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금리현실화조치 서두른 이유, 재정안정계획 단서조항 탓
또 하나 금리현실화조치의 직접적인 원인은 1965년 ‘재정안 정계획’의 단서조항이다. 군사정부는 보다 긴밀한 대미경제협력의 필요성과 악화된 제반 경제사정을 고려하여 1963년초 재정안정계획을 부활시켰다. 당시 재정안정계획은 주로 통화 가치 안정을 위한 통화량 조정정책으로서, 5·16 이후 중단되었다가 미국으로부터 원조자금 도입을 비롯한 도움을 받기 위해 1963년부터 재개된다.
이 금리현실화조치가 빨리 이행하게 된 이유로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연간 원조계획의 기초로서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간에 금융개혁을 3~4분기 말까지 이행할 것을 합의한 1965년의 재정안정계획의 단서조항 때문이다.
박영철 금융연구원장과 D. C. Cole의 공저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따라서 동 개혁조치는 이러한 시간계획에 맞추어졌고 원조 자금은 순조로이 도입되었다.”
정부는 1965년 9월 24일 ‘이자제한법’을 급히 고치고 3~4분기 마지막 날이었던 9월 30일에 금리현실화조치를 서둘러 단행한 것이다. 1965년 12월 3일 국회에서 무소속 소선규(蘇宣 奎) 의원의 질의를 들어보자.
“만약 참 그야말로 은행에서 돈을 얻을 힘만 있다고 하면 얼마든지 얻어서 예금을 해 가지고 지금 대출금리가 26%입니다. 또 저축예금을 3할이지요. 나는 그 ‘마진’이 있다고 생각할 적에 금융가수요의 길을 그대로 열어 놓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나는 이것을 조절해야 마땅하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금과 대출의 역금리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소위 지금 금리현실화 내용이 은행에서 대출 받아 18개월 이상 정기예금하여 수지가 맞도록 그렇게 졸렬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26%의 이자를 선이자로 지불하고 18개월짜리 장기정기예금을 해서 월에 2.5%씩 이자를 받는 것으로써 절대 수지가 안 맞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은행에서 융자를 받을 적에는 금리만 지불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험료 있고 등기료도 있고 여러 가지 거기 비용이 드는 것을 다 계산해서 수지가 맞게 이렇게는 안되어 있습니다.”
이 논리에 근거를 두어 예금과 대출금 역금리 제도를 채택하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 조치이후 2차에 걸친 금리조정과 1968년 10월 1일의 금리조정으로 예금이자 25.2%, 일반대출이자 26%로서 역금리체제를 청산한다. 그리고 1972년까지 계속적으로 금리가 저하하였다. 또한 은행의 한국은행에 대한 지불준비금에 3.5% 이자를 부리하여 금융기관수지에 악영향을 주지 않도록 하였다.
기대를 한 몸에 받은 금리현실화 시행 일주일
금리현실화 사흘 뒤인 10월 2일 장 부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정기예금의 증가와 연체회수, 자금가수요의 감소, 고리채 축소, 부동산 투기의 감퇴 등은 물가의 안정과 기동성 있는 행정력의 강화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주일 후 신문 사설은, “금리현실화는 실시 일주일 동안의 경과로 보아 대체로 성공적인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금융통제권 밖에서 국민경제를 좀먹어오던 시중사채금리에 도전해서 단행된 고금리정책은 유통의 주류를 공공금융기관으로 환원시키는데 획기적인 도움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공공금융기관의 공신력 회복은 금융정상화의 기반을 굳히게 됨으로써 이제까지 금융대출을 특혜로 생각하던 폐풍도 줄어들고, 항상 문제가 되어온 금융자금의 가수요를 덜게 하는 한편, 예금증대로 수신 내 여신 원칙이 바로 잡힐 것 같다.”
금리현실화에도 불구하고 염려했던 물가앙등, 사채금리상승, 금리정책 등의 부작용도 나타나지 않았다. 목표였던 내자 동원 측면에서도 8일 만에 저축성예금이 25억원 이상 증가, 당초 기대를 넘는 성과를 나타냈다. 10월 17일 시민회관에서는 금융사상 초유의 전 금융기관 책임자 합동회의가 열렸다.
김세련 한은 총재의 개회사가 울려 퍼졌다.
“이번 금리현실화 조치는 확실히 이 나라 금융사상의 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금융쇄신을 위한 일대전기가 될 것이고 따라서 금융인의 자세에도 전환이 있어야 할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 금융인은 이제 한 자리에 모여 과거 싫든 좋든 우리에게 가해졌던 비판과 그릇된 평가를 자성하고 심기일전, 새로운 자세확립을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이 날의 하이라이트는 장 부총리의 연설.
“금리현실화는 바야흐로 은행인의 사고의 현실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회의 개최의 의의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금리현실화의 목적은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사회 정책적인 세 가지 목표에 있습니다. 경제적 목적이란 제2차 5개년 계획의 성공적 달성을 위한 내자 4900억원의 재원을 저축을 통해 조달하는 것입니다. 정치적 목적이란 금융의 이권성 배제이며, 사회 정책적 목적이란 고리채의 일소에 있으며 현재까지 탈세의 2대 원천이 되고 있는 고리채이득과 부동산이득의 일소에 있습니다. 만일 금리현실화가 성공한다면 그 공로는 일선책임자인 일선 지점장들의 공로에 있으며, 실패한다면 그책임은 중앙에 있는 우리들 정책입안자에게 있습니다. 정부는 보완 조치를 위해 매일 저녁마다 은행장회의를 갖고 대책을 협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퇴전의 결의로써 금리현실화를 위한 적전상륙을 감행한 것입니다.”
금리현실화가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그것이 통화개혁과는 달리 금융인이 주체가 됐다는 점과 경제논리가 강했다는 차이에 있다. 그리고 이 조치가 국민대중을 은행에 끌어들여 국민경제에서 금융의 역할을 크게 확장한 획기적 전환점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또 금리현실화의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경제개발계획이 외부차입 쪽으로 기울어진 가운데, 대부분의 계획사업도 순조롭게 진척되어 당초 목표치보다 훨씬 높은 8.3%의 성장률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제1차 경제개발계획에서 성장률은 계획치를 상회하는 실적을 올리지만, 설비투자실적은 당초 계획치 22.6%를 훨씬 미달하는 15.6%에 그친다. 내자조달면에서도 6.9%로서 계획치에 크게 밑돌았다. 경제개발계획평가교수단은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이와 같이 투자율은 계획을 미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장률은 계획을 초과 달성할 수 있었던 요인은, 첫째 생산증가와 투자 외의 요인 즉, 천우조건에 좌우되는 농업부문이 착실히 증가하였고, 둘째 종래 과잉시설로 저가동율하에 있던 산업인 방직업 식료품 공업과 큰 추가적인 자본비용이 없어도 생산을 어느 수준까지 높일 수 있는 노동집약적 소규모 생산 업체가 내수 및 외수의 증가와 순조로운 원자재공급으로 생산을 급증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앞으로는 이와 같은 저수준의 투자로써 높은 성장을 기대할수 없는 것이므로 보다 많은 투자자본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를 35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외자도입을 촉진한 결과 전반적으로 산업자본은 자금조달중 외자에 의한 자금조달 비중을 크게 높였다. 그런데 이러한 외자 의존적 자금조달은 재벌이 중심이 되었다. 금리현실화 조치는 지금에 와서 보면 대외 의존적인 독점자본의 성장을 돕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독점자본주의의 발전을 초래했다. 이어서 이를 뒷바라지한 금융에 얽힌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눈부신 경제개발성과 ‘차관도입’
1962년에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연평균 경제 성장률 7.9%를 거두고 1966년에 끝났다. 그러나 군사정부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1967~1971년까지 제2차 5개년 계획을 추진하여 연평균 9.7%의 경제성장률을 이룩하였고, 이어서 1972~1976년 제3차 5개년 계획에서는 연평균 10.2%를, 1977년 이후 제4차 5개년 계획에서는 연평균 7.1% 를 거두었다. 그야말로 고도성장을 구가(謳歌)하였다. 그 결과 국민 1인당 GNP 87달러가 1847달러가 되었고, 수출실적 5500달러가 무려 218억5000만달러로 급작스럽게 불어났다.
눈부신 경제개발성과와 격증한 수출실적의 기반이 된 것은 말할 나위 없이 차관도입이었다. 경제건설에 필요한 국내자본이 전무했던 당시 상황에서 유일한 해결책이란 외국차관을 끌어다 쓰는 것이었다. 정부나 기업이나 가장 큰 과제가 외자를 들여오는 것이었다. 민간기업의 차관에 정부는 지급보증을 해주었다. 차관도입이 본격화된 것은 1964년 8월 삼성 이병철(李秉喆)씨가 일본 미쓰이 물산(三丼物産)으로부터 4190만 달러를 들여와 한국비료를 착공한 뒤부터였다.
이를 시발로 주요재벌들은 경쟁적으로 차관 따내기에 나섰다.
1965년 말에 가면 벌써 21개의 공장이 외자로 건설되고 있었고 10여개 기업이 차관도입을 추진 중이었다. 쌍용시멘트는 일본 미쓰비시(三菱)상사로부터 3815만 달러를 도입해 대단위 시멘트공장을 짓고 있었고, 한일합섬의 김한수(金翰壽) 씨는 1950만 달러를 이또오(伊藤)상사에서 도입해 합섬공장을 추진 중이었다.
또 한국나일론 이원만(李源万), 연합 철강 권철현(權哲鉉), 한국베어링 김종희(金鍾喜), 아세아자동차의 이문환(李文 煥), 삼양사의 김상홍(金相鴻), 극동해운의 남궁련(南宮鍊), 효성물산 조홍제(趙洪濟)씨 등이 제각기 일본, 서독, 프랑스 등과 차관도입계약을 체결하고 사업기반을 닦고 있었다. 당시 재벌들이 이처럼 차관도입에 열을 올렸던 것은 당연했다.
내 돈 한 푼 없이도 거대한 공장을 세울 수 있고, 빚은 정부가 보증을 서준다. 이것은 곧 정부가 대신 갚아 준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이렇게 해서 물건만 만들어 놓으면 얼마든지 비싸게 팔 수 있으며, 독점적 지위에 있어 경쟁에 대한 걱정도 없었다. 차관은 할 수 있는 한 무조건 얻어 놓고 보자는 분위기였다. 정 안되면 국가에 헌납하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이었다. 아주 손쉬운 축재수단이었다. 자기 돈이 전혀 없더라도 졸지에 재벌이 될 수 있었다.
필요한 돈은 현금차관이나 은행융자로 해결하고 이를 전적으로 밀어주는 정부와 재벌의 새로운 밀월관계가 본격화됐다. 이미 차관 도입허가는 거대한 특권이 돼 있었다. 곧 부족한 돈을 정부가 특혜적으로 재벌에게 지원한 셈이었다. 이 매력적이고 안이한 축재수단은 경제개발이라는 지상목표와 맞물려 수많은 차관사업을 마구 벌려놓았다.
1967년 6월 1일 현재 확정된 차관 원금은 공공차관이 45건 3억5867만 달러, 상업차관은 80건에 3억6123만 달러였다. 이자까지 포함한 총규모로는 공공차관 4억9499만 달러, 상업차관 4억6043만 달러를 합쳐 9억5542만 달러에 달했다.
또 인가된 차관은 공공차관이 2건 2300만 달러, 상업차관은 109건 3억8940만 달러였다. 즉, 1967년 6월에 이미 한국의 전체차관규모는 무려 13억2870만 달러였다. 1966년의 GNP가 30억달러 내외였으며, 1967년의 수출액이 3억5000만달러였다는 것과 비교하면, 이 수치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눈덩이처럼 불어난 외채의 원리 금상환액도 1962년 100만 달러에 불과했던 것이 1964년 600만 달러로, 1966년에는 1440만 달러로 늘어났다. 어쨌든 이차관도입이라는 새로운 미끼는 재벌들에게는 해방직후의 적산불하, 1950년대의 무상원조와 군납에 이은 또 다른 도약의 발판이었고, 재계의 판도변화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우리가 재벌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대부분이 이때 차관 재벌로 형성된 것이다.
대표적인 차관 재벌을 든다면 락희화학 구인회(具仁會), 쌍용 김성곤(金成坤), 신진자동차 김창원(金昌源), 삼양사 김상홍(金相鴻), 한국나일론 이원만(李源万), 대한산업 설경동(薛 卿東), 인천중공업 이동준(李東俊), 동양시멘트 이양구(李洋 球), 연합철강 권철현(權哲鉉), 현대건설 정주영(鄭周永) 등이 꼽힌다.
이들은 하나같이 여당 및 권력층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김성곤은 공화당의 돈줄을 주무르는 실세였고, 이동준도 여당 내 영향력이 강했다. 락희 구씨 가문의 구태회씨는 공화당 국회의원이고, 이원만 또한 여당소속 의원이었다. 새로운 정경유착의 패턴이었다.
[프로필] 이 국 영
•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 전) 한은 은행감독원 은행검사역
• 전) 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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