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백제의 사비를 정복한 당의 소정방은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1층에 전체 글자 수 2,126자에 달하는 장문을 기록하였고, 백제의 부여융과 신라의 김법민(문무왕)의 취리산 회맹을 주선했던 웅진도독 유인원은 자신의 공적을 비문에 새겼다.
백제의 멸망으로 국가를 잃은 유민들은 멸망의 한과 전사자들의 명복을 기원하는 불비상을 제작하였다. 당으로 끌려 갔다가 웅진도독으로 활동했던 부여융의 묘지석이 낙양 북망산에서 발견되었다.
승자의 공적비문, 당평백제국비명과 유인원 기공비
당평백제국비명은 비석이 아닌 석탑에 비문을 새겨 넣은 독특한 방식으로 기록하였다. 소정방이 당으로 돌아가기 전에 사비성에 자신의 공적을 급하게 남기기 위해 석탑에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은 제1면 24행, 제2면 29행, 제3면 28행, 제4면 36행에 각 행마다 16자 또는 18자를 적었다. 그 중에 “백제가 천자의 말을 듣지 않고 이웃 나라와 불화하고 밖으로 곧은 신하를 버리고 안으로 요부가 정권을 농단했다”라고 침략을 합리화하고 있다.
한편 승자의 비문이지만 그 당시 상황과 지방지배체제, 호구 상황 등을 정리하고 있다. 그 내용에는 태자가 부여융(扶餘隆)이고, 호구가 74만호 620만에 달하였고, 지방을 5방과 37군 250성으로 편제하였다.

유인원은 소정방을 따라서 왔다가 당군의 총사령관과 웅진도독이 되었다(662). 웅진도독으로 온 백제의 태자였던 부여융과 신라왕 김법민 간 취리산회맹을 주관했다(665). 백제부흥군을 평정한 공로를 새긴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 663)가 부소산에서 발견되었다.
전반부는 마모되어 알 수 없는 부분이 있고, 후반부는 마지막 부분의 몇 자 외에 완전히 마멸되어 알 수가 없다. 의자왕과 백제인들이 당나라로 압송된 사실과 부흥운동의 주요 내용, 폐허가 된 도성을 기록하고 있다.

멸망의 한이 서린 연기파비상
백제 유민들이 왕실과 전사자의 명복과 극락왕생을 기원하면서 불비상(佛碑像)을 세웠다. 불비상은 네모난 돌에 불상과 명문을 새겨서 만든 비석이며, 여기에 발원자의 염원과 이름을 넣어서 대외적으로 알리려고 했다.
불비상은 남북조시대에서 당나라까지 유행했고, 한반도에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의 왕성에 가까운 연기지역에서 발견되면서 ‘연기파 비상’으로 불린다.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像)이 비암사 삼층석탑 꼭대기에서 발견되었다(1960). 백제 유민인 전씨가 발원하여 비상을 만들고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673). 전면은 대형 광배를 지닌 군상과 연화좌대에 아미타여래좌상이 위치한다. 후면은 각 단마다 5구씩의 작은 부처를 조각하고, 불상 사이에 사람의 이름과 관직을 넣었다.

비암사는 뱀의 사투리 ‘비암’에서 유래하며, 백제의 슬픔을 간직한 전설을 담고 있다. 어느 날 비암사에 낯선 청년이 찾아와서 밤새 탑을 돌다가 아침에 돌아갔다. 이러한 행동이 계속되자 한 비구니가 청년에게 탑을 도는 이유를 물었지만 청년은 말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비구니가 그를 미행하여 좇아가서 그가 산 속의 굴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비구니도 굴에 따라 들어가니 커다란 구렁이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구렁이는 “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소원이었다. 100일간 탑을 돌면 사람이 될 수 있다 하여 매일 탑을 돌았다. 당신이 나를 보았으니 사람이 될 수 없고 평생 구렁이로 살아야 한다”라고 했다. 비구니가 이야기를 듣고 구렁이를 위해서 평생을 함께 지냈다.
계유명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도 백제 유민들이 왕실과 선조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웠다(673). 비신부는 앞면의 삼존불좌상을 중심으로 옆면·뒷면에 900여 구의 작은 불상들을 조각하였다.
계유년에 ‘대사 진모씨(大舍眞牟氏)’ 등 250명이 국왕·대신 및 칠세부모(七世父母) 등을 위하여 아미타불과 여러 불보살상을 만든다고 적혀 있다.
또한, 비슷한 시기의 기축명아미타불비상(己丑銘阿彌陀佛碑像)과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彌勒菩薩半迦思惟碑像), 칠존불비상(蓮花寺七尊佛碑像)과 무인명불비상(蓮花寺戊寅銘佛碑像), 납석삼존불비상(蠟石三尊佛碑像)이 전한다.

낙양 북망산(北邙山)은 멀리서 보면 산이지만 가까이 가면 평지로 산이 사라지는 북쪽의 망산(邙山)에서 유래했다. 왕족이나 공경대부들이 북망산에 매장되면서 ‘사람이 죽으면 북망산 간다’는 말이 생겼다.
상여소리에서도 “고관대작 다 버리고 북망산을 찾아갈 제”를 부른다. 낙양의 북망산에서 당으로 간 마지막 태자이자 웅진도독이었던 부여융의 묘지석이 발견되었지만 묘는 찾지 못하였다.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전)동부증권 자산관리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전)(주)선우 결혼문화연구소장
•덕수상고, 경희대 경영학사 및 석사, 고려대 통계학석사,
리버풀대 MBA, 경희대 의과학박사수료, 서강대 경영과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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