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황준호 여행작가) 칼국수는 원래 소박한 음식이다. 밀가루 반죽을 얇게 밀어 칼로 썰어 넣고, 멸치나 바지락으로 우린 육수에 끓여낸다.
한때는 잔칫날이나 장날 같은 특별한 날에나 맛볼 수 있던 면 음식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며 우리 일상의 식탁으로 내려왔다.
그중에서도 해물 칼국수는 바다를 낀 지역에서 자연스레 태어났다. 육지의 멸치 육수에 머물지 않고 바지락과 홍합, 새우와 꽃게 같은 제철 해산물을 아낌없이 넣어 국물 맛을 끌어올린 것이다.
항구 인근에서는 잡히는 해산물이 풍부했고, 그날그날 올라온 재료를 가장 빠르게 소진하는 방법 또한 국물에 넣어 끓이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물 칼국수는 항구 도시의 실용성과 넉넉함이 만나 탄생한 음식이다.
해물 칼국수의 핵심은 결국 국물이다.
바지락이 먼저 입을 열고, 홍합이 뒤따라 시원함을 더한다. 꽃게는 국물의 깊이를 만들고 새우는 은은한 단맛을 남긴다. 여기에 마늘과 대파, 약간의 고춧가루가 더해지면 국물은 비로소 제 자리를 찾는다.
면은 그 국물을 머금으며 익어간다. 칼국수 면 특유의 투박함이 오히려 바다의 맛을 더 잘 붙잡는다. 얇은 면보다 두툼한 칼국수 면이 해물 육수와 잘 어울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다의 짠기와 밀가루의 담백함이 어우러지며, 한 그릇의 국물이 완성된다.
이 음식은 특별히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그 맛을 기억하고 있다. 바닷가에서 먹던 뜨거운 국물,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던 그릇, 그리고 숟가락을 들기 전 코끝에 먼저 닿던 바다의 냄새까지.
해물 칼국수는 이제 전국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대중적인 음식이 되었다. 인천과 속초, 포항과 통영, 그리고 서해안 곳곳에도 저마다 유명한 집 한두 곳쯤은 있다. 굳이 이름을 외우지 않아도 된다. ‘해물 칼국수’라는 간판만 달려 있어도, 바닷가라면 최소한의 맛은 보장된다. 그만큼 이 음식은 이미 한국인의 입맛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봄이 시작되는 3월이면 서해의 풍경도 조금씩 달라진다.
겨울 내내 거칠던 바닷바람은 여전히 차지만, 햇살은 분명 부드러워진다. 갯벌은 서서히 생기를 되찾고, 바다에서는 새 계절의 해산물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이 시기 서해안에서는 바지락과 꽃게, 그리고 주꾸미가 제철을 맞는다.
그래서일까. 봄이 시작될 무렵 바닷가에서 먹는 해물 칼국수는 유난히 시원하다. 겨우내 차가운 바다에서 자란 조개들이 국물 속에서 깊은 맛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보령을 찾는다.
겨울의 끝자락과 봄의 초입이 겹쳐 있는 시기다.
아직 바닷바람은 차지만, 햇살은 확실히 봄 쪽으로 기울어 있다. 대천해수욕장을 따라 걷다 보면 서해 특유의 잔잔한 물결이 마음을 눅여준다. 겨울 관광객이 빠져나간 해변은 한결 조용하고, 그 적막 속에서 바다의 숨결이 더 또렷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곳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해물 칼국수다. 보령에서 현지인들에게 입소문이 난 집이 있다. 이름 그대로 ‘보령해물칼국수집’이다. 화려한 외관은 아니지만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 자리가 금세 찬다.
이 집의 방식은 조금 다르다. 여느 집처럼 해물을 한꺼번에 넣어 끓이지 않는다.
먼저 바지락과 건새우, 애호박 등 채소가 듬뿍 담긴 국물을 끓이고 그 위에 칼국수를 넣어 식탁에서 직접 끓이며 먹는 방식이다.
뚜껑을 열면 김이 한 번에 피어오르고, 바지락은 국물 속에서 입을 벌린 채 바다 향을 내놓는다.
국물은 생각보다 맑고 담백하다. 과한 양념 대신 해산물 본연의 맛에 집중한다. 면은 쫄깃하고 국물은 시원하다. 특별히 튀지 않지만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렇듯 해물 칼국수는 결국 재료와 시간의 음식이다. 바다에서 올라온 해산물과, 그것을 천천히 끓여내는 시간. 그 단순한 과정이 만들어내는 맛이다. 곁들여 내놓는 보리밥이며 사이드 메뉴인 왕만두도 좋다.
보령에는 해물 칼국수 외에도 먹거리가 적지 않다.
대천항에서는 갓 잡아 올린 꽃게와 쭈꾸미, 그리고 봄철이면 주꾸미 샤부샤부가 상에 오른다. 봄 바다의 별미인 주꾸미는 이 시기에 살이 오르고 알이 차 맛이 가장 좋다.
머드축제로 유명한 도시답게 보령의 바다와 갯벌은 늘 풍성한 먹거리를 품고 있다. 갯벌이 만들어내는 조개와 해산물은 이 도시의 식탁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풍경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역시 한 그릇의 국물이다. 해물 칼국수는 거창하지 않다. 바다를 통째로 끓여낸 국물에 면을 넣고 함께 나누는 음식이다. 복잡하지 않고, 화려하지도 않다. 그래서 좋다.
한 숟갈 뜨면 속이 풀리고, 한 젓가락 넘기면 바다가 따라온다.
바닷바람이 아직 서늘한 3월, 그 국물 위로 피어오르는 김 속에서 봄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봄은 그렇게 온다.
서해의 잔잔한 물결처럼, 해물 칼국수 한 그릇의 따뜻한 김과 함께.
■ 보령 둘러보기

대천해수욕장
보령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다. 여름이면 인파로 가득하지만, 3월의 대천은 다르다. 한적하고, 바다는 낮은 숨을 고르듯 잔잔하다. 해물 칼국수로 속을 데운 뒤 백사장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 파도 소리와 발자국 소리만 남는다.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지만, 계절에 따라 다른 표정을 보여준다. 봄의 대천은 유난히 담백하다.
대천항
대천항은 보령의 또 다른 얼굴이다. 새벽이면 어선이 들고 나며, 낮이 되면 수산시장에 활기가 돈다. 꽃게와 쭈꾸미, 바지락이 상자째 오르내린다. 이곳에서 보는 바다는 관광지가 아닌 삶의 현장이다. 해물 칼국수의 국물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그 근원을 직접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무창포해수욕장
무창포는 ‘신비의 바닷길’로 유명하다. 일정한 시간, 바다가 갈라지듯 길이 열린다. 모세의 기적이라 불리지만, 사실은 조수간만의 차가 만들어낸 자연의 질서다. 물이 빠진 갯벌을 걷다 보면 바다와 육지의 경계가 얼마나 유연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달팽이처럼 천천히 걸을수록 더 많은 것이 보인다.
성주산
바다만 보고 돌아오기 아쉽다면 성주산에 오른다. 울창한 숲길과 계곡이 이어져 봄기운을 가장 먼저 느끼기에 좋은 곳이다. 산길을 걷다 보면 서해와는 또 다른 고요가 펼쳐진다. 보령은 바다와 산이 멀지 않다. 그래서 하루 안에 서로 다른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프로필] 황준호(필명: 黃河)
•여행작가
•브런치 [황하와 떠나는 달팽이 여행] 작가
•블로그 | 지구별 여행자 운영자
•스튜디오팝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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