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신경철 기자) 직장인 김모(40)씨는 3년 전만 해도 매월 초 자정만 되면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새로고침’을 눌렀다. 목표는 10% 할인된 모바일 상품권 500만원어치를 신용카드로 쓸어 담는 것. 이른바 ‘상테크(상품권+재테크)’였다. 이렇게 모은 현금과 카드 마일리지로 그는 매년 아내와 공짜 해외여행을 다녔다.
하지만 2026년 현재 김씨의 마우스 클릭은 다른 곳을 향한다. 한 달에 한두 번 기습적으로 풀리는 6% 할인 상품권을 겨우 10만원어치 사들인 뒤, 네이버페이로 전환해 다이소에서 생필품을 사거나 아파트 관리비 앱(아파트아이)으로 보내 6000원 남짓한 관리비를 깎는 데 쓴다. 김씨는 “과거엔 돈을 불리는 마법 같았다면, 지금은 팍팍한 월급에 생활비 한 푼이라도 방어하려는 고육지책”이라며 씁쓸해했다.
한때 수백만원의 뭉칫돈이 기계적으로 굴러가며 ‘현대판 연금술’로 불리던 상테크 생태계가 180도 뒤바뀌었다. 카드사의 알짜 혜택을 빼먹던 편법적 금융공학은 막을 내렸고, 그 자리엔 고물가 시대를 맨몸으로 버텨내는 서민들의 ‘생계형 실용주의’가 남았다. 지난 몇 년간, 온라인 상품권 시장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내 돈 1원도 안 쓰던 ‘현대판 연금술’
과거 상테크 생태계의 원리는 간단했다. 상테크족이 매달 뭉칫돈을 들여 상품권을 사들인 이유는 독서나 쇼핑 같은 본연의 소비 목적이 아니었다. 타깃은 신용카드를 쓸 때마다 쌓이는 마일리지와 VIP 등급 등 카드사 혜택이었다.
구조는 이렇다. 소비자는 액면가 5만원짜리 상품권을 8% 할인된 4만6000원에 신용카드로 대량 매입한다. 이후 이 상품권을 대형 핀테크 업체의 포인트로 전환한 뒤, 업체 측에 약 8%의 환전 수수료(4000원)를 떼어주고 남은 4만6000원을 자신의 계좌로 돌려받는다.
결과적으로 소비자는 4만6000원을 써서 4만6000원을 돌려받았으니 통장 잔고는 1원도 줄지 않는다. 하지만 신용카드사는 소비자가 매달 수백만원을 정상적으로 ‘결제’한 것으로 인식했다.
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현금을 한 바퀴 굴리는 것만으로 막대한 혜택이 고스란히 쌓이는 기형적 구조였다. 할인율이 10%까지 치솟는 날엔 수수료를 떼고도 현금 차익마저 챙겼다. 판매처와 핀테크 업체, 체리피커(혜택만 챙기는 소비자) 모두가 웃는 폭주기관차였다.
◆ 25년 방치된 시한폭탄, ‘티메프’에서 터지다
이 상식 밖의 뭉칫돈이 시장에 머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제도의 공백이 있었다. 1999년 기업 활동 규제 완화를 이유로 ‘상품권법’이 폐지되면서 발행 및 유통 규제의 빗장이 풀렸고, 이후 상품권 시장은 별도의 등록이나 보호 체계 없이 덩치를 키웠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위태롭던 폭탄 돌리기는 2024년 여름 ‘티몬·위메프 정산 지연 사태’를 만나며 마침내 터졌다. 자금난에 쫓기던 티몬 등은 급전을 끌어모으기 위해 해피머니 등 상품권을 무차별적으로 할인 판매했다. 결제 대금으로 기존 판매자들에게 줄 돈을 메우는 전형적인 ‘돌려막기’였다.
결과는 참혹했다. 해피머니 발행사는 이미 자본잠식 상태였고, 제휴처들이 거래를 끊자 소비자가 들고 있던 상품권은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이 됐다. 2026년 초 법원 인가를 통해 확정된 상품권의 예상 현금변제율은 10.64%에 불과했다. 위험 없는 완벽한 재테크라 맹신했던 수많은 소비자는 원금의 90%가 증발하는 뼈아픈 수업료를 내야 했다.
◆ 지갑 속 ‘호랑이’도 둘로 갈라졌다…생존 위한 시장 분화
대참사 직후 금융당국은 2024년 9월 개정 전자금융거래법(전금법)을 시행하며 선불충전금 보호와 등록 대상을 대폭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한 덩어리처럼 보였던 상품권 시장의 민낯이 드러나며 철저한 ‘시장 분화’가 일어났다.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지갑 속에 넣고 다니던 호랑이 그림의 ‘문화상품권’이 지금 어떻게 쪼개져 있는지 봐야 한다.
과거 한 몸이던 두 발행사는 2023년 1월 1일 발행분부터 완전히 분리됐다. ㈜한국문화진흥은 모바일 상품권(컬쳐랜드상품권)을, ㈜문화상품권은 종이(지류)와 온라인 핀번호 상품권을 각각 나눠 가졌다.
이 두 회사의 운명은 개정 전금법 시행 이후 극명하게 엇갈렸다. ㈜한국문화진흥은 일찌감치 선불업 등록을 마쳤고, 2025년 3월 금융당국으로부터 충전금이 100% 안전하게 보호된다는 지위를 재확인받았다.
반면 ㈜문화상품권에 대해 당국은 "미등록 상태로 영업을 계속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며 수사당국에 확인을 요청하고 소비자 유의사항을 발령했다. 지급보증 없이 발행자의 신용만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경고다.
안전지대에 안착한 ㈜한국문화진흥(컬쳐랜드)은 2025년 8월 ㈜문화상품권의 온라인 상품권 충전을 중단한 데 이어, 2026년 1월에는 지류상품권 충전 서비스 종료를 공지하며 본격적인 선 긋기에 들어갔다. 제도의 울타리 안과 밖으로 시장이 철저히 쪼개진 것이다.
◆ 혜택 끊은 카드사…‘실사용자’ 중심 재편
결정타는 카드사들의 ‘약관 대수술’이었다. 수익성 악화에 직면한 주요 카드사들은 상품권 구입 금액을 전월 실적이나 포인트 적립 대상에서 제외해 버렸다. 모든 카드의 숨통이 끊긴 것은 아니지만, 이른바 무제한 적립을 내세우던 ‘알짜 카드’들이 줄줄이 단종되고 실적 허들이 대폭 높아지면서 과거 같은 대규모 상테크의 싹이 잘려나갔다.
투기 자본이 빠져나간 현재, 실사용 시장의 중심은 모바일 상품권으로 좁혀졌다. 과거처럼 포인트를 무한정 돌려 현금을 빼내는 꼼수는 사실상 막혔다. 현금화 경로는 크게 줄었고, 남은 경로마저 수수료와 한도 제한이 팍팍해졌다. 결국 지금 시장에 남은 이들은 좁아진 한도와 수수료를 감수하고서라도 네이버페이 포인트로 생필품을 사고, 아파트캐시로 관리비를 방어하는 ‘실사용자’들이다.
한 카드업계 관계자는 “과거의 상테크가 카드사의 혜택 설계 오류를 파고든 체리피킹에 가까웠다면, 현재는 실생활 소비로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다”며 “티메프 사태를 거치며 위험 자본이 빠지고 결제 수요만 남으면서, 역설적으로 상품권 시장이 건전한 방향으로 연착륙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조세금융신문(tf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1
2
3
4
5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