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비화 ㉔]증권파동 사건①

2018.07.21 05:02:14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5월의 증권파동은 1964년 국정감사에서도 액수와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을 밝히지 못한다. 신악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게 한 것은 소위 4대 의혹사건, 그 중 가장 큰 것이 증권파동. 3개월간 7억환 정도만 빌려주면 1백억환을 만들어 주겠다.

 

검은 유착 속 증시, 소용돌이 휩쓸린 증권가 작전본부는 메트로호텔 608호 중앙정보부를 배경으로 윤응상계가 대증주의 7할을 점유하고 대한증권거래소를 사금고화하였다. 대증신주는 액면의 30배로 공매되고, 50전짜리 주식이 50환에 거래되기도 하였다.

 

금통위가 34억원의 시중은행 한도외 특별융자결의로 겨우 과열된 증시의 급한 불을 꼈다.

증권파동 수습과정에서 금통위에서 수모당한 재무부가 한은법 개악을 서둘렀다. 증권시장은 벼랑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와 같았다. 파국의 날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증권파동이 증권, 금융계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일파만파의 충격을 던졌다.

 


5240명에 달하는 선의의 군소 투자자들에게 엄청난 돈을 입혀 그들을 패가망신 내지 자살의 길로 몰아넣게 하였다. 김종필의 말 “협잡질해서 정당 만들었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돈이 흘러 들어왔는지 어땠는지 몰라요.”

 

1964년 11월 12일 국회 내부위원회에서 증권파동에 대한 국정감사결과가 발표되었다. 1962년 5월의 증권파동이 발생한지 2년 반이 경과한 후였다. 서민호(徐珉護) 위원이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그 합의 본 사항의 내용은 도리어 본 위원이 국정감사 보고하려는 점보다도 더 자세히된 점이 없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것이 관점이 달리 되어 가지고 있고 또 액수라든지 인물이라든지 이것이 빠져 가지고 있습니다. 전연 빠진 것이 아니라 상당한 액수가 빠져가지고 있고 또 어느 특정인의 관련된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이 빠져 있단 말이에요. 우리는 어디까지나 국회의원의 입장에서 국정감사를 하는 의미에서 이것을 보고서를 만들어야 할 터인데 내가 어리석은 탓인지는 모르나 내가 보기에는 순전히 당국에서 보고하는 형식으로 되어 가지고 있단 말이에요.

 

우리가 그 말을 정보훈련학교 교정에서 했었고 또 그 후에도 그러한 방법을 취해서 모든 것을 파악하고 소신을 가졌던 만큼 이 점 특별히 불법이라든지 이런 해석을 맡으시고 아무쪼록 반영이 되도록 해주시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그러나 국정감사내용은 준비된 대로 조병완(曺秉完) 전문위원이 낭독해 내려갔다. 그리고 중앙정보부와 농협 등의 증권파동사건 관련자들은 사면조치에 해당돼서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되었다.

 

5월 증권파동의 태동

쿠데타세력의 2인자였던 김종필 씨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외유케하고 시악(新惡)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게 한 것은 증권파동, 워커힐사건, 새나라자동차사건, 회정당구사건 등 소위 4대 의혹사건이다. 그중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킨 것이 5월 증권파동이었다.

본래 증권가는 우는 사람도 웃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모두 울어버린 파동이 1962년 5월에 일어났다.

 

증권파동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윤응상(尹應相)이다. 본적 황해도 해주시 남행리 121. 1939년 일본 中央大學 법학과 졸업, 해방 후 한국통신 상무, 동양통신 전무, 한국비료주식회사 사장 등을 거쳤다. 그 윤응상이 증권가의 왕자로 등장한 것은 1858년 경희증권 고문을 맡으면서부터였다.

 

윤응상, 그의 가슴에는 무슨 응어리가 있었는가.

1·16 국채파동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인 1959년, 또 다른 책동전(策動戰)이 벌어졌다. 소위 대증권 소동이었다. 이 사건은 3월부터 7월까지 벌어진 대증권(대한증권거래소 출자증권)을 둘러싼 파동을 말한다.

 

이때 1962년 5월의 증권파동 시 주역이자 한국증시사상 신화적 인물, 가격조작의 천재 윤응상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등장하는 것이다.

 

그는 시장추이를 꿰뚫어 보고 호재성 재료와 풍문을 유포시키면서 대증권 매입에 돌입했다.

그런데 1958년 5월에 벌인 1차 매수작전은 충분한 자금계획 없이 덤벼들었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고, 거래원 자격마저 취소당하는 쓴맛을 보아야 했다. 그러나 1959년 3월 재개의 기회를 엿보다 경희증권, 동명증권 등을 앞세워 본격적인 매수전을 개시했다.

 

지난해의 실패를 거울삼아 치밀한 계획과 증권 및 대금업자를 많이 끌어 모아 두둑한 자금밑천도 준비돼 있었다.

 

그러나 4월 혁명에 의해 종말을 향해 치달아 가던 자유당 말기의 상황은 업계의 안타까운 염원을 수용할 여유가 없었다. 증권거래법은 해를 넘게 되었고 극도의 사회혼란과 물가폭등에 따라 민심이 흉흉했다.

 

3·15선거를 위해 정부여당은 선거자금 조성에 혈안이 돼 있어 시중자금은 고갈됐는데, 약정고에 대한 각종 증거금 납부와 사채금리 폭등 등 매수측의 부담은 눈덩이처럼 커지기만 했다.

 

결국 매수측 일부 증권사가 견디다 못해 보유증권을 몰래 대량 출회함에 따라 끝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이로써 5개월간의 대증주소동은 막을 내리고 경희증권은 1959년 8월 14일 스스로 문을 닫는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다. 이 제2차 책동전의 결과 시장질서와 증권시장의 공신력은 또 한 번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신화적 윤웅상과 경희증권은 1960년 12월 전열을 가다듬고 새 출발을 시도, 5월 증권파동사건에서 다시 주역이 되는 끈질긴 집념을 보여주었다.

 

윤응상, 그는 어떤 사람인가

한창 날릴 때는 그의 출근시간에 따라 주가가 영향을 받았다는 전설적 인물이었다.

 

단골 술집 아가씨에게 선풍기를 틀어놓고 팁을 뿌려 온 방안에 지폐가 날아 다녔다는, 장안 제일의 현찰소지자, 돈이 돈 같지 않았고 그가 가는 곳에는 항상 호위병들이 그림자처럼 뒤를 따랐다는 큰손 중의 큰손이 바로 그였다. 술집에서의 그의 한마디는 곧 다음날 신문 주요기사였고 증권거래소이사장실과 직통전화가 마련돼 있을 정도였다.

 

5·16쿠데타 나흘 후인 5월 20일 윤응상은 남영동본가에서 중앙정보부 연구실 행정관인 강성원(康誠元) 육군소령의 방문을 받았다. 그가 국내 정치, 경제에 밝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후로도 두 사람은 여러 차례 만났고 윤응상은 증권금융의 필요성, 세제개혁, 국채시장에서 주식시장으로의 전환 등 증시육성방안을 건의했다. 그의 남다른 언변과 설득력은 경제와 증권에 문외한인 젊은 기관원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8월 12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1962년 8월 15일을 기해 군정을 민정으로 이양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같은 성명이 전파를 탄 직후, 충무로 어느 다방 밀실, 윤응상과 강성원이 은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쉽게 군정에서 민정으로 바뀔 수 있겠습니까. 민정이양을 위해서는 우선 1백억 환의 정치자금이 필요한 겁니다.”

 

윤응상은 은근히 강성원의 표정을 살피며 얘기를 풀어갔다.

“돈 있는 사람은 몽땅 부정축재자로 잡아넣고 있지 않습니까. 또 돈이 있다하더라도 이권에 관계없이 내놓으려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강성원은 심각한 얼굴로 동의를 표한다.

“내가 1백억 환을 만들어 줄 테니 3개월간 7억환 정도만 융통해 주십시오.”

강성원이, “저는 돈에 관한 한 문외한입니다”라며 정지원(鄭智元)이란 인물을 소개했다. 중앙정보부 관리실장, 계급은 소령이었다.

 

강성원과 정지원은 어떤 인물인가.

김종필의 중앙정보부가 은밀히 주도한 민주공화당 사전조직, 소위 지하공화당의 핵심멤버었다.

 

1962년 1월, 충무로 1가 카네기홀 2층 밀실, 건장한 30대 7명이 무언가 열심히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계획서 첫머리는 ‘포섭대상선정’이란 과제부터 시작되었다.

 

육군소령 4명, 대위 2명, 공군상사 1명으로 구성된 이 비밀 작업반에서 강성원과 정지원은 리더격이었다.

 

윤응상은 이들에게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도 증권시장에서의 합법적 거래를 통해 돈을 벌어 정치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고 꼬드긴 것이었다. 솔깃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즉 쿠데타 세력이 옷을 갈아입고 재집권하는데 필요한 돈, 그 정치자금 조달을 매개로 권력과 주가조작의 천재 윤응상은 맺어졌다.

 

윤응상이 주식 대증주를 노린 이유

이렇게 해서 1959년의 대증권파동으로 거덜났던 윤응상은 새 작전을 벌일 밑천을 두둑이 마련했다. 1961년 11월 그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작전본부는 거래소 앞 메트로호텔 608호실이었다. 동시에 증권가에는 그의 행동개시설이 퍼지고 대한증권거래소 주식인 대증주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민정이양 발표 후 4개월간을 명동 메트로호텔에서 연구 준비한 끝에 12월 23일 홍병준(洪炳畯) 씨를 불러 통일증권회사의 설립을 지시했다. 자본금을 5억환으로 해서.

 

홍병준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당시의 증권회사 자본금은 2천만환 내지 3천만 환이 고작이었기 때문이었다. 자본금은 정지원 씨의 소개를 받아 융통했다. 다음해 1월 9일 재무부장관의 인가를 얻고 통일증권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그때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는 자본시장의 육성을 통해 선진국과 같이 증권시장에서 산업자금을 조달한다는 것과, 둘째 혁명주체세력을 중심으로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하여 정국안정에 기여하겠다는 점이었다.

 

윤응상은 이렇게 회고한다.

윤응상이 강성원에게 요청한 자금액은 7억환이었다. 이 액수는 어떻게 나왔을까.

1961년의 연간 주식거래량은 40억환, 한달 평균거래액은 3억3천3백만 환이 되는 셈이다. 즉 7억환은 두 달 동안의 주식 거래액을 넘는 금액이었다.

 

청산거래의 기간은 한 달 또는 두 달이므로 7억환이면 당시의 증시규모로 볼 때 시장을 완전히 장악, 시세를 좌우할 자금력이라고 본 것이다.

 

윤응상이 먹잇감으로 삼은 것은 대증주, 가장 물량이 많고 인기 높은 주식일 뿐만 아니라 증권거래소가 주식회사체제가 되면 거래소 지배주주로 증시를 한 손에 쥐고 흔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증권이란 어떤 주식인가.

1955년 12월 정부와 증권업계, 금융계가 망라된 증권거래소 설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됐다.

 

이듬해인 1955년 1월 위원회는 증권단, 금융단, 보험단이 각각 1억환씩 출자하고 거래소는 특수법인으로 하며, 출자증권 좌당액면을 50전으로 할 것을 결정했다.

 

이때 증권업계에서는 구증권취인소 건물수리를 위해 이미 투자한 7천만환을 출자로 간주해 달라고 요청, 잔액 3천만환 출자를 마쳤다.

 

그리고 31개 증권사가 1백93만좌씩 균등 소유하게 됐다. 그후 1958년 당시 증권거래소는 영단제로 자본금 6억환에 출자증권은 총12억좌였는데, 은행단과 보험단이 70%를 소유하고 있었다.

 

국채파동을 계기로 업계와 재무부는 증권거래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그 골자중 하나가 거래소를 주식회사제도로 바꾼 것이었다.

 

즉 주식회사제 거래소가 출범하면 대증권을 많이 가진 사람이 거래소 경영에 발언권을 행사하게 되고, 설사 회원제가 되더라도 1958년 1월 공포된 자산재평가법에 따라 보유자산을 재평가하여 막대한 무상이익이 가능할 예상이었다.

 

큰손이 된 윤응상의 시세조작

당시 시장에서 거래되는 한전주는 10만여 주, 따라서 12만8천주를 손에 넣은 윤응상으로서는 시세조작이 식은 죽 먹기였다. 이미 일흥증권은 매수 전을 벌이면서 무상증자루머를 퍼뜨려 주가를 끌어올려 놓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주식실물을 확보했을 시점에는 1961년보다 세 배나 올라 있었다.

 

그는 청산위원회 소유 한전주의 확보를 비밀에 부친 채 거꾸로 매도 쪽으로 돌변했다.

다른 쪽에서는 한전주가 뭔가 있다고 보고 윤응상 측이 매물도 없이 공매도(空賣渡)하는 줄로 오판, 값을 치올리며 매수로 맞서는 공방전이 벌어졌다.

 

결정적인 순간에 농협에서 주식을 대거 매집했음을 발표해 주가를 폭락시켜 돈을 먹겠다는 작전이었다. 공매도를 했다가 결제일에 주식을 넘겨주려면 결국실물을 사 가지고 주어야 하는데, 결제일에 주가가 올랐다면 매도자가 손해고, 주가가 내렸으면 매수자가 손해를 보게 된다.

 

상대방은 윤응상이 공매도인줄 알고 주가를 올리기 위해 매수전을 펼쳤지만 그가 몰래 확보한 12만8천주가 있었다. 당연히 크게 한몫을 잡았다. 청산거래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한 것이다.

 

윤응상은 3월 들어 다시 동명증권을 인수해 전력을 보강하고 본격적인 대증주 작전에 돌입했다. 여기서 당시 증권시장의 상황을 살펴보자. 1962년 1월 25일 공영제 증권거래소를 주식회사제로 전환하는 내용의 증권거래법이 최고회의에서 통과됐다.

 

윤응상이 누누이 강조하던 증시육성방안이고 증권계의 희망이기도 했지만 이는 극히 위험한 결정이었다. 대증주 거래에는 완전히 불이 붙었다. 연초 90전이던 주가가 3월말에는 9환 20전으로 10배난 폭등했다.

 

증권거래소가 4월 들어 증자를 발표하자 증권업자들 간에는 거래소의 주도권 장악과 증자에 따른 신주배정을 노려 격렬한 사수전이 벌어졌다.

 

4월말 대증주 시세는 실물거래 42환50전, 보통거래 60환으로 액면의 85배와 120배에 달했다. 대증주뿐 아니라 모든 상장주식이 투기대상이 됐다. 한전주는 정부의 8만주 추가공매에도 불구하고 실물거래 4만6천환, 보통거래 6만 환대에 이르렀다.

 

 

[프로필] 이 국 영
•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 전) 한은 은행감독원 은행검사역

• 전) 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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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stat10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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