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이대복 한국 FTA 원산지연구회 이사장)
세관(Customs)이나 관세(tariff, customs duty)라는 제도는 어떻게 생겨 났을까?
세계 관세역사에 관심을 갖고 학습해온 필자의 생각으로는 세관/관세라는 제도가 생성·발전되기 위해서는 세가지 여건이 구비돼야 한다.
첫 번째는, 대외무역·교역이 융성해야 한다. 기원전 5-4세기에 관세제도를 갖추기 시작했다고 추정되는 그리스의 경우 만성적인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는 페니키아인들이 지중해 저편에서 가져다주는 채소, 식량등이 필요하였고 무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로는, 무역상인들이 그 지역 권력자에게 통행세나 수수료 명목으로 교역물품의 일부를 주더라도 (악어와 악어새 같이) 무역상인들의 활동을 안정적으로 보호해 주는 힘, 권력이 건재해야 한다.
그리스 시대의 무역 상인들은 아테네 해군력의 보호아래서 안정적인 교역을 수행할 수 있었다.
셋째로는 오랜 기간, 먼 장거리 이동이 필수적인 무역의 위험을 헷지하고 편리하게 해주는 주조화폐, 해상 보험, 대부제도등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의 경우, 기원전에 이미 주조화폐가 유통되었고, 금융업과 해상 보험을 합친 것 같은 모험 대부(bottomy loan) 제도가 보급되어 있었다.
이러한 여건하에서 가상의 관세선을 그어 놓고 다른 관세영역에서 자국의 관세영역으로 출입하는 관문에 세관을 설치해 놓고 물품의 통과세나 수수료 형태로 관세를 징수하는 것이 초기의 세관제도이다.
서양에서 생성, 발전되어온 관세/세관이라는 관세제도를 모르던 조선은 일본의 기만 외교에 속아 1876년 강화도 조약에 의하여 부산항을 개항하고 1878년 9월 28일 부산 두모진에 내국인에게만 관세징수권을 갖는 해관(세관의 중국식 용어)을 설치하였다가 3개월만에 폐관하였고, 1883년부터 관세부과징수권을 갖는 우리나라 세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883년 5월초 독일인 묄렌도르프가 총세무사(현재의 관세청장)에 임명되어 우리나라의 세관 창설과 운영을 담당하였고, 1883년 6월 16일 우리나라 두 번째 세관인 인천해관이 창설되었다.
1883년 전에는 수입되는 물품에 관세를 부과/징수하여 국가재정수입을 확보하고, 수출입 물품의 통관이 적법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국가기관 즉, 세관의 역할을 하는 기관이 우리나라에는 없었을까?
조선시대의 호시 무역, 고려시대의 각장 무역, 고려시대의 벽란도 국제항구 등이 있으나, 통일신라시대 장보고가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에 세운 청해진은 세관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다.
장보고는 20대 초반에 그 당시 기회의 땅인 당 나라로 가서, 군대에서 출세해 30세(819년) 즈음에는 병사 약 1천여 명을 거느리는 군중소장의 직위까지 올랐다.
828년(흥덕왕 3년) 초에 신라로 돌아온 그는 왕에게 신라인들이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리고 있는 참상을 전하며, 군사 거점을 세워 이를 금지시켜 줄 것을 청했다.
흥덕왕은 즉각 이를 허락한 뒤 그에게 1만여 명의 군대를 주고 대사(大使)라는 특별 관직까지 제수해 주었다.
그는 당시 신라와 당나라 · 일본을 잇는 해상교통로의 요지였던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세우고, 곧 해적을 소탕해 서남해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했는데, 이 해상권을 토대로 당 · 신라 · 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을 주도했다.
그는 이미 1200년 전에 당나라와 일본에 흩어져 살고 있던 신라 유민들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청해진을 동아시아의 무역 허브로 만들고, 신라·당·일본의 국제적인 삼각해상무역망을 구축했다.
당나라와 일본뿐만 아니라 발해와 탐라, 우산국, 참파, 스리위자야, 마타람 왕국, 크메르 제국 등 동양의 많은 국가들과 무역을 하고, 아울러 큰 세력을 이루었다.
중국물건이 수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나 일본의 무역품들도 활발하게 중국으로 수출되었으며 일본과의 무역도 활발했다.
일본 귀족들에게 공급된 여러가지 생활용품 중에는 신라에서 생산된 것을 거래하는 직접무역과 함께, 이슬람이나 동남아시아에서 중국에 들어온 것을 일본에 연결하는 중계 무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장보고가 이렇게 해상무역왕국을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당나라 시대에 앞서 있던 신라의 조선, 항해기술이 일조를 하였을 것으로 추론한다.
신라 해상민들의 뛰어난 조선기술, 항해술은 해상무역의 고위험을 제거해 주고 안정적인 무역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거로 생각한다.
신라방의 선박들은 일본 배보다 안전해서 일본 사신들이나 무역상들이 즐겨 탔고, 신라인 선원을 더 선호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승려 엔닌, <입당구법순례행기>).
또 당시 일본상인들은 중국 문물에 대한 욕구는 컸으나 조선술과 항해술이 신라보다 뒤떨어져 신라상인의 중계무역에 의해 그들의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실정이었다.
청해진을 거점으로 하여 장보고는 당나라에는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의 인솔하에 교관선(交關船)을 보내 교역하였고, 일본에는 회역사(廻易使)의 인솔하에 상선단을 보내 무역하였다.
이는 장보고의 무역이 개인적 성격의 무역을 떠나 신라를 대표하는 무역이었음을 의미한다. 장보고가 교관선에 발급하는 서찰이나 문건은 당의 신라소를 통해 주자사나 절도사의 승인을 얻고, 일본이 장보고와 거래하고자 할 때 장보고가 발급하는 서찰이나 인증문서의 형식에 의거했다.
또한 이 지역의 해상권을 장악한 장보고는 당이나 일본의 선박으로부터 통행세를 거두기도 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장보고의 영향력 아래 있던 산동반도의 신라관이 입당 사신 및 상인들에 대한 입출국 수속의 기능까지 수행했던 점으로 보아, 청해진은 오늘날 세관·출입국·검역(CIQ: Customs· Immigration· Quarantine) 기관과 같은 종합 법집행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무엇보다 통행세를 거두었다는 점은, 이것이 우리나라 관세의 기원이라고 추측할 근거가 된다. 청해진의 설치로 인한 해상 교역의 안정과 재정수입에의 기여로 고무된 신라는 해상교통의 요지에 당성진(*지금의 화성), 혈구진(* 지금의 강화), 장구진(*지금의 장연)등을 잇달아 설치한다.
청해진이라는 신라 중앙과는 유리된 특수한 환경에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해적을 소탕하면서 경험이 쌓인 정예병력들과 막대한 재력을 다시 군사력에 투자하며 힘을 기르던 장보고는 신라 중앙정치에까지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기에 이르렀다.
결국 838년 2월 중앙 정계의 왕위 다툼에서 패한 후 청해진으로 도망쳐 온 김우징을 왕으로 옹립하였고, 여기서 승리한 김우징이 신무왕으로 즉위하면서 장보고의 청해진 세력은 더욱 강성해졌고, 이에 중앙귀족들은 위협을 느꼈다.
중앙정부는 청해진 세력이 강대하여 정면으로 공격하지는 못하고, 자객 염장을 보내 장보고를 암살하였다.
동아시아를 비롯해 세계역사를 바꿔 놓을 수도 있었던 장보고의 해상왕국은 자리도 잡지 못한 채, 장보고가 직접 운영했던 14년간(828-841), 신라 조정에 의해 폐관되기까지는 24년간(828-851)이라는 짧은 세월로 막을 내리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정쟁에서 패한 자의 기록은 역사에 남지 않는 것일까? 김부식의 말처럼(*삼국사기), ‘장보고의 용기도 드높고 뛰어나지만 기록의 부족으로 중국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니’, 장보고의 청해진에 대한 근거/자료가 희박해 아쉽다.
[프로필 ] 이대복 (사)한국 FTA 원산지연구회 이사장
• 現 동국대학교, 세계관세기구(WCO)에서 자금세탁방지론(Anti-Money Laundering) 강의
• 저서 : ‘한국세관의 역사(2009년, 동녘)’
• 호서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박사
- • 2005년 홍조근정훈장 수상
- • 2010.06~2011.06 관세청 차장
- • 2009.09~2010.06 인천공항세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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