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칼럼] 강화도 그 상흔의 역사

2022.06.27 22:11:16

 

 

 

(조세금융신문=황준호 여행작가) 제주목사였던 양헌수는 천총에 임명되어 이미 프랑스군의 휘하에 들어간 강화도를 수복하기 위해 대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통진부에 진을 친다. 그러나 화포 등 월등한 신식장비를 앞세운 프랑스군을 상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장군 양헌수는 기병 작전 등 다양한 묘책을 세웠다.

 

그리고 포수 등 500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야밤을 틈타정족산성(삼랑성) 점거에 성공하였고, 그곳에서 양헌수는 성을 향해 쳐들어오는 프랑스군을 대파하였다. 이 전투로 인해 프랑스군은 조선 침범 한달 여 만에 퇴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서양과의 전쟁에서 최초의 첫 승전보를 올린 전투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역사는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

 

정묘와 병자년 호란에 조선 임금은 두 차례나 강화도로 피신을 하였고 몽골의 침입이 있었던 고려시대에는 개성에서 이곳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그 이전의 시절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왜구와 해적 등 침략자들은역사적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히 강화도를 침략하였고 그럴 때마다 강화도에 살던 이 땅의 백성들은 목숨을 바쳐 맞서 대항하였다.이러한 흔적들은 아직도 강화도 곳곳에 생채기처럼 고스란히 남아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했다. 강화도를 여행한다는 것은 곧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여행이기도 하다. 섬 전체가 굴곡진 역사에 젖어있는 강화도를 진중하게 둘러보는 여행길, 즐거우면서도 마음 한 켠 묵직해져 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강화산성

 

강화산성을 둘러본다. 강화읍내를 에두르고 있는 이 산성은 역사적 배경으로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을 피해 천도를 했던 성으로 그 안에는 고려궁지 등 당시 왕도의 흔적들이 현존하고 있어 도성이라 불러도 틀림이 없다. 동문인 망한루(望漢樓)를 지나 북문인 진송루(鎭松樓) 성곽을 걷다 보면 빼곡한 수풀 사이로 한강과 서해가 만나는 합수머리가 보이고 그 너머로 북한 지역이 눈에 들어온다.

 

 

 

 

언제쯤이면 작은 배를 타고서도 합수머리를 지나 자유로이 개성 땅을 오갈 수 있을지, 천여 년 전 당시 도읍 개성을 버리고 이곳 강화로 피신을 왔던 고려왕조의 모습과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오늘의 상황이 오버랩되니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강화산성은 1232년에 조성되었고 성의 둘레는 약 1.2Km에 이른다.

 

광성보

 

광성보는 1658년 조선 효종 임금 때 설치된 돈대다. 광성보에서 숲길을 따라 용두돈대로 이어지는 이곳은 지리적으로 강화도의 동쪽 해안인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다.

 

용두돈대에 올라선다. 해협 건너 김포가 손에 잡힐 만큼 지척인 이곳은 통상을 요구하며 쳐들어오던 미군들과 최대의 항쟁을 펼쳤던 곳으로, 어재연 장군을 비롯하여 무수한 조선군이 장렬히 순국한 역사 깊은 곳이기도 하다.

 

 

 

 

마치 용이 머리를 내밀고 승천하려는 듯한 용두돈대의 사방으로 피범벅 되어 있던 당시의 상흔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국가가 부유하고 부강한 힘을 지니고 있어야 모든 백성들이 평안해지는 것이라고, 오래 전 우리의 선조들은 그러지를 못해서 맨몸으로 막아선 것이라고, 광성보 주변으로 남아있는 석물들이 대신 말해주는 듯하다.

 

 

 

 

초지진

 

김포의 대명항과 초지대교를 사이에 두고 강화해협을 지키는 1차 방어기지 역할을 한 초지진 역시 1656년 조선 효종 임금 때 설치되었다.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에 위치한 초지진은 굴곡된 개화기의 아픈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찾을 때마다 저절로 숙연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개화기 무렵 열강의 침략을 고스란히 받아냈던 초지진은 1866년에는 프랑스 함대와 전투를 치렀고 1871년에는 미국 해병에 의해 침략을 당하였다.

 

 

 

 

뒤이어 1875년에는 일본 함정에 의해 돈대는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지금도 돈대 옆에 역사의 산증인처럼 서있는 소나무에는 당시 포탄에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 작은 돈대에서 열악한 무기로 목숨 바쳐 끝까지 대항한 당시 군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절로 숙연해진다.

 

전등사

 

서기 381년에 창건된 전등사의 원래 이름은 진종사였으나 고려 충렬왕 때 전등사로 명칭을 바꿔 부르면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찰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전등사는 특히 몽고침략, 조선의 호란, 그리고 근대의 서양침략 사건까지 오랜 시대의 굴곡을 정족산성과 함께 겪어낸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고려 왕실이 사찰 내에 가궐을 지은 것이 계기가 되어 왕실로부터 각별한 관심을 받게 된 후 고려의 여러 선대 왕들과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왕족들의 위안과 국태민안을 기도하는 호국사찰로도 각광을 받아왔다.

 

현재 전등사 내에는 대웅보전, 약사전, 범종 등 국가지정 보물이 있고 기타 사적 및 다수의 문화재가 잘 보전되어 있다. 이처럼 오래된 문화유산들이 큰 손상 없이 보전이 잘 되어 있는 데는 왕족들의 풍부한 지원 아래 수차례 증축이 되었으며, 특히 지형적 특성상 정족산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산성이 요충지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어 사찰 내부까지 쉽사리 함락당한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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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준호 여행작가 ceo@anitou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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