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이명구 관세청장) 나는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범죄도시는 유난히 오래 마음에 남은 작품이다. 화려한 액션이나 통쾌한 결말 때문만은 아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오히려 억울함이 잔뜩 밴 한마디였다. “아니, 갑자기 찾아와 가지고 또 못살게 구네!” 진지한 상황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이 대사는 묘한 웃음을 남긴다. 웃고 나면, 문득 생각이 따라온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도 이유 없이 찾아온 일들, 설명할 틈도 없이 억울해지는 순간들을 숱하게 마주한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사건이나 사람들은, 시간이 흐른 뒤 나를 단련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나를 낮추고 단단하게 만든 시간들이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오늘의 나를 만든 큰 그림 속 한 조각이었고, 어쩌면 다른 얼굴을 한 귀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한 기자가 물었다. “힘들어하는 직원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 나는 잠시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포기는 김장할 때 배추 개수 셀 때나 쓰는 말입니다.” 억울함 앞에 선 사람에게는 대개 두 갈래 길이 보인다. 복수이거나, 포기이거나.
(조세금융신문=이명구 관세청장) 최근 가상자산 ‘오지급’ 사고가 발생했다. 단순한 입력 실수, 이른바 팻핑거(fat finger)에서 비롯된 사건이었다. 숫자 하나를 잘못 눌렀을 뿐인데, 그 결과는 62조 원이라는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로 번졌다. 아이러니하게도 해당 거래소는 바로 이런 사고를 막기 위한 내부통제 시스템을 이달 말 도입할 예정이었다. 기술은 준비되고 있었지만, 실수는 그보다 빨랐다. 이런 일은 결코 낯설지 않다. 몇 해 전 한 중견 수출업체가 수출 실적을 달러가 아닌 원화로 신고하는 바람에, 국가 전체의 수출액이 10억 달러나 과다 계상되는 일이 있었다. 첨단 시스템과 자동화가 일상화된 시대지만, 휴먼에러는 여전히 우리의 곁에 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사람의 실수’를 전제로 한 제도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가상자산은 분명 편리하다. 국경을 넘는 송금은 빠르고, 비용은 적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그림자도 존재한다. 비대면·익명성이 강하고 사용자 확인이 어려운 특성 탓에, 돈세탁이나 사기, 불법 외환거래에 악용되는 사례가 끊이지 않는다. 새로운 기술은 언제나 새로운 기회를 주지만, 동시에 새로운 범죄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 특히 가상자
(조세금융신문=이명구 관세청장) 며칠 전, 새로 전입한 사무관들과 조용한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어떤 말을 전해야 할지 잠시 생각하다가, 결국 두 가지만을 강조했다. 인사를 잘하라는 것, 그리고 돈을 멀리하라는 것이었다. 이 말은 새로 만든 조언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내가 사무관이던 시절 같은 과에서 근무하셨던 한 선배 사무관께서 해주신 말씀이었다. 그때는 그 의미를 다 헤아리지 못했지만, 공직의 시간을 오래 지날수록 그 말은 점점 더 분명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날, 나는 그 말씀을 그대로 후배들에게 전했다. 인사는 결국 사람을 남기는 일이고, 돈을 멀리하라는 말은 공직자의 판단을 흐리는 유혹과 거리를 두라는 경고였다. 공직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긴 항해이기에, 처음부터 방향을 잘 잡지 않으면 어느 순간 되돌아오기 어려운 곳으로 흘러가게 된다. 덧붙여 이런 이야기도 했다. 너무 경쟁하듯이 하나의 사다리만 오르려 하지 말고, 각자의 사닥다리를 각자의 속도로 차분히 오르기를 바란다고. 레드오션처럼 한 방향으로 몰려 달리다 보면, 사닥다리가 무너질 수도 있고 병목현상 속에서 누군가는 추락할 수도 있다. 성과와 평가
(조세금융신문=이명구 관세청장)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나는 아직도 하늘보다 땅을 먼저 떠올린다. 살던 마을의 흙길, 그 흙냄새, 그리고 흙이 묻은 엄마의 손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 하교 길에는 늘 엄마의 등이 있었다. 남의 밭에서 품앗이로 파를 캐시던 엄마는 흙 묻은 장갑을 벗을 새도 없이 나를 불러 세웠다. 작은 비닐봉지 하나를 내밀며 “먹어라.” 하시던 그 숨결이 지금도 귀에 선하다. 그 안에는 한 개의 보름달 빵이 들어 있었다. 반은 내가 먹고, 반은 집 강아지에게 주며 해맑게 웃던 날들이 있었다. 누나는 자기 몫이 없다며 종종 투덜댔지만, 나는 달콤함에 빠져 그 말도 흘려들었다. 세월이 꽤 흐른 뒤에야 알았다. 그 빵은 엄마가 간식으로 받은 것 중 스스로 드시지 않고 남겨두신 ‘내 몫’이었다는 사실을. 그걸 알고 난 뒤로 보름달 빵을 쉽게 먹지 못했다. 입에 넣으면 미안함이 먼저 차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마음의 모양도 조금씩 변한다. 지금은 보름달을 떠올리면 미안함보다도 어머니가 남겨주신 ‘둥근 마음’이 먼저 떠오른다. 그 마음이 나를 오늘 이 자리까지 데려왔다고 생각하면, 보름달은 늘 감사의 모양이다. 어린 시절의 음식은 뭐든지 다
(조세금융신문=이명구 관세청장) 추운 겨울이 되면 가끔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리어카에 빨래를 가득 싣고 엄마와 함께 강가로 향하던 날이다. 리어카는 엄마가 끌고, 나는 뒤에서 밀었다. 겨울 강은 얼어붙어 있었고,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몸이 먼저 움츠러든다. 엄마가 빨래를 하는 동안 나는 강가의 자갈을 집어 물수제비를 뜨며 기다렸다. 얼마나 추웠는지 손이 얼어붙는 줄도 몰랐다. 강아지처럼 주변을 맴돌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의 나는 ‘세탁’이란 그저 더러워진 것을 물에 씻어내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나이가 들며 세상에는 ‘돈을 씻는’ 일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뉴스에서 처음 접한 ‘돈세탁’이라는 단어는 낯설면서도 묘하게 강렬했다. 우리나라에 자금세탁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소개하신 분은 고(故) 이강연 관세청 차장님이었다. 차장님은 책자를 통해 자금세탁의 위험성을 알리고, 한국 역시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국제협력과 사무관 시절, 운 좋게도 그분을 상관으로 모실 기회가 있었다. 가까이에서 들은 문제의식은 작은 마중물이 되어 마음속에 남았다. 그리고 2001년 11월 28일, 금융정보분석원(FIU)이 출범했다.
(조세금융신문=이명구 관세청장) 요즘 드라마 모범택시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복수 대행 서비스’라는 설정은 단순한 극적 장치를 넘어, 약자를 돌보지 않는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정면으로 비춘다.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누구나 삶을 살다 보면 “정말 저런 서비스가 있다면 한 번쯤 이용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약자를 대신해 억울함을 풀어주는 대리정의의 서사가 주는 해방감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한강대교 아래에서 정체불명의 물체를 발견한 주인공이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만, 모두가 무심히 지나친다. 결국 그는 “둔해 빠진 것들”이라고 꾸짖는다. 위험 신호를 외면하고, 불의와 부정행위를 관성적으로 넘기는 사회의 무감각을 감독은 이 한마디에 응축해 던진 것이다. 이 문제의식은 관세행정에서도 낯설지 않다. 충분한 재산이 있음에도 이를 고의로 숨기거나 타인의 명의로 이전해 납세 의무를 회피하는 일, 그리고 그 피해가 고스란히 성실납세자에게 전가되는 현실은 우리 사회가 외면할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다. 악성 체납은 단순한 미납이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배신행위이며, 조세 정의의 근간을 흔든다. 이때 필요한