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진민경 기자) 금융당국이 강력한 가계대출 규제 드라이브를 예고하면서 은행권의 시름이 깊다. 금리 인상과 대출한도 축소에도 실수요자들의 문의가 잇따르면서 은행권 내 ‘대출 대란’이 여전하기 때문이다.올해 상반기 기준 가계가 금융기관에서 빌린 대출잔액이 1800조원을 넘어서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자, 현재 금융당국은 초강력 규제 카드를 예고한 상태다.
개인별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 강화일정을 앞당기는 방안 등이 거론되고 있다.가계대출 한도가 임계치에 다다른 데다 금융당국의 규제 압박이 있는 만큼 은행권으로서는 대출을 더 바짝 죌 수밖에 없는데, 전세 자금 대출은 실수요자인 경우가 많아 무턱대고 막기가 쉽지 않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게다가 금융당국에서 코로나19 대출만기·이자상환 유예를 재연장하면서 향후 부실 문제가 가시화될 가능성도 제기돼 전 은행권이 진퇴양난에 빠진 모양새다.
집값 못 잡는데 대출만 조인다?
한국은행이 지난달 8일 발표한 ‘2021년 8월 중 금융시장 동향’에 따르면 8월 말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의 전세자금 대출잔액은 119조 9670억원으로 지난해 말 105조 2127억원보다 약 14%(14조 7543억원) 늘었다.
같은 기간 주택담보대출 증가율이 약 4.1%(473조 7849억원→493조 4148억원)인 점을 감안하면, 약 3.4배가량 높은 수준이다. 이처럼 전세대출이 급증한 이유는 아파트 전셋값이 10년간 큰 폭으로 상승한데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KB국민은행 리브부동산에 따르면, 8월 수도권 평균 아파트 전셋값은 4억 4156만원으로 1년 전인 3억 4502만원과 비교해 28%가 증가했다. 2011년 이후 동기간 상승폭 최대치며, 같은 기간 전국 아파트 평균 전셋값 역시 2억 5939만원에서 3억 2355만원으로 24.7% 올랐다.
금융당국이 가계대출 규제를 강화하고 한국은행이 지난 8월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했지만, 최근 부동산 시장을 고려하면 대출은 여전히 증가 압박을 받는 상황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금융당국이 부동산 시장에 대한 이해 없이 가계대출만 압박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뼈 있는 소리도 나온다.
전세대출도 막힐까
사실 전세대출 증가는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은행권의 월별 전세대출 증가액은 2017년까지만 해도 1조원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2018년 월별 증가액이 2조원을 넘는 경우가 생겼고, 2019년부터는 아예 매월 2조원을 넘어섰다. 2020년부터는 3조원을 넘기는 경우도 있었다. 지난 8월만 보더라도 은행에서 승인한 전세대출이 2조 8000억원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 최근 들어 전세대출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까지 대출 창구로 몰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여윳돈이 있어도 일단 전세대출을 받을 수 있는 한 최대한도 만큼 대출을 받아 보증금을 내고 남는 돈으로 주식 등에 투자하려는 경향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저금리 기조가 이어져온 데다 전세대출 금리가 2%대로 신용대출보다 싼 영향이 이런 현상을 양산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렇다고 해서 은행 입장에서 가계대출 총량 관리를 위해 전세대출을 막는 규제를 제도적으로 요구하기도 쉽지 않다. 무주택 실수요자들의 피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이 규제에 나선다고 해도, 전세대출을 받은 뒤 여윳돈으로 투자하는 사람만 골라 ‘핀셋 규제’를 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전세대출은 신용대출 등과 비교해 비교적 용도가 뚜렷하고 실거래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므로 규제를 강화할 경우 실수요자가 불편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 은행권 관계자 A씨는 “은행 영업점 일선에서 애로사항이 많다. 특히 (전세대출 관련) 실수요자들의 문의와 민원이 폭증하고 있다”며 “은행 입장에선 전세대출 같은 경우 확실한 계약서도 있어 수익성 측면에서 내주지 않을 이유가 없는 부분인데, 당국 압박이 있으니 앞으로는 어떻게 하면 될지 모르겠다. 난감한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금융당국은 전세대출에 관해 강력한 규제를 내놓기보단, 은행 자체의 심사를 강화하도록 해 실수요자들의 피해는 최소화하고 대출자들의 체감 문턱만 높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을 것으로 예상된다.
대출규제의 역설…은행권 누르자 비은행권 ‘풍선효과’
금융당국이 전방위 가계대출 조이기에 일부 대출 수요가 비은행권으로 이동하는 ‘풍선효과’도 확인되고 있다. 당국의 가계대출 규제에도 대출 규모가 좀처럼 줄지 않는 이유가 비은행권으로 대출수요가 이동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대목이다. 한은이 지난달 9일 국회에 보고한 ‘통화신용정책보고서’에 따르면 은행 대출 규모는 줄어든 반면, 비은행대출이 늘어났다.
올해 7월까지 은행의 가계대출 증가액은 51조 4000억원으로 작년 하반기 증가폭인 59조 9000억원보다도 적었으나, 비은행 대출은 올해 7월까지 28조 3000억원 증가하며 지난해 하반기 증가폭인 16조 8000억원 보다 크게 늘었다.
이와 관련 한은은 “금융권 전반의 대출규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규제 강도가 상대적으로 약한 비은행권으로 가계대출 수요가 이동했다”고 설명했다.
은행 대출, 셧다운 릴레이?
가계부채 규제에 따라 풍선효과가 발생한 것은 ‘은행권→비은행권’ 뿐만이 아니다. ‘은행권→은행권’으로의 대출 수요 이동도 포착된다.
실제 지난 8월 말 일부 은행의 대출 한시 중단 조치 이후 대출 수요가 다른 은행으로 대거 이전하면서 은행권에 비상이 걸렸다. 시중은행 중 가계대출 증가율이 가장 낮았던 KB국민은행의 경우 지난 6월 말 기준 1.5%에서 8월 말 기준 3.6%까지 상승했다. 하나은행은 이 기간 3.4%에서 4.6%까지 올랐고, 우리은행도 같은 기간 2.1%에서 3.4%로 증가했다. 신한은행은 1.5%에서 2.3%로 증가했다.
은행들은 다른 은행의 대출 규제 영향으로 가계대출 수요가 몰리자, 가계대출 총량 관리를 위해 한도를 축소하고 금리를 올리는 식의 대응책으로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다.
은행권 관계자 B씨는 “금융당국이 말한 가계대출 총량 관리 목표인 6%대에 위협 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최근 대출 증가세가 심상치 않아 선제 대응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며 “금융당국이 가계 대출 관련 추가 규제를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졌는데 최근 전세대출이 가장 많이 늘었던 점에서 착안, 혹시라도 대출이 막히기 전에 미리 받아야겠다는 ‘가수요’가 몰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의 가계대출 압박에 은행권이 대출 수요에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실수요자들의 민원이 쏟아지고 있다. 은행 입장에선 ‘이중고’를 겪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출 관련 민원이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 8월 은행연합회 소비자공시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국내은행의 여신관련 민원은 전체민원 1155건 중 30.2%(349건)를 기록했다. 지난해 상반기 23.3% 대비 6.9% 늘어난 수준이다.
코로나 대출만기 재연장…부실 괜찮나
은행으로서는 금융당국이 소상공인·중소기업 대상 코로나19 금융지원을 내년 3월까지로 재연장한 것도 부담이다. 은행권은 금융당국의 이런 결정을 이미 예상했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동시에 우려섞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간 은행권은 코로나19 상황을 감안해 대출만기연장은 받아들이더라도, 이자상환 만큼은 재연장에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이자상환 유예가 연장되면 그만큼 부실 차주를 걸러내기가 어려워 리스크가 커지기 때문이다.
앞서 지난달 10일 5대 금융지주 회장들은 고승범 금융위원장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이자만이라도 먼저 받게 해달라’는 입장을 전했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은행들 사이에서 공익을 위해 코로나19 금융지원 재연장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부실 차주나 좀비기업을 중간에서 거르기 어려워진 만큼 리스크 관리는 어려울 것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은행권 관계자 C씨는 “(금융당국에) 지속적으로 이자만이라도 일부 받아야 한다고 말해왔다”면서 “재무제표 확인이 어려운 차주들에게는 이자라도 받아야 정상 또는 좀비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데 이마저 어렵게 된 상황”이라고 전했다.
은행권 관계자 D씨는 “대안이 필요한 상황인 것 같다”며 “현장 실사 등을 통해 차주들의 매출 변화나 자금 상황 등을 주시하는 등 리스크 관리를 위해 만전을 기해야 하는데 당국에서도 이런 부분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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