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비화 ㊻]영동개발진흥사건

2020.04.18 06:00:00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지난 호에 이어서>

 

여기서 당시에 유행하고 있는 기업들의 자금 조달방법을 따라가 보자. 시발점은 단자회사이고 종착역은 뜻밖에도 증권회사다.

 

우선 단자회사를 찾아가서 1%의 수수료를 내고 자기회사 어음에 단자회사의 지급보증 스탬프를 받아낸다. 이것을 들고서 보험회사나 공무원연금공단을 찾아간다. 채권을 빌리기 위해서다. 단자회사 지급보증 스탬프가 찍힌 어음을 담보로 잡히고 1.8%의 대여수수료를 지불한 다음 채권을 빌린다.

 


그 다음은 종착역인 증권회사로 가서 채권을 담보로 현금을 빌린다.

소위 ‘완매채’라는 것. 30일을 기한으로 해서 금리는 연 15% 정도가 보통이다. 결국 기업들이 이 ‘완매채’라는 것을 끌어 쓸 경우 물어야 하는 이자부담은 15% 이자에 지급보증 1%, 채권대여료 1.8% 등 최소한 18%선이라고 봐야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든 돈(완매)이 무려 1조원 가량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체 완매라는 것이 무엇이며 일개 증권회사가 무슨 돈이 있기에 이처럼 요긴한 자금조달 창구노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완매라는 말이 일반에게 생소하듯이 생긴 역사도 불과 1년 남짓하다.

간단히 설명하면 변칙적인 환매채, 즉 일반 채권을 팔아서 증권회사가 고객에게 구두로 한 달 뒤에는 다시 사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주가 증권회사에다 돈을 맡기면서 담보조로 채권을 맡기는 것이다. 거래할 때는 최저단위 1억원 이상에 13% 정도의 금리를 보장한다.

 

예금의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세금도 일체 없다. 이렇게 해서 증권회사로 몰려드는 돈이 1조원. 이 돈으로 증권회사들은 큰소리치며 기업들에게 급전을 조달해 주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단자회사까지도 증권회사를 찾아와 이 완매자금을 빌려쓰는 형편이다.

 

결국 이 완매라는 신발명품은 저금리체제 속에서 만들어진 기존 사채의 변신에 불과한 것이다. 채권이라는 새로운 안전장치를 부착했을 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정리해 보면 금융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채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고 그 영향력은 갈수록 커져왔으며 금융긴축으로 돈줄을 조이면서 불법 지급보증이 새로운 금융관행으로 등장했고 금리인하 이후 은행마다 편법예금유치경쟁이 심화됐고 실제 부담금리가 18%나 되는 완매자금이 기업들의 중요한 자금 파이프라인으로 등장했으며 명성사건이 터지면서 세무사찰 강화로 얼어붙은 사채시장 때문에 기업들의 변칙자금조달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당시 영동사건이 일어난 중요한 원인이 적어도 이·장사건 이후 더욱 심화된 금융왜곡현상에 있었으나 정부는 여기에서 멀리 있었다.

 

어음에 대한 은밀한 부정거래방법

 

영동개발진흥 어음의 부정보증은 초기에는 고 지점장과 박 차장이 공모하여 지점장실에서 영동개발진흥의 백지어음에 지급보증인, 지점장명판, 지점장 직인 등을 날인, 교부하였다.

 

영동개발진흥에서는 이 백지어음에 필요시마다 이 회장, 곽근배, 비서실직원 이미원(李美媛), 박영순(朴英順)이 필요한 기재사항을 써넣었다.

 

그리고는 어음번호, 보증번호, 금액, 발행일 등이 기재된 부정보증어음명세표를 조흥은행 중앙지점대출계 대리 및 행원들에게 주어 외부로부터 확인조회에 대비하게 하였다.

 

결제가 된 부정보증어음을 계속 보관하는 경우, 검사에 적발될 우려가 있으므로 교환에 회부되거나 창구 제시된 부정보증어음은 같은 액수의 회사당좌수표와 대치하고, 대치한 당좌수표는 마치 정상적인 교환절차를 거쳐 회부된 것처럼 보이기 위해 타은행 횡선인과 교환인을 찍고 어음을 폐기하여 범행흔적을 숨겼다.

 

어음용지는 폐기한 부정보증어음의 번호를 잘라내 어음용지 교부신청시 훼손 분인 양 제출함으로써 계속 필요한 어음용지를 확보하였다.

 

이 사건은 처음에는 고 지점장과 박 차장이 주도하였으나 본점으로 전임되자 1983년 3월 이후에는 대부 담당 대리 윤경구(尹庚求) 행원 김용헌(金龍憲)이 같은 방법으로 부정을 저질렀다.

 

영동개발진흥 발행의 어음 등이 교환에 회부 또는 창구 제시되었으나 결제자금이 없는 경우 회사와 공모한 은행 당좌 담당대리들은 앞의 회사 발행타점 당좌수표를 새로이 받아 입금시키며 전표상에는 다른 은행발행 자기앞수표가 입금된 양 허위기재했다.

 

다른 은행 발행 자기앞수표로 허위 기재된 영동개발진흥 발행 당좌수표는 교환에 회부하였다. 다른 은행 발행 자기앞수표나 타은행을 지급지로 하는 당좌수표가 은행의 계수속보상 모두 ‘타점권’으로 분류 집계되므로, 이러한 부정사실이 쉽게 노출되지 아니하였다.

 

교환에 회부된 당좌수표는 다음날 결제자금이 준비되는 경우에는 상대은행에 입금시켜 결제하였고, 미처 결제자금이 준비되지 않은 경우에는 교환회부한 당좌수표와 조흥은행 중앙지점을 지급지로 하는 같은 액수의 영동개발진흥 당좌수표를 당일상대은행에 입금시켜 다음날 중앙지점에서 상대은행에 교환 회부하는 당좌수표와 맞교환 되도록 하였다.

 

영동개발진흥의 이복례 회장과 조흥은행중앙지점 지점장은 유착되어 있었고 직원들은 이를 은폐하는데 발벗고 나섰다.

 

‘이재진을 찾아라 ’

 

전직교사인 40대의 이재진 씨는 바로 영동개발진흥의 조흥은행 지급보증어음을 전주들에게 할인해준 총판의 역할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명동시장에서 영동개발진흥어음은 ‘이재진 어음’으로 통했다. 영동개발진흥의 어음은 모두 이 씨의 손을 거쳐 나갔기 때문이다. 원래는 이 씨의 장인이며 사채시장의 큰손인 김전수 씨가 영동개발진흥과 거래했으나 나이관계로 바로 이 씨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는 것이다.

 

이 씨는 매일 영동개발진흥 측에서 매일 어음을 받아다 중간 사채꾼들에게 할인을 해줬는데 이 씨가 하루 취급한 어음은 20~30억원 정도가 됐다.

 

오전 10시까지만 집이나 강남의 개인사무실에서 ‘계약’을 받는다. ‘계약’은 ‘두 개’, ‘세 개’라는 은어로 이뤄졌는데 두 개는 2000만원을 의미한다.

 

어김없이 10시면 계약을 마감하는데 이 때 돈과 어음을 교환할 장소를 지정해준다. 대개 명동과 충무로 일대의 은행로비에서 만난다.

 

한 은행로비에서 사채꾼들을 한꺼번에 만난다는 것이 아니고 한곳에서 2~3명씩 만나 돈과 어음을 바꾸고는 재빨리 또다른 사채꾼을 만나기 위해 다른 약속된 장소로 간다. 이렇게 해서 이 씨의 일은 10~12시까지면 모두 끝난다.

 

그러나 1982년부터 이 씨는 명동 쪽에는 나오지 않고 강남에 앉아 몇몇 굵직한 중간사채업자만을 이용하여 어음을 풀었다.

 

은행금리가 좋았던 2~3년 전에는 이 씨가 영동개발진흥에서 월 2.5%정도의 할인율로 어음을 받아오고 이것을 전주들에게는 2.4%에서 2.2% 정도로 할인해줬다. 대개 0.1% 정도의 수수료를 이 씨가 떼는 것이다.

 

그러나 은행금리가 낮아지면서 이 어음금리도 떨어져 월 2%정도에서 거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씨는 중간 수수료로 0.1%만 떼어도 한달 500억원~600억원은 거래하니까 수수료만도 5000만원이나 떨어진다.

 

이 씨는 어떤 사건이 터지면 전화번호를 바꿔 한동안은 숨을 죽이기도 한다. 이·장사건이 터졌을 때도 잠적했었다.

 

부정어음으로 조달한 자금 어디에 사용됐나

 

영동개발진흥에 있어서 부동산매입 500억원, 사채이자지급 600억원, 관련기업투자 130억원, 투자손실 등 261억원 등 모두 1491억원. 신한주철은 사채이자 80억원, 손실보전 90억원, 주식투자 30억원 등 모두 200억원이었다.

 

정치자금에 얼마를 주었다는지 권력층에 얼마나 뇌물로 주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힘없는 은행원만 단죄되었다. 그래서 거액금융사건에 연루된 조흥은행 임직원 19명이 구속 기소되었다.

 

결과, 조흥은행 전 은행장 이헌승에게 수재죄를 적용하여 징역 4년, 전 중앙지점장 고준호 등 2명에게는 업무상배임 수재로 징역 3~12년이, 차장 4명은 징역 2년, 대리 10명에게 징역 2~5년, 행원 1명에게 징역 5년이 각각 선고되었다.

 

그리고 직원에게 2억 3700만원을 변상조치하였다.

은행창구의 정당한 기표나 절차 없이 보증한다는 도장만 날인한 것, 이 부정보증어음에 대하여 조흥은행의 지급책임이 있느냐 없느냐 논란이 적지 않았다. 판례를 찾아볼 틈도 주지 않았고 힘의 논리가 여기에도 적용되었다. 무조건 지급이라고.

 

영동개발진흥에 대한 1488억원의 부정보증어음대지급으로 조흥은행의 여신은 급증하였으나 1451억원을 무리없이 회수하였다.

 

역시 부동산을 처분한 것인데 부정어음에 대한 루머가 없었더라면 사채조달행진은 더 계속되었을 것이다. 한편에서는 권력핵심에 지각변동이 있어서 영동개발진흥이 무너진 것이라는 풍문도 꼬리를 물었다.

 

정부는 1983년에 발생한 영동개발진흥 등의 금융부정사건의 발생과정과 재발방지대책을 강구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은행원의 부정에 대한 가중처벌과 책임한계 등을 규정한 특별법을 제정하였다.

 

부실 해운산업과 비자금

 

경제가 정치 환경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안을 놓고 따질 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경제적 동기이고 비경제적인 동기인가를 구분해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부실기업정리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앞서 국제의 경우에서도 살펴 보았듯이 아무리 실무적으로 옳다고 해서 추진했던 정책도 비록 그것이 부분적으로라도 정치권으로부터의 영향을 받음으로 해서 졸지에 어지러워지고 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또 하나의 대표적인 사례가 해운산업에 대한 부실정리 작업이었다.

애당초 해운산업의 부실은 그야말로 순수한 경제적인 측면에서 정부와 은행, 그리고 해운회사들이 합작으로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랬던 것이 막판에 대한선주가 한진에 넘어가고 범양(汎洋)의 박건석(朴建錫)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소동 등이 벌어지면서 해외건설 못지 않은 분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특히 대한 선주의 경우 기업자체의 부실과 집권층으로부터 감정적으로 미움을 샀던 것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넘어지게 된 케이스였다.

 

5공의 비리를 캐자고 했던 국회청문회 등에서는 대한선주를 인수했던 한진에 특혜를 줬느냐 마느냐하는 점에 이 사건의 초점을 맞췄으나 그러한 것은 기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이야기다.

 

예컨대 문제의 대한선주가 누가 봐도 부실한 기업임이 분명한 상황에서 이 회사의 장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금융지원 규모를 비롯한 인수조건 등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초점은 대한선주란 해운회사가 누구한테 넘어갔느냐가 아니라 어떤 배경과 과정을 통해 무너졌느냐하는 점이다. 우선 해운 산업 전반에 걸쳐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984년 5월 정부가 해운산업의 통폐합조치를 발표하기 전에는 해운회사들이 그처럼 골칫거리인 줄은 주요 경제부처의 당국자들조차 몰랐다. 그랬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 해외건설에 버금가는 엄청난 부실더미로 드러났던 것이다.

 

이들의 은행 빚은 무려 4조원, 당시의 여건으로는 어느 회사를 가릴 것 없이 부채상환 능력이 마비된 상태였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인가.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프로필] 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 전)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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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stat10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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