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지난호에 이어서>
정보사땅 매매사기 사건
결국 이 사건은 속고 속이는 전문토지사기단의 일획천금(一攫千金)을 노린 한탕주의와 법과 제도를 아랑곳 않는 무소부위(無所不爲)의 권력만능주의, 군사기밀보호를 이유로 한 밀실행정풍토 그리고 금융기관들이 다반사로 자행해온 불법금융거래 탈법적 자산운용, 관행화된 금융권정치입김작용 등이 빚어낸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여러 가지 의문점을 들어 ‘실제거래’가 아니냐하는 의구심을 가졌다.
(1) 이 사기극의 초기에 등장하는 핵심인물 김영호 전 합참군사자료과장이 단순한 사기꾼이었다면 1월 21일 계약금과 사례비 81억 여원을 받고서도 태연히 합참에 근무하다가 6월 11일 홍콩으로 도주하기 직전, 그 거액을 정건중 씨 부인 원유순 씨를 통해 돌려준 이유가 분명치 않고, 국방부가 김영호 씨의 범죄를 발견한 시점과 신병확보시기에 대한 발표가 여러 차례 번복되는 등 일관성 없이 오락가락했던 점.
(2) 가장 의혹의 초점이 되는 것은 고도의 부동산 정보수집망과 경영능력을 가진 굴지의 금융기관인 제일생명의 사주 박남규 회장과 한국은행총재를 지낸 하영기 사장이 88년이래 사옥터 물색과정에서 다섯 번 이상이나 사기당할 뻔했던 경험에도 불구, 요로를 통한 정보사땅 불하 사실의 진위확인도 없이 처음부터 무엇을 믿고 소유권 이전등기도 않은 채 수백 억원을 땅깞으로 선뜻 지급했겠느냐는 점,
(3) 범인들이 사칭 또는 빙자했던 청와대와 안기부 관계자들에 대해 검찰이 처음엔 가공의 인물이라고 했다가 나중엔 일부 실존인물이지만 사건과는 관계없는 동명이인이라고 해명하는데 그친 미진한 수사결과도 석연치 않은 점,
(4) 김인수 일당이 사례비등으로 받은 돈을 명화건설 사업비등에 즉시 지출한 점 등도 사기탄로가능성에 대비, 돈의 사용처를 숨기려는 사기꾼들의 속성에 비추어볼 때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아 실제 불하가 추진되던 중 ‘상층부’에서 일이 어긋나 터져나온 것이 아니냐는 추론을 낳게 한 점,
(5) 정씨 일당의 행적도 단순사기극의 구도로는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즉 정보사땅불하가 ‘여의치 않음’을 통보한 이후인 6월 2일 자신들이 돌린 어음 60억원을 막기 위해 당좌수표를 담보로 내놓고 6월 17일에는 17억원의 현금을 구태여 지급한 점.
어쨌든 이 사건은 그 후유증도 적지 않았다. 대형금융사고로 이어진 이 사건의 여파로 제1, 제2금융권의 자금중개기능이 약화됐고 사채시장이 급격히 위축됐으며 증권시장침체가 가속화되는가 하면 금융질서교란에 따른 기업의 자금난과 금융비용이 급상승하는 큰 부작용을 초래했다. 또한 사기극에 말려든 제일생명과 국민은행의 ‘사기 당한 돈’을 찾기 위한 법정공방으로 이어졌다.
제일생명은 8월 1일 국민은행을 상대로 정덕현 대리 등이 빼돌린 230억원을 돌려달라며 서울민사지법에 예금반환청구소송을 냈다. 이에 대해 국민은행측은 제일생명이 예금한 돈은 형식적으로는 윤상무와 하영기 대표이사명의로 돼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사기단의 돈이었다면서 윤상무가 예금인출 사실을 알고 있었고 사실상 추인해 주었기 때문에 정대리의 위규에 따른 책임추궁은 가능하지만 예금을 돌려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어 이번 사건의 불길은 여전히 꺼지지 않은 채 굴지의 보험사와 은행 간의 법정소송으로 비화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후유증은 이번 사건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구조적 부조리와 고질적 환부를 또 한번 극명히 드러냄으로써 도덕성에 대한 국민들의 실낱같은 기대를 여지없이 난도질했고 건실하게 살아가려는 소시민들의 의지와 알뜰한 꿈을 무참히 짓밟아 끝없는 박탈감과 허탈감의 나락 속으로 빠뜨려 버림으로써 성실한 삶에 대한 회의와 피해의식을 한층 깊게 하는 치유되지 못한 상처를 남겼다는 것이다.
서울고법 형사5부는 1993년 4월 29일 정보사부지사기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전 합참연구실 자료과장 김영호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사기)위반죄를 적용, 징역 10년 벌금 5억원 추징금 10억 4600만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또 전 성우건설회장 정건중 등 관련자 8명에게는 징역 10년~1년 6월 집행유예 3년을 각각 선고하고 정명우에게는 원심대로 무죄를 선고했다.
정보사땅 매매사기사건은 제일생명이 피해 입은 472억원중 태반이 행방이 묘연해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증발된 돈의 마지막 소지자가 누구냐가 이 사건의 성격과 배후를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단서이며, 그에 따라 교묘하게 ‘돈 세탁’을 한 토지브로커와, 뒤늦게 돈 꼬리를 쫓는 검찰간의 머리싸움이 치열했다.
돈 세탁의 고전적인 手法은 ‘手票의 현금화’. 수표추적을 피해 여러 가명계좌를 거쳤다가 최종적으로 현금으로 찾아가는 방법이다. 금융기관의 ‘도움’이 필요없지만 현찰로 인출할 수 있는 금액이 하루에 수억원 정도가 고작이어서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래서 흔히 이용되는 게 ‘수표 바꿔치기’. 다른 사람에게서 수표를 받아 사용하는 대신 그 사람 계좌에 자기의 수표를 입금하는 것을 말한다.
‘어음할인’도 자주 쓰이는 방법 중 하나다. 종금이나 신용금고 같은 제2금융권에서 전주의 신분보장이 관행인 점을 노려 사채업자에게 ‘웃돈’ 주고 어음할인을 맡겨 돈을 챙긴 다음 또 다시 복잡한 세탁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또 증권회사에 가명계좌를 개설, 유가증권에 투자했거나 다른 수표로 빼내거나 아예 암시장에서 브로커들을 통해 무기명채권을 매입하는 방법도 흔히 쓰인다.
이밖에 해외주재기업이나 마약 밀매범들은 암시장에서 달러를 매입해 이를 해외로 반출한 뒤, 한참 후에 외국에서 벌어들인 돈인 것처럼 다시 들여와 합법자금으로 둔갑시키기도 한다.
위조CD와 이희도 지점장 사건
1992년 11월 15일 늦가을,
새벽 1시쯤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기자촌 아파트 257동 뒤뜰에서 이 아파트 307호에 사는 상업은행 명동지점장 이희도(李希道, 53) 씨가 숨져 있는 것을 송파경찰서 오륜파출소소속 방범원 박영운(朴英雲, 33) 씨가 발견했다. 보라색 상하운동복을 입고 있는 이 씨의 왼손 동맥이 끊어져 있었다.
이 씨의 집 안방 이불에 피가 흥건히 고인 채 이 씨가 동맥을 끊는데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30센티미터 가량의 주방용 칼이 놓여 있었고, 아파트 7층 복도 베란다에도 핏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씨가 7층으로 올라가 투신한 것으로 추정된다.
14일 토요일 이 씨는 직원과 테니스를 약속했으나 나오지 않았고, 약간 음주를 하고는 밤 11시 반쯤 귀가하여 말없이 안방으로 들어갔다. 집에는 방위병 복무중인 차남과 막내딸이 있었고 부인 최순자 씨는 마침 혼수문제로 사위될 사람의 고향인 전남 여수에 내려가 있었다.
한참 잘 나가는 시중은행 명동지점장이요, 큰딸의 결혼식이 불과 보름, 11월 29일로 예정되어 있는 이씨가 왜 죽음을 택해야 했던가?
필자가 불과 3개월 전 우연히 사석에서 만나 보았던 그는 학창시절 정구선수였다는 소개와는 달리 아담한 체격에 별로 말이 없는 차분한 성품이었다고 상기된다.
경찰은 안방 장롱 속에서 숨진 이 씨의 양복 안주머니 안에 있던 지갑 속에서 유서와 2개월여후 지급만기로 돼 있는 100억원과 50억원짜리 롯데쇼핑 발행어음 2장을 발견했다.
이 유서에는 이렇게 간략하게 적혀 있다.
“당신과 은행에 미안하오. 더 이상 할 말이 없소. 내 몸은 태워 없애주시오.”
경찰은 롯데쇼핑 경리부장으로부터 ‘지난달 31일 상업은행 명동지점으로부터 300억원을 대출 받았다’는 진술을 받아내고, 이 씨가 갖고 있던 어음들은 롯데쇼핑 측이 대출을 받았을 때 발행한 300억원의 어음 중 일부인 것을 확인했다.
경찰은 이 씨의 자살동기를 찾아내려는데 수사력을 집중한다. 은행이 100억원 이상의 거액을 기업에 대출할 때는 본점으로부터 대출승인을 받도록 되어 있는데도 자살한 이 씨가 본점의 대출승인없이 롯데쇼핑 측에 대출해주고 약속어음을 받았으며, 은행금고에 보관토록 되어 있어야 할 할인한 약속어음을 호주머니에 소지한 점, 유서에 ‘은행에 미안하다’는 내용을 포함시킨 점 등이 이 씨의 자살동기를 밝히는 단서가 될 열쇠로 추정했다.
자체조사에 나선 상업은행 검사부도 정밀조사에 들어갔다. 이 씨가 서소문지점장 시절부터 CD(양도성정기예금)를 사용, 사채조성을 통해 수신고 1위를 차지했고, 예금이나 사채(私債)동원 능력이 행내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들어왔음을 중시, 가짜CD가 이 씨의 자살과도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명동지점의 예금, 대출 및 유가증권현황 등을 검사했다.
결과는 곧 드러났다. CD 100억원을 대신증권을 통해 수협이 사갔는데 그 대금은 은행에 입금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CD를 대금 입금 없이 발행한 것이다.
상업은행은 이 씨가 이외에도 인천투자금융이 맡긴 450억원의 CD를 불법 유통시키고 50억원을 중간에 가로챈 후 증서는 잘못발행된 것처럼 서손처리하여 지점에 보관하였고, CD를 발행하지도 않고 고객 김모씨에게 수탁통장에 22장 22억원을 사인날인해주고 유용했음을 밝혀냈다.
또 자기가 권유한 예금주 차모씨, 한모씨, 임모씨의 가계금전신탁 7억 4900만원을 통장훼손을 사유로 이지점장이 임의로 통장을 재발행하여 무단 인출하였다.
한편 대유섬유, (주)기민, 회성철강(주)에 대한 일시당좌대출 108억원을 유용하였음이 드러났다. 이희도 씨가 은행에서 빼돌려 유용한 금액은 모두 874억원에 달했다.
이희도 지점장의 자금유용 방법
이 씨는 거액의 사채자금을 CD예금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부임하는 지점마다 수신고를 엄청나게 올려놓았다. 상업은행 안에선 이 씨가 한번에 2000억원 정도는 조달할 수 있는 실력자로 소문나 있었다.
같은 해 3월 이 씨가 서소문에서 명동지점장으로 전보되자 서소문지점의 CD예금 900억원도 같이 빠져 명동지점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이 씨는 사채전주에게 사전에 금리약속을 한 뒤 CD를 사게 하는 방법으로 자금을 끌어들였다. CD금리가 연 12.5%인데 실세금리가 15%라면 2.5%가 모자란다.
모자라는 금리를 이 씨가 별도로 보상해 주었다. 은행예금은 금리면에서 단자사같은 제2금융권 고금리상품에 경쟁이 안 된다. 낮은 금리를 주는 은행에 돈을 맡기질 않는다. 그래서 수신경쟁에 쫓기는 은행들은 별도로 금리를 보상해주고 사채예금을 사는 편법을 종종 동원한다.
사채전주와 기업을 연결해 주고 사채알선도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다. 사채알선은 원래 상호신용금고 등 소규모 금융기관에서 흔히 행해져 왔으나, 이 사건으로 은행지점에서도 대규모 사채알선이 행해지고 있다는 점이 새삼 확인된 셈이다.
다만 문제는 금리를 보전할 돈이 어디서 마련되느냐 하는 점이다. 이 씨 사건에서 이 대목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으나 기업들에 대출커미션을 받거나 따로 자금을 개인운용하는 등의 수법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씨는 또 사채자금을 기업과 연결하는 방법으로도 수신실적을 올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예를 들면 사채전주 A씨로부터 예금을 받은 뒤 같은 액수와 같은 기간으로 B기업에 대출해 주는 방식이다. 사채예금은 주로 CD나 개발신탁 등으로 들어오는데, 예금금리와 사채금리 간 차이는 B기업이 사채전주 A씨에게 따로 지급한다.
또 이 씨는 기업에게서 받은 약속어음을 사채시장에서 할인 받아 현금화한 뒤 이를 예금으로 넣어 수신실적을 높이거나 따로 자금 운용하는 방법도 동원됐다. 이렇게 조달된 자금 중 일부는 명동지점의 CD나 개발신탁 등에 예금하고 나머지는 기업대출 등에 운용하는 식의 방법을 사용해 왔다.
그러나 기업자금사정에 여유가 생기고 금리가 떨어지면서 자금운용 쪽이 쉽지 않게 됐다. 사채금리를 지급하고라도 자금을 쓰겠다는 기업을 찾기가 쉽지 않게 되었으며, 대출과정에서 정상적인 금리와 별도의 커미션을 받는 것도 힘들어졌다.
이 씨의 경우도 자금조성을 해놓고도 운용을 못하는 경우가 종종 생겼으며 이로 인해 이 씨의 손해는 누적됐다.
사채시장에서 할인 받는 어음으로는 롯데계열사가 발행한 어음을 많이 사용했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무슨 인연인지는 몰라도 이 씨가 롯데예금을 몰고 다닌다는 소문이 이 씨 자살 전부터 금융가에서 널리퍼져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프로필] 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 전)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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