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비화 ㊺]명성 김철호 사건<下>

2020.03.21 06:00:00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지난 호에 이어서>

 

소위 수기통장이라는 것을 통해 김철호 씨는 이 은행의 김 대리가 조성한 자금을 사채형식으로 1066억원을 끌어 썼다.

 

국세청이 밝혀낸 명성의 자금조달 방식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일개 은행대리가 은행 안에 사설은행을 따로 차려놓고서 무려 1000명이 넘는 전주(錢主)들을 상대로 돈놀이를 해 명성이 필요한 자금을 공급해 왔던 것이다.

 


보통 사채시장이라고 하면 전화기 한 대 놓고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돈거래를 연상하기 마련인데 명성그룹의 경우에는 은행직원이 아예 은행에 앉아서 기업에 사채를 공급해 주는 역할을 버젓이 해온 것이다.

 

말하자면 김동겸은 은행대리의 신분으로 21개의 계열기업군을 이루고 있는 명성이라는 신흥재벌의 주거래은행장 노릇을 해 온 셈이었다. 김철호 회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명성이 쓰고 있는 은행빚은 20억원에 불과하다’고 큰소리 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엄청난 규모의 사채를 마음 놓고 끌어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건의 전모는 두 가지 점에서 충격적이었다. 첫째는 명성의 신비로웠던 경영의 비법이 전혀 뜻밖에도 사채자금의 조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이었고, 둘째는 그러한 사채자금의 조성과정이 은행이라는 공급기관을 매개체로 삼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건을 다루는 정부의 입장은 이런 식의 경제적 관점에서 머물지 않았다. 명성이 진 죄를 따지자면 거액의 사채자금을 써왔다는 사실, 그리고 이중적인 장부처리를 통해 상당액의 탈세를 했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 정부가 가한 명성에 대한 단죄는 훨씬 가혹한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애당초 국세청이나 검찰은 죄의 내용은 어떠하든 간에 명성이라는 기업을 퇴출시킬 생각으로 덤벼들었으며, 결국 마음먹은 대로 해치운 것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경제장관을 지냈던 모 인사는 정부에서 물러난 후 이에 대해 ‘사실 명성이 무슨 죽을 죄를 지었습니까? 기업이 사업을 하기 위해 비싼 이자를 물어 가며 사채를 쓴 게 무슨 죕니까?’라고 한 말은 무얼 뜻하는 것일까?

 

복역 중인 김철호 회장이 지난번 5공특위청문회에서 ‘명성을 무너뜨린 배후 인물은 이학봉(李鶴捧) 민정수석’이라고 증언한 것은 왜일까?

 

이 같은 의구심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다. 정부는 경제적 동기에서 손을 댄 것이 아니었다. 기업으로서 사업이 잘되고 못되고의 문제가 아니라 가뜩이나 국민들의 의혹을 사고 있는 명성의 성장과정에 대통령의 친인척이 개입되어 있는 소문이 자꾸만 꼬리를 물고 일어난 것이 문제였다.

 

이미 이·장사건으로 인해 대통령의 주변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은 대단히 나빠진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성을 둘러싸고 또다시 친인척들의 비리 문제가 공공연히 제기되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의 핵심부에서는 명성에 관련된 시중 루머에 대해 처음부터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상업은행 김동겸 대리의 자금조달 방법

 

김동겸 씨는 1978년 1월 혜화동지점에 부임하여 1979년 3월경부터 당좌예금계를 담당할 당시 거래처 김철호 씨를 만나 부도마감시간을 연장해 주는 등 편의를 보아주다가 김철호 씨로부터 사업자금 2억원을 마련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평소 거래관계로 알고 있던 사채업자 이명률(李明律.62)에게 예금조성을 부탁하고, 이와 같이 조성된 예금을 은행이나 예금주 몰래 부정인출하여 김철호 씨에게 전달하는 등으로 범죄가 시작되었다.

 

사채업자 박 씨에 이어 박기서(朴基緖.60) 씨를 통하여 예금조성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아침, 저녁으로 그와 연락하는 등 체계적인 연락방법을 갖추었고, 은행 내에서는 예금주에게 수기통장(手記通帳)을 작성교부하는 한편 거래원장을 별도로 작성하여 자신이 언제든지 임의로 인출할 수 있는 자금으로 마련해 두는 등 치밀하고도 조직적인 수법으로 발전하였다.

 

예금유치경쟁의 맹점을 이용, 지점장 차장 등에게 자신의 예금유치능력을 은연중 과시하는 한편, 앞의 박기서 씨를 고액예금주의 대리인인 양 행세케 함으로써 내부통제의 견제를 피하는 등 위장수법을 써 왔다.

 

김동겸 씨는 매일 6~7시 사이 박 씨와 서로 전화하여 각자 장부를 보아가며 그 하루 중 만기해약할 것, 기한연장할 것 등을 사전 파악하고 그 소요되는 금액을 의논했다.

 

김 대리는 박 씨로부터 얼마정도의 자금이 조성될 것이라는 전화를 받고 은행에 출근하였다가 같은 날 오후 박 씨가 조성해 준 금액을 파악하여 퇴근시간에 그를 만나 선이자(先利子)를 전해 주었다.

 

김 대리는 사채자금 입금시 또는 이자청구시에 예금주의 거래신청서 또는 이자전표의 인감 난에 자신이 직접 예금주의 인장을 받아 날인하면서 재빨리 그 밑에 놓아둔 예금청구서 또는 지급전표에도 그 인감을 몰래 날인해 두었다가 자금인출이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인출하였다.

 

이러한 수법과 함께 김 대리는 예컨대 예금주에게는 1억원의 수기통장을 교부하고 예금원장에는 100만원을 기재한 후 나머지 9900만원은 자신이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계좌에 입금시키는 수법을 써 왔다.

 

자금을 김철호 씨에게 건네주는 방식은 교환결제에 돌아오는 명성어음의 결제를 위하여 명성그룹이 갖고 있는 계좌에 입금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였다.

 

명성그룹의 계좌는 당좌계정이 명성관광, 현대중건, 남태평양레저타운 등 3개 계좌, 보통예금 계좌는 명성관광, 명성라바, 현대중건, 남태평양레저타운, 금강개발, 명성컨트리, 명성전자 등 7개로써 모두 10개 계좌였다.

 

김 대리는 매일 17시 지점장에게 보고하는 예금속보에 고의로 같은 날의 입출금상황을 구체적으로 기재하지 아니하고 박영동(朴永東) 등의 가명으로 같은 날의 총입금액과 총지출액만을 기재함으로써 지점장이 구체적인 상황을 모르도록 하였다.

 

대법원 형사부는 1984년 8월 14일 명성그룹회장 김철호 씨에게 징역 15년, 벌금 79억 3000만원의 원심선고를 확정했다. 그리고 상업은행 혜화동지점 김동겸 씨에게 업무상배임횡령죄를 적용, 징역 12년, 이 지점 전 여자행원 송연화(宋蓮花)에게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을 각각 확정했다.

 

그리고 명성관련 수기통장 예금주는 총 1089명 예금액은 1066억원으로 이 중 972명은 원금과 정기예금이자를 합하여 정기예금증서로 내준다는 은행의 화해조건을 받아들여 정기예금증서를 받아 갔으나 나머지 117명중 100명은 이를 거부, 예금청구소송을 제기했고 17명은 소송도 제기 않고 화해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나타나지 않았다.

 

명성사건이 터지면서 수기통장을 둘러싼 분쟁이 일자 1986년 4월 수기통장 예금주들에게 1986년까지의 경과이자를 포기하고, 사채이자로 받은 웃돈을 예금액에서 차감하는 조건을 제시하여 이를 받아들인 예금주에 대해서는 정기예금증서를 주었다.

 

그런데 대법원 민사3부에서는 1987년 7월 7일 명성사건과 관련 김동겸 대리가 발행한 수기통장은 적법한 예금계약이 아니므로 은행은 예금반환의 의무가 없다고 판시했다. 따라서 소송을 제기한 수기통장 예금주들은 이후 김동겸 대리에 대한 사용주(은행)측의 지휘 감독소홀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은행 측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 과실상계의 방법으로 배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영동개발진흥사건

 

1983년 9월 27일 영동개발진흥 총수 이복례(李福禮) 씨(64)와 차남 곽근배(郭根培) 씨(43)가 해인사 백련암에서 검거됐다. 그리고 조흥은행 지점장 고준호(高俊鎬) 씨(54)가 화천에서 자수했다.

 

영동개발진흥은 어떤 기업인가?

이복례 씨는 검거되기 전까지만 해도 전국 곳곳에 호텔체인과 부동산을 갖고 14개 기업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영동개발진흥(永東開發振興), 서일종합건설(西一綜合建設), 도진실업(都進實業), 제일호텔, 부여유스호스텔, 도진종합인테리아, 삼광금속(三光金屬), 일흥기업(日興企業), 일복기업(一福企業), 태평양투자금융(太平洋投資金融), 화신상호신용금고(和信相互信用金庫), 불국사관광호텔, 코단, 학교법인 통율종합학교(通律綜合學校). 여관과 호텔업, 부동산투기와 사채놀이로 거금을 모은 이복례는 1973년 영동개발진흥을 설립했다.

 

그리고 서울영동에 반도유스호스텔을 건설했다. 이 그룹의 모체가 된 영동개발진흥은 그 여세를 몰아 1980년 인천에 700가구분, 서울 강동구 방이동에 900가구분의 아파트를 각각 건설하여 분양하였다.

 

둘째 아들 곽근배 씨가 영동개발진흥의 대표이사를 맡았다. 영동개발진흥은 사고발생 당시 도급순위 75위의 중간규모 건설회사로 성장했다.

 

중동건설 붐이 불자 서일종합건설을 인수하고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등의 해외건설사업에도 참여했다. 특히 필리핀의 ‘오랑갑호’ 도로공사는 1982년 부도를 낸 태화종합건설이 수주한 것을 인수한 것으로 수익성이 없어 고전해 왔다.

 

부여의 유스호스텔, 불국사관광호텔 등을 인수하거나 건설하는 등 부동산 투자를 겸한 관광업투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차남과 3남을 경영일선에 내세우고, 사채와 부동산 사장의 거물인 여인은 서서히 재계에 부상하기 시작한 것.

 

‘죠다시’ 상표의 가방과 봉제품을 수출하는 도진실업은 1000만 달러수출탑도 수상했다. 학교법인 통진종합고교 등을 인수하여 육영사업에 나섰는가 하면 세 사위를 경영에 끌어들려 아들과 함께 각각 기업체를 맡겼다.

 

창업주 이복례 할머니는 누구인가

 

이복례 할머니는 충남 덕산(德山)이 고향으로 경성여상(京城女商)을 졸업한 인텔리여성으로 슬하에 3남 3녀를 두고 있었다.

 

남편 곽 씨(71)를 대신하여 가족의 생계를 떠맡아야했던 이복례 여인이 온양에 여관 문을 연 것은 1950년대.

 

변변한 휴양시설이 없었던 당시의 이 여인의 ‘제일여관’은 언제나 서울손님들로 만원이었다. 깔끔한 음식솜씨와 부담을 주지 않는 분위기 때문에. 그리고 억척스러웠던 이 여인은 쌓이는 돈을 빈틈없이 관리해 갔다.

 

부동산투자와 사채놀이로 엄청난 재력이 축적됐고, 서울의 저명인사들과의 폭넓은 교류가 시작됐다. 당시 내로라하는 저명인사치고 이 여인을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 여인은 유명하게 되었고, 또 ‘여걸’로 소문나게 됐다.

 

온양온천을 찾아 제일여관에 자주 들렀던 모그룹회장이 “당신 같은 수완과 노력이 있으면 서울에서도 성공 못할 리없다”고 이 여인에게 상경할 것을 권유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상경한 이 여인은 남대문 근처의 그랜드호텔을 임차하여 서울에서 본격적인 호텔업에 나섰다. 그리고 임차조건이 너그러웠고, 또 이 여인의 집념이 뒷받침되어 호텔업은 크게 성공을 거뒀다.

 

온양 제일여관 시절부터 알게 된 서울의 유명인사들도 이 여인의 사업을 알게 모르게 도와주었다. 특히 공화당정권의 실력들과 각별히 지냈으며, 야당 거물급 인사들에게 급전이나 정치자금을 주선해줄 만큼 이 여인의 사회활동은 폭이 넓었다.

 

이 여인은 아들들을 자신의 사업에 참여시켰다. 이때에 사채시장에서 이 여인은 이미 손꼽는 큰손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영동개발진흥은 왜 무너졌나

 

알부자로 소문났던 영동개발진흥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무리하게 사업확장을 한 데다 태원건설(太元建設)에 170억원을 떼이는 등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쳤기 때문이다. 영동개발진흥은 주택건설과 전기시공업체인 태원건설에 투자했었다.

 

이 거래는 태원건설 유동수(兪東秀) 사장(46)과 삼남 곽경배(郭慶培) 씨(36) 사이에 이루어졌다. 유 씨는 수원시 정자동에 130가구분의 서민아파트인 백조아파트를 건설하던 중에 이 아파트 부지를 영동개발진흥에 가등기하여 자금을 끌어 쓰기로 했는데 아파트분양이 순조롭지 못하자 조흥은행 중앙지점에 8억 7000만원 등 모두 13억 2000만원을 부도내고 달아났다가 경찰에 검거됐다.

 

영동개발진흥은 1974년 10월 강남구 역삼동에 반도유스호스텔을 짓는데 15억원을 들이면서 처음으로 자금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영동개발진흥은 9억원을 사채로 충당했으나 유스호스텔은 2년 동안 손님이 들지 않아 적자에 허덕였고, 그 사이 사채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1979년에는 빚이 20억원에 이를 만큼 경영난이 심했다.

 

더욱이 1979년에 온양제일호텔을 짓느라 40억원가량의 자금압박까지 가중됐고, 이때에 조흥은행 고준호 지점장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80년 영동개발진흥이 인천시 구월동에 지은 신세계아파트도 분양이 부진하여 대우에 사원아파트로 넘기면서 손해를 봤다.

 

그런데다가 곽경배 씨가 1982년 이철희·장영자부부 어음사기사건에 연루되어 추징금으로 78억원의 손실이 겹쳐서 가뜩이나 허덕이던 자금난은 바닥을 드러내게 됐다.

 

이 때문에 영동개발진흥 측의 자금압박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1983년 7월 명성 김철호 사건이 터지면서 “영동개발진흥이 세무사찰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일시에 어음의 결제요구가 밀어닥치면서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이복례 여인과 3남 곽경배 씨는 전부터 알던 고준호 씨가 조흥은행 중앙지점장으로 부임하자 1980년 1월 하순경 고지점장을 통하여 차장 박종기(朴鐘基 해외도피)를 알게 되었다.

 

이들 모자는 영동개발진흥의 자금사정이 원활하지 못하여 교환어음 결제자금이 부족하니 타점 당좌수표를 자기앞수표로 입금된 양 처리하여 부족한 결제자금을 메워 달라고 이들에게 부탁하여 부정결제범행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2주 후 1980년 2월 중순경 영동개발진흥에 대한 부정결제액은 3억원 상당에 달하게 되었다.

 

고지점장과 박 차장은 감사에 적발될 우려가 있자 좀 더 안전한 방법으로 처리해 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본부의 승인 없이 영동개발진흥 발행어음에 지급보증을 하여주고 이 어음을 할인, 조달한 자금으로 부정결제 분을 충당하기로 하고 범행을 시작하였다.

 

연이어 터지는 대형금융사고들

 

1982년 이·장 사채파동 이후 명성사건, 영동사건 등, 왜 이런 금융사고가 발생했는가?

 

원론적으로 기업이 망하는 건 장사가 잘 안돼서일 것이다. 금융기관이 망하는 이유는 장사 잘못하는 기업에 빌려준 돈을 떼여서일 것이다. 당연한 얘기다.

 

1978년에 홍역을 치렀던 율산사건이 첫 번째 케이스였다. 은행 대출을 얻어 무리하게 사업을 벌리다가 무너졌다. 은행의 입장에서 보면 구제금융을 무리하게 집행했다고는 한다.

 

그러나 대출과정이 불법적이거나 무슨 사기수법에 가담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이후 제일은행이 은행자본금보다도 더 많은 1000여 억원의 자금을 신승기업(新承企業)에 물렸던 것도 해외건설의 무리가 빚은 대표적인 부실결과였다. 그래도 해외건설은 했다.

 

그러나 이·장사건으로 넘어오면서부터 양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전처럼 단순히 부실기업에 빌려준 대출금을 떼이는 것 ‘순진한 차원’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허약한 대기업의 견질 어음을 끌어내 사채시장을 섭렵했고 그 과정에서 은행들은 주인공 이·장을 도와준 성실한 조연역할을 맡았었다.

 

그러나 그들의 특수한 배경이나 당시 전후 상황을 감안한다면 이·장 사채파동은 아무래도 정치적 함수를 통해 풀어나가야 할 사건이었다. 어쨌든 규모나 수법에서 종전까지의 금융사고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국가 경제 전체를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연속적으로 터져 나온 명성사건과 영동개발진흥사건. 금융기관 쪽에서 본다면 ‘상업은행 혜화동지점 사건’과 ‘조흥은행 중앙지점 사건’이 그것이다. 그렇게 불러도 좋을 만큼 엑스트라나 조연 정도에 그쳤던 은행이 이들 대사건에서는 급기야 대단한 주역을 맡기에 이르렀다.

 

정부의 태도는 엉뚱했다.

“금융제도와 영동사건과는 무관한 일이다. 지금의 금융제도야말로 아무 문제가 없다. 과거의 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제서야 터져 나오는 것이다.”

 

“터질 건 터져야 한다. 안정기조를 다져가는 과도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일부에서는 공금리가 너무 낮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어불성설이다. 지금 물가가 몇 %인데 금리가 낮다는 말인가?”

 

한 마디로 말해 자기들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 영동사건은 규모가 크다뿐이지 어디까지나 은행 창구사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특히 1982년 6·28이후의 저금리체제에 따른 금융질서의 왜곡된 현상이라는 지적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잘라 말했다.

 

당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이 사채와 연결되어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장사건은 문제의 공영토건(共榮土建) 어음이 무더기로 사채시장을 통해 ‘와리깡’(할인)됐으며 명성사건은 유명사채꾼들뿐만 아니라 사회저명인사들까지 웃돈이자를 받으려고 혜화동지점을 찾았었다. 영동의 이복례 여인이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지급보증 스탬프가 찍힌 어음으로 사채자금을 끌어 쓰기 위한 것이다.

 

이번에는 항상 문제가 되고 있는 예금 쪽을 한번 들여다 보자.

 

어떤 은행 지점장의 고백 한 토막.

 

“쌈짓돈을 털어봐야 예금실적이 올라갑니까. 역시 큰 고객으로 승부가 날 수 밖에 없어요. 그러나 그 양반들이 어디 말 잘한다고 그냥 예금해줍니까. 인기 아파트의 0순위통장처럼 프리미엄이 붙기 마련이지요. 최소한 세금 정도는 이쪽에서 부담해준다고 해야 말상대를 해줍니다.”

 

형태별로 따지면 우선 몇 푼 안 되는 지점장 판공비 범위 안에서 섭외를 벌인다. 물론 합법적인 것이다. 특별한 학연·지연이 없는 한 이 정도로는 잘 안 된다. 다음 순서가 이자에 대한 소득세를 대신 물어주고 공금리 그대로 이자를 들이겠다는 약속이다. 평소의 대출 커미션이 여기에 투자된다.

 

또한 나름대로의 수완을 발휘해서 급전을 필요로 하는 고객을 확보해 놓고서 은행원이 사채놀이에 직접 나서는 경우다. 고리대금 상대를 많이 확보해 놓고 프리미엄을 보장하는 예금을 유치하는 수법이다. 소위 김동겸 스타일이 그것이다.

 

작년 6·28 금리인하 이후 이 같은 예금유치경쟁은 더욱 치밀해졌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견해다. 금리는 4%나 대폭내리고 실명제의 충격에다 땅값마저 폭등했으니 기존 예금인들 연 8%금리에 그냥 붙어날 리 있겠느냐는 것이다.

 

어음 기준으로 할 경우 3개월 만기 정기예금 금리는 세금 떼고 6.36%에 불과하다. 사실 은행장 자신부터 온라인예금으로 받은 뇌물을 빼내 아파트 사고 환매채를 샀다지 않는가.

 

그 다음 소위 실세금리라는 것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떳떳하게 은행돈을 대출 받을 수 있다면야 연 10%의 이자만 내면 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 기업이 실제로 무는 금리 수준이 어느 정도 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프로필] 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 전)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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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stat10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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