1965년 9월 24일 ‘이자제한법’을 급히 고치고 3/4분기의 마지막 날이었던 9월 30일에 금리현실화조치를 서둘러 단행한 것이다.

 

1965년 8월 10일 제52회 국회 재경위의 심사를 받기 위해서 ‘이자제한법폐지법 법률안·이자제한법 중 개정법률안’이 배부되었다. 재무부 홍승희(洪升熹)가 설명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제 자료 제출 요청이 있었습니다. 우선 어제 안으로 준비된 것만 등사해서 여러 위원들에게 나누어 드렸습니다. 첫째 정부가 생각하고 있는 금리현실화의 방안에 대하여 요점만을 일괄해서 나온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시면 제일 먼저 금리현실화의 필요성이라고 해 가지고 나와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재무장관이 설명하는 금리현실화의 필요성을 보자.

 

정부의 금리현실화 방안

1. 금리현실화의 필요성(제안 이유)

현행 금리 수준은 장기적으로 점차 저하시킴으로써 국제 금리 수준까지 접근시켜야 할 것이나 현시점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를 인상 조정하여 금리 기능을 우선 회복하고 단계적으로 인하 조정함으로써 균형점을 발견하여야 할 것임

 

(1) 내자 동원의 수단

가. 경제의 안정과 성장을 동시에 충족키 위하여 비‘인플레’적 방법의 재원조성에 기여할 것이며,

나. 도입된 외자와 재정투자에 의한 산업건설을 뒷받침하기 위하여는 내자의 시급한 조성이 요청됨

 

(2) 금융기관 외에서 유통하고 있는 거대한 자금을 금융기관에 흡수하여 산업자금화함으로써 투자방향의 적정을 기함

 

(3) 특혜배제를 위한 기초적인 조치로서 은행금리의 상향조정과 단계적인 현실화조치가 필요함

 

(4) 재정안정정책의 강력한 실시와 단일변동환률제도의 실시 등 정상적인 가격구조에 기초를 둔 안정정책이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두고 있는 현시점이 금리현실화를 실시하는데 적기임

 

대출이자가 더 싼 역금리 제도, 왜?

 

그러면 왜 높은 금리로, 그것도 예금보다 대출금이 싼 역금리로 개정되었을까. 홍 재무의 브리핑을 계속 들어보자.

 

2. 적정예금금리 수준

저축 요인이 될 수 있는 적정한 예금금리 수준은 다음과 같은 표준에 의하여 정할 수 있음

 

(1) 소비자물가 지수와 외국의 정기예금금리

예금금리 수준 = 정상금리+화폐가치 손실률

= 외국의 대표적 정기예금금리+소비자물가 지수의 평균 상승률

≒ 5% + 20%= 25%

 

(2) 국채이윤율

국채 투자는 안전성이 있으므로 국채이윤율을 대표적인 시장금리로 볼 수 있음. 국채이윤율은 최근에 연 24% 내외가 되는데 정기예금은 국채보다 유동성이 낮으므로 정기예금금리로는 국채이율 연 24% 보다 약간 높여야 할 것임

 

(3) 계(契)가입자의 금리가득률

가. 최종번 계원의 금리가득률 월 2.5%

나. 절반순위미만 계원 3분의2 순위 계원의 금리가득률 이해득실 없음

다. 최종번 계원의 금리가득률 월 2.5% 내에는 위험부담률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정기예금금리 수준은 이보다 낮게 정할 수 있음

 

(4) 정기예금금리 수준

가. 이상 여러 점을 고려할 때 정기예금금리 수준은 최저 월 2% 정도로 하여야 할 것임

나. 민간의 거래습관과 예금주의 유동성에 대한 욕구를 일부 충족시키기 위하여 이자는 매월 지급함이 좋을 것임

다. 정기예금은 6개월 만기제를 기초로 하여 예금 원본에 대한 유동성 욕구도 아울러 고려함

라. 월 2%의 이자를 만기 전에 매월 지급한다면 복리로 연26.7%가 될 것임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예금금리 수준을 최고 30%까지 지급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대출금리는 일반대의 경우 26%를 받도록 하였다. 역금리는 틀림없다. 그러나 대출이자는 선이자로 받고 예금이자는 만기에 후불이므로 은행이 그 차액을 돈 장사하면 순손은 아니라는 계산이 나온다.

 

1965년 12월 3일 국회에서 무소속 소선규(蘇宣奎) 의원의 질의를 들어보자.

 

“만약 참 그야말로 은행에서 돈을 얻을 힘만 있다고 하면 얼마든지 얻어서 그래서 예금을 해서 지금 대출금리가 26%입니까? 또 저축예금은 3할이지요. 나는 그 ‘마진’이 있다고 생각할 적에 금융가수요의 길을 그대로 열어 놓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나는 이것을 조절해야 마땅하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한 나웅배(羅雄培) 재무부 장관의 답변에서 예금과 대출의 역금리를 설명한다.

 

“소위 지금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18개월 이상 정기예금을 해서 수지가 맞게 이렇게 졸렬하게 지금 금리현실화 그 내용이 구성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26%의 그 이자를 선이자로 지불하고 18개월짜리 장기 정기예금을 해서 1개월씩 2.5%의 이자를 받는 것으로서 절대로 수지가 안 맞게 만들어 있습니다.

 

은행에서 융자를 받을 적에는 금리만 지불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험료도 있고 등기료도 있고 여러 가지 비용이 드는 것을 다 계산해서 수지가 맞게 이렇게는 안 되어 있습니다.”

 

이 논리에 근거를 두어 예금과 대출금 역금리 제도를 채택하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조치 이후 2차에 걸친 금리 조정과 1968년 10월 1일의 금리 조정으로 예금이자 25.2%, 일반대출이자 26%로서 역금리 체제를 청산한다.

 

그리고 1972년까지 계속적으로 금리가 저하했다. 또한 은행의 한국은행에 대한 지불준비금에 3.5% 이자를 부리하여 금융기관 수지에 악영향을 주지 않도록 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프로필] 이 국 영
•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 전) 한은 은행감독원 은행검사역

• 전) 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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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stat10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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