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진민경 기자) 금융당국이 중동 정세 악화로 공급망 불안이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산업별 유동성 방어에 본격 착수했다. 원유 수급 차질 가능성과 함께 유가·환율 변동성까지 커지며 기업 자금 사정이 빠르게 위축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7일 금융위원회는 정부서울청사에서 석유화학·정유업계 및 정책·민간 금융권과 ‘중동상황 피해업종 산업-금융권 간담회’를 열고 관련 지원 방안을 발표했다. 이번 회의는 중동 리스크 대응을 위한 릴레이 간담회의 첫 일정이다.
간담회에 참석한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긴장이 한 달 이상 지속되면서 우리 경제 전반에 복합적인 영향을 미치고 기업들이 직면한 어려움이 심화되는 상황”이라며 “특히 석유화학, 정유산업은 원자재인 원유의 수급 등이 중동지역의 공급망과 직결돼 있는 만큼 이번 사태의 영향을 가장 먼저, 가장 직접적으로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금융당국은 우선 정책금융 공급 규모를 기존 24조3000억원에서 최대 26조8000억원까지 확대한다. 추가경정예산안이 반영되면 약 2조5000억원이 추가 투입되는 구조다. 민간 금융권 역시 53조원+α 규모의 자금 공급과 함께 만기 연장·상환 유예를 병행하고 있다.
중동 사태 이후 한 달간 정책·민간 금융권을 통해 공급된 자금은 10조7000억원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 금융당국은 이를 단기 대응에 그치지 않고 업종별 상황에 맞춘 추가 지원으로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 회사채 경색 풀기…차환 조건 완화로 ‘숨통’
회사채 시장 경색 대응도 병행된다. 신용보증기금의 P-CBO(프라이머리 채권담보부증권) 차환 조건을 완화해 중소·중견기업의 자금 부담을 낮춘다. 기존에는 차환 발행 시 원금의 최소 10%를 상환해야 했지만 이를 5%로 낮추고, 후순위 인수 비율과 가산금리도 각각 최대 0.2%p, 0.13%p 인하한다.
이에 따라 1년 내 만기가 도래하는 약 9000억원 규모의 발행잔액이 지원 대상에 포함되며, 이 중 석유화학 업종 물량은 약 1700억원 수준으로 추산된다.
이번 조치는 단순한 유동성 공급을 넘어 회사채 시장 경색이 실물 위기로 번지는 것을 선제적으로 차단하려는 성격이 강하다. 원자재 가격 급등과 수급 불안이 맞물릴 경우 기업의 현금흐름이 급격히 악화될 수 있는 만큼, 차환 부담을 낮춰 ‘연쇄 자금 경색’을 막겠다는 의도다.
국가 기간산업의 원자재 확보를 위한 지원도 추진된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은 한국석유공사의 원유 도입과 관련한 유동성 지원 방안을 협의 중이다. 이와 함께 1조원 규모의 ‘기업구조혁신펀드 6호’를 이달 중 조성해 석유화학을 포함한 6대 주력 산업의 사업재편과 재무구조 개선 투자에 나설 계획이다.
이미 현장에서는 위기감이 커지는 모습이다. 참석 기업들은 미국·아프리카 등 대체 공급선을 통해 원료를 확보하고 있지만,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생산 차질 가능성까지 배제하기 어렵다고 호소했다. 원가 상승과 수급 불안이 동시에 작용하며 경영 부담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유동성 지원만으로 공급망 불안을 해소하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원유 수급 차질이 현실화될 경우 자금 지원은 시간을 버는 역할에 그칠 뿐, 근본적인 생산 차질을 막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 위원장은 “이번 간담회를 시작으로 주요 산업 대상 릴레이 간담회를 순차적으로 개최해 산업계와 금융권 간의 긴밀한 소통을 통해 업종별 상황을 면밀히 점검하겠다”며 “현장 애로를 정책에 신속히 반영하고 실효성 있는 금융지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전했다.
이번 대응은 공급망 충격을 차단하기보다는 시간을 벌기 위한 성격이 짙다. 원유 수급 차질이 현실화될 경우 금융 지원은 기업의 자금 경색을 늦추는 역할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공급망 충격이 장기화되면 금융 지원은 유동성 보강에 그치지 않고 버티기 비용을 떠받치는 구조로 바뀔 수밖에 없다. 충격이 길어질수록 금융 대응이 실물 리스크를 따라가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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